'욕쟁이 예수'
'욕쟁이 예수'
  • 박총
  • 승인 2009.08.01 19:1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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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분노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1)

“야, 이 씨발새끼야!”

작년 봄에 한국에 갔다가 길에서 쪼그만 애들이 거침없이 쌍욕을 해대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오랜 캐나다 생활을 통해 잊고 있다가 한국이 얼마나 욕설이 난무한 사회인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누구나 욕설은 불쾌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조금만 입을 거칠게 놀려도 막 돼먹은 사람, 덜 배운 사람으로 재단해버리는 통속적 윤리는 내 마음을 더 불쾌하게 만든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욕 잘 하는 친구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입술로 범죄치 말라는 경고를 자주 듣기 때문인지, 욕설 한 마디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판단을 완료하는 성향이 훨씬 더 강한 것 같다.

분노하는 그리스도인이어라

그런데 예수님과 세례 요한이 욕을 했다는 사실은 중산층 부르주아지 윤리에 젖은 우리들을 무척 곤혹스럽게 한다. 우리는 보통 그분들을 우리의 입맛에 맞는 점잖은 양반들로 길들여왔기 때문에 도발적인 발언을 일삼거나 스캔들을 일으키는 인물로는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다.

▲ 예수님은 성전이 장사꾼 소굴이 된 것을 보신 그분이 가판대를 둘러엎고 의자를 내동댕이치고 채찍질을 해대셨다. (출처 : free christian clipart)
그분들이 입에 올린 "독자의 자식"(마 3:7; 12:34; 눅 3:7)은 날로 번역하면 “뱀 새끼”란 말이 되고 한국식으로 번안하면 "개새끼"가 아니겠는가.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여자에게서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 칭함을 받았던 요한이 “야, 이 개새끼들아!”라고 하는 상황, 이게 접수가 되는가? 주님은 한술 더 떠서 손수 당신의 형상으로 지은 존재에게 “마귀 새끼”(요 8:44)라고 퍼부음으로 입심에 관한 한 그분의 친척 형을 훌쩍 뛰어넘으셨다.

누구보다 주님을 닮고자 했던 바울도 주님의 걸쭉한 입담을 본받음에 거침이 없었다.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개놈들’이라 부르기에 서슴지 않았으니 말이다(빌 3:2). 하지만 우리가 이들 3인방의 욕설이 문제가 되기는커녕 거룩하다고까지 느끼는 것은 이분들의 욕에 분노가 묻어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분노하는 자로 지어졌다. 보통 분노와 함께 짝을 이루는 비웃음도 ‘이마고 데이’(Imago Dei)의 일부이다. 그분이 비웃으시는 분(시 2:4)이기 때문에 우리도 비웃을 수 있는 존재로 지음 받은 것이다.

그러나 ‘전적 타락’이란 교리대로 타락이란 놈은 우리의 전인(the whole being)에 영향을 미쳤고 말과 행동과 생각과 감정과 모든 것을 망가뜨려놓았다. 분노도 예외는 아니어서 타락 이후 우리는 한편으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엡 4:26)는 말씀과는 달리 화를 내며 죄를 짓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론 마땅히 화를 내야 할 일에 화를 내지 않게 되었다. 게다가 세상은 정당한 분노마저도 거칠고 천박한 것으로 몰고 갔다.

일례로 오늘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어야 하는 처지의 일용직,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생계를 팽개치면서까지 거리로 나와 집단적인 의분을 드러내는데도 우리는 그들의 분노에 담긴 절박감을 보지 못하고 그 안에 담긴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경고를 열납하기는커녕 고작 퇴근길이 막힌다며 분노를 터뜨리는 한없이 옹졸하고 어리석은 것이 바로 우리들이다. 그런 우리의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반응이 이 땅에 불의가 무성하게 번식할 수 있게 해준 숙주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우리에게 분노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키고 다른 이의 분노를 이해하고, 연대하게 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사실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분노가 동반되지 않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닐 수도 있다.

분노 없음을 분노하며

여러분이 나의 사회·정치적 입장을 따라할 필요는 없지만 월급 받고 일하는 국민 과반수가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비정규직으로 몰락했는데도 헌법재판소에서 종부세의 실질적 폐지를 결정하는 등 있는 자들만을 살뜰히 챙기는 나라로 변해가는 현실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을 납득하기 힘들다.

북한과의 관계 경색으로 대북지원이 끊겨 북한 동포들이 지금 이 시각에도 굶어 죽어가고 있고 이에 대해 남북나눔운동의 대표인 홍정길 목사님을 비롯한 교계 어른들이 우려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데도 ‘레드 콤플렉스’에 걸려 이전 정부의 햇볕정책에 무조건 반대로만 일관하는 이명박 정권의 대북정책에 대해 한 줌의 분노조차 없이 그저 북한을 위해 기도하자고 하는 사람들이 진짜 기도를 할 수 있을까 의문스럽다.

외고에 특목고도 모자라 이제는 국제중까지 만들어 초등학생조차 입시 노예로 만들뿐더러 사교육은커녕 생계유지조차 어려운 저소득층을 점점 더 비참하게 만드는 교육 현실(저소득층 자녀를 일정 비율로 받아서 계층 간 불균형을 해소하겠다지만 국제중에 입학한 다음 걔네들이 어떻게 돈으로 처바르는 집 애들과 경쟁이 되겠는가. 결국 있는 집안의 애들의 독점적 지위를 중학교 때부터 공고히 해주려고 계획된 것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국제중 입학생들의 대부분은 고소득층이었다는 보도가 최근에 나간 바 있다)을 보면서도 울분 한 점 없이 그저 내 자식과 우리 교회 아이들이 주의 능력을 힘입어 이 무한입시경쟁에서 승리하도록 기도하자는 교인들을 보면 기가 차서 고개를 흔들게 된다.

의분 없이 나이브하게 기도하자고 하는 분들을 볼 때 하나님이 정의를 팽개쳐두고 종교적 의무만을 다하려는 백성들에게 너희 제사가 역겹고 제물에 구역질이 난다고 분노하셨던 대목(사 1:13)이 떠오르는 것은 나의 교만 때문일까?

▲ 'fuck'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인 <그것에 관하여>의 포스터. (출처 : <그것에 관하여> 홈페이지)
정작 의분을 품어야 할 일에는 불감증에 걸려 있으면서 비본질적인 욕 한 마디에 길길이 날뛰는 우리의 이중성은 언제 고쳐지려는 것일까? 기독교 사회학자이자 미국 교계 지도자인 토니 캄폴로(Tony Campolo)가 한 번은 집회에 가서 일부러 상스러운 말을 한 다음, 자신의 발언에만 분을 내는 이들에게 이르기를, 말 한 마디에 그토록 분노하는 사람들이 왜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사회악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잠잠한지 통렬하게 지적한 적이 있다. 이런 그릇된 모습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매한가지인가 보다.

욕 가르치는 아빠

영어권 국가에 ‘에프 워드’(F word)라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의 ‘쌍시옷’이란 표현처럼 ‘Fuck'이란 욕설을 점잖게 표현한 것이다. 애들이 학교에서 이 말을 쓰면 모두가 두려워하는 교장 선생님 방에 부름을 받게 된다. 한 번은 4학년인 우리 큰아들 해민이한테 책을 읽어주다가 ‘IMF’가 나와서 이 몹쓸 단체가 경제가 아작 난 나라에 돈을 빌려주면서 미국 주도의 국제자본침투가 원활하도록 그 나라의 경제구조를 뜯어 고치며 야기한 만행을 이야기해주었다(참고로 나는 아들놈 2학년 때부터 인종차별(racism), 난민(refugee), 인권(human rights), 소비주의(consumerism) 등에 대한 책을 읽어주고 있다).

이어 전에 읽었던 ‘신자유주의 시대의 신학’에 관한 논문을 인용하며 우리나라에서 노동인구의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 된 것도, 러시아에서 빈부격차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진 것도, 남아공에서 수돗물이 민영화가 되면서 가파르게 오른 수도세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하수를 먹고 집단으로 병에 걸린 것도 다 IMF 때문임을 가르쳐준 다음, IMF는 ‘International Monetary Fund'가 아니라 ‘International Mother Fucker’라고 말해버렸다.

늘 은혜로운 말만 하던 아빠의 입에서 ‘에프 워드’가 나오는 걸 본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래도 거침없이 “Mother fucker!”를 반복하면서 나중에 커서 진짜 분노해야 할 때는 화를 내고 진짜 욕을 해야 할 때는 욕을 하라고 말해줬다.

폭력이라는 정죄의 폭력

소위 폭력적인 행동이란 것도 그렇다. 누군가 조금만 거칠게 분노를 표출하면 그 사람은 이후로 교인들 눈 밖에 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야말로 분노를 몸짓으로 드러내는 본을 친히 보여주셨다. 성전이 장사꾼 소굴이 된 것을 보신 그분이 가판대를 둘러엎고 의자를 내동댕이치고 채찍질을 해댄 것이 무슨 슬로모션으로 하듯이 그렇게 점잖게 하셨을 줄 아는가? “잠깐만요, 제가 상을 둘러엎을 테니 좀 비켜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신 게 아니라 대단히 과격하게 그 일을 하셨을 것이다. 그분은 성전 매매 행위를 통해 기도의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면서까지 불의한 부를 축적하는 대제사장들의 ‘종교적 폭력’에 대해 상을 둘러엎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맞선 것이다.

존경하는 본회퍼(Dietrich Bonhoeffer)가 “미친 운전수가 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돌진할 때에는 그 운전수를 끌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하며 히틀러를 암살하려고 한 것이나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김구가 이봉창과 윤봉길의 배후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테러를 자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전 정화를 폭력이라 부르지 않듯이 본회퍼를 암살자라 부르지 않고 뉴라이트 일각에서처럼 독립투사를 테러리스트라 몰아붙이지 않는다.

코다

다시 말하거니와 내가 예수님께 기대어 욕을 옹호하거나 거친 행동을 부추기려는 것이 아니다. 부디 누가 욕을 하거나 폭력적인 행동을 하거든 은혜가 안 된다며 정죄하는 대신 그 사람의 분노를 헤아리고 나아가 내 안에 하나님 닮은 의분이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다음 글이 계속 이어집니다.)

박총 / <복음과상황> 편집위원, <밀월일기> 저자

* 이 글은 <큐티진>에 실린 2009년 6월호 원고를 수정, 확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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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okybear 2009-08-05 09:10:16
바른일에 분노할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