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게 살기
가난하게 살기
  • 강성도
  • 승인 2014.10.17 14:3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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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락없는 아이가 물맛을 배우듯이

개는 배가 부르면 짖지 않는답니다.

목사 길로 나선 후, 잠시 배부르다가 힘든 일 겪은 뒤로는 가난을 벗 삼아 살아가려고 합니다.

편해지면 기도도 줄고, 더 쉽고 편한 것을 구하게 되고 어렵고 힘든 형제들이 마음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아직 사람이 덜 된 모양입니다. 바울처럼, 빈에 처해도 부에 처해도 마음에 요동이 없어야 하는데 사치스럽게 사는 목사님들을 보면 불편합니다. 너무 궁상스럽게 보여도 그렇지만......,

돈 많이 낸다고 힘주는 사람들 앞에서 소신있게 목회하기 위해서는 한 달에 천불 가지고 사는 것에 익숙해지라고 후배/제자들에게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한 달에 천 불도 못 받고 살았던 적도 많지만,
사실 쉽지 않습니다.최소한 체면은 살려주시지만, 때로 목까지 조여 올 때도 있습니다.

도시락 없는 아이가 물맛을 배우듯 세상에 다른 맛, 하나님께서 가까이 있는 것만 같은 맛을 배우기도 합니다. 생활 전체가 단순해집니다. TV가 없으니까, 별을 보러 지붕 위에도 올라가고 인터넷이 안 되니까, 문 닫힌 빵 가게 뒤에서 흐르는 째즈를 듣기도 합니다. 아파트가 없어지니까, 앉아서 밤을 세울 수밖에 없었고 앉아 있다 보니까, 하나님 생각하고, 잡다한 생각을 접지 않으면 초라해지고 마음이 복잡해지니까, 비움을 연습해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한 6-7년 앉아서 밤을 보내고, 아침이면 일 나가고.....,몇 사람이 따라하다가 결국은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모질다고, 지독하다고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제 자신이 약해서 입니다.약을 먹을 돈도, 깡다구도 없어서 입니다. 하나님께 덤비고, 버티고, 따질 만용도, 주제도 없어서 입니다. 남하고 성내고 싸우고 멱살 잡을 수 없기에 고개 숙여 눈 감고 떠오르는 모든 것들을 잊고, 버리고, 지우고,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궁덩이로 학위를 하듯이 그저 앉아 있었던 것 외에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속에서는 교만과 타인에 대한 멸시(?)의 마음이 앙금처럼 있었습니다. 돈이 마르고 재물이 마른 것은, 겁이 많기 때문입니다. 잘 따지기에 눈에 확실히 보이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질다, 차갑다, 지독하다는 말들이 제게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겉으로 그리 보일지 모릅니다. 우리 아이를 보면서 저리 약해서 어디다가 써먹을까? 하고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바로 제 모습입니다. 지금도 그럴찌 모릅니다.


다만 하도 시달리다 보니까, 이제 아무리 우겨쌈을 당하여도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는지 모릅니다. 다 듣고 나서, 그래도 질기고, “시퍼렇게 차가워!” 하고 말씀하실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오늘 제 모습인가 봅니다.

   
 

 

참고 참고, 또 참고, 견디다 못해 기절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픔도 모르고 깊이 잠들었다가 깨어나게 되지요. 자고 나면, 아픔이 사라진 것을 보며, 세상에 그렇게 깊이 마음에 담아두고,
열내고, 아파하며, 힘들어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몸이 압니다.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이,
어젯밤 주님께서 내게 잠을 허락하셨다는 사실이, 이를 깨물고, 가슴을 뜯으면서, 참아야할 일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반증해 줍니다. 혈기를 내고, 분을 터뜨리고, 분노하며,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 모든 일들이 거품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내성이 생기면, 점점 분노할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분노할 만한 일 앞에서도, 침착하게 차가워질 수 있습니다.

핍박당할 건수를 털끝만큼이라도 만들어 놓고 당하는 것은 -그 이유로 인해 벽 앞에 서지 못하고-,
터럭같은 이유를 만든 사람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때문에 (이성적으로) 참아야만 하는 책임이 내게 떨어집니다. 하지만 아무런 이유없이, 명분도 없이, 내가 만든 것도 아닌데, 억울하게 참아야만 하는 일도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로,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그저 당하고 입을 다물고 견디어야 하는 일이 다가 옵니다.


눈물만 흘리고 가슴에는 아픔도 두려움도, 분노도 담기지 않는 슬픔이 찾아옵니다. 그 슬픔 속에서 사람을 이해하게 됩니다. 사람이 참 악해질 수도 있고, 추악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조용히 가슴으로 안을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그저 사랑하게 되는, 나의 변화를 파노라마처럼 바라보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물타지않고, 서두르지 않고,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 수 있는 것은,
교회를 성장시키고, 성공해야 하겠다는 욕망없이도 그저 감당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그같은 내성이 자람으로써 가능해 집니다. 아무리 찔러도 하루 이상 분노하지 않는 웬만한 일에는 물 한잔으로 삼킬 수 있는 눈을 뜨고 때리는 뺨을 맞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해야 빈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삶은 실재입니다. 멋있는 일이거나 거룩한 일로 보일 만한 여지가 전혀 없을 때도 있습니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그저 입다물어야만 하는 때가 많습니다. 그저 삼키고 넘겨야합니다. 그리고도 언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그러면, 내가 섬기는 주님의 양을 미워하게 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실망하게 됩니다. 내 인생에 실망하게 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아직 내 안에 사랑과 정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천만 다행입니다.
아니면 다시는 쳐다보지 않고 피할 길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내성을 키울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가식이 늘면 내성은 또한 자라지 않습니다. 타협해도 배울 길이 없습니다. 내성이 생기는 것은 나의 노력이나 결단이 아닙니다. 전적인 은혜입니다.

흐르는 내 눈물이 주님의 눈물이 되어질 때 이상한 환희가 찾아옵니다. 주님의 마음을 배우는 것이, 그것을 내 안에 심어주시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너를 있는 그대로, 악한 마음, 추악한 심장을 있는 그대로 삼키고 아파하지 않을 수 있으면, 침을 뺃고, 거짓으로 모함하고, 없는 마음, 없는 말로 패역을 다해도 내 심장에 담지 않을 수 있다면 그러나 시퍼런 눈은 상대의 심장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차가움이 있다면, 그 속에서 나도 그렇다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은 인간 전체를 향한 하나님의 눈물로 변할 것입니다. 그 눈물은 내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며, 왜 이 '땅에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줄 것입니다. 사람을 위해 나같이 나약하고 추악한 인간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며, 이 삶을 살지 않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흔히 말하는 모든 윤리적인 잘못은 이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윤리적 준수가, 본질적 죄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지 못합니다. 흐르는 눈물, 이 눈물이 우리 영혼을 정화시킵니다.

우리 모두 많이 울어야 할지 모릅니다.울 수 있는 환경을 마다하고 인류 전체를 위해 울 수 있는 환경을 마다하고 이 사명을 마다하고 달아나는 것은 죄일지도 모릅니다. 순간을 잊게 해주는 대체물을 찾아 다니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닙니다. 내가 이 땅 위에서, 인간을 위해 해야할 일을 미루고, 다른 곳에 시간과 마음을 파는 것은 죄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는 일은 깡통을 얻어다가 나누어주고
할머니들의 팔을 주물러주고 집을 지어주고 말씀을 풀어주고 교인들을 위해 싸구려 채소를 다듬어 푸성귀 국을 끓이고 동산의 풀을 베는 하챦은 일의 연속입니다. 기껏해야, 심방을 가서 기도하고 위로하는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쓰잘데 없는 일을 하나님께 하듯 하면서 우리 속에서 주님의 향기, 주님의 마음이 담겨집니다. 세상은 효율적인 일, 캐쉬 밸류가 높은 일, 더 많은 소비, 더 높은 지위에 무게를 둡니다.
하지만 가장 사소한 일을 하면서 보람과 의미를 느끼고 - 주님이 함께 하시면서 힘을 주시는 것을 느끼면서 -주님이 도와주셔서 견디는 매일을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세상퐁조를 향해 빙긋 웃을 수 있는, "아무도 통제할 수 없는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다듬어져 갑니다. 이 사람은 아무도 다스릴 수도, 누를 수도 없습니다. 단지, 그가 흘리는 눈물이, 그 눈물을 통해 주님이 몸을 빌려 사용하시게 될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눈물을 배우는 곳이 바로 참고 참고 또참고 참다가 기절하는 자리입니다. 기절한 다음에는 깊은 잠을 편히 잘 수 있습니다. 그 꿈 속에는, 꿈에서 깨어나는 비몽사몽 속에는, 주님이 안아주시는 짧은 만남과 힘주심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힘으로 살아갑니다.
개신교도의 믿음은 - 멋있게 수행해서 갈고 닦아 거룩해지는 것이라기보다는 - 이렇듯 처절하며 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달아날 수 없습니다.  은혜가 다시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사모하며, 또다시 우리를 사로잡아주시기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강성도 목사 / 미주감리교 신학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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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8 2014-10-25 18:30:25
강목사님, 주제넘게 몇자 남깁니다.

목사님 밑에서 배우는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저도 목사님과 비슷한 분 밑에서 배우고 있거든요
미국목회자들 대부분은 강목사님처럼 사시는 분들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저도 그런 목회자가 되고 싶구요.하지만, 늘 유혹에 빠집니다.

중략...

"개품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인터넷에 있는 재미난 사진을 보고
제가 붙인 이름입니다. "해를 품은 달"이라는 사극이 인기를 끌었다고해서...

말그대로 닭이 제 병아리 놔두고 멍하게 생긴 강아지를 품고 있는 사진이예요 한번 인터넷에 쳐보세요.

전 최근 그 사진을 보고 제가 공부한 신학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개품닭"....

강목사님도 쓰셨지요

"사람을 위해 나같이 나약하고 추악한 인간을 불러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개만도 못한 인생을 품어 목사후보생으로까지 만드셨고, 목사를 만드시기 위해 지금도 일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이 길을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하지만 현실이 참 녹록지 않습니다. ...
하지만, 늦은 밤 다시 마음 돌려먹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목사님의 글속에서 만납니다. 감사합니다.

미국연합장로교회(PCUSA)목사후보생 박재석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