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장면을 먹을까요? 짬뽕을 먹을까요?
자장면을 먹을까요? 짬뽕을 먹을까요?
  • 강성도
  • 승인 2014.11.07 05: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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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민

 만일 누가, "하나님 자장면을 먹을까요? 짬뽕을 먹을까요?" 하고 묻는다고 치자. 먼저, 별 미친 놈이 다 있다고 말할지 모른다. 교양이 있다고 여기는 신자들은, “그 정도는 네가 알아서 해라!” 고 말할 것이다. 그런 사소한 문제로 하나님을 괴롭히면 안 된다고 타이를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갑자기 기독교 신앙이 천박해 보이게 만든 것처럼 보여 약간 주눅이 든다. 하지만 몇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먼저 신학적인 점검부터 시작하자.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이다. 하나님이 우주를 운행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고 말한다. ‘자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는 문제는 인간의 생사화복에 해당되지 않는 하챦은 일인가? 정말, 아무 것이나 먹어도 생사에 관계가 없나? 욕심으로, 식탐으로 망가지는 것은 하나님과 관계가 전혀 없는 일인가? 우리가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사는 것이, 정말 자립적이고 교양있는 기독교인이 되는 길인가? 둘째, 어느 것은 소중하고, 어느 것은 하챦은 일이라고 최종 판단할 권한이나 지혜가 우리 인간에게 있는가? 동시에 그 판단의 진위를 가려줄 최종 권위는 누구에게 있는가? 내가 내린 결정이 정말 내게 유익한 결정이요, 내 인생에 도움이 되는 판단이라고 누가 보장할 수 있나? 내가 오늘 내린 결정이 - 사소한 결정이 - 내 미래를 완전히 비틀어버린다면 어찌할 것인가? 내가 내린 결정이 정말 신중한 결정인지? 즉흥적인지? 내 욕심으로 내린 결정인지? 탐욕이나 욕망의 산물은 아닌지? 정말 내 참 자아를 사랑해서 내린 신중한 선택인지를 누가 알 수 있는가? 질문은 끝이 없다. 셋째, 하나님의 내재성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인 동시에 내재적인 특성을 가진 존재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만물 가운데, 내 심령과 내 심장 한 가운데에도 내재하셔야 맞다. 내재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활동하고 계신다. 내재란 단순히 내 안에 거하신다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서 내게 말씀하시고, 힘주시고, 삶의 방향을 이끌어가시며, 나를 변화시켜 가신다. 예수님의 말처럼, ‘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의 역동성이며 동시에 선취권이다. 그가 내 앞서 일하시기에 내가 따라 일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다는 언명처럼, 내 안에서 지금도 일하신다. 내 바깥에서 일하시는 것도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찌 묻지 않고 살 수 있는가?

정말 나를 위한 결정인가?

짬뽕을 고르거나 자장면을 고르는 것은 내 입맛이나 당시의 주머니 사정에 맡기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욕망으로 내린 결정이라면, 육신의 병이 되어, 내게 칼을 들이댈 것이다. 입맛에 의지해서 과식한다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버린다면, 득보다는 실이 많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 우리들은 멀리까지 내다보지 못한다. 그 순간에 결정을 내리고, 잠시 고민하다가, 둘 다 먹는 길을 택하거나, 어느 한 쪽을 선택하고 만다. 내 미래까지 연결해서 보는 안목이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들이 내리는 결정은 순간적인 판단에 의해 내리는 경우가 많다. 주위 사람들이 풍기는 분위기나, 그 당시의 욕망 - 식욕, 성욕, 명예욕, 물욕, 성공욕 등등 - 이 나의 결정의 근간이 된다. 하지만 욕심대로 내린 결정이 십년 후, 이십 년 후에도 진정 내게 유익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기 쉽지 않다. 욕심으로 내린 결정이, 빈 껍질밖에 남겨 준 것이 없다는 것을 삶을 통해 체험하기 때문이다.

신앙적으로는, 내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는 일이다. 판단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고 여기는 자체가 문제이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의 판단 기준을 내가 갖고 있다면, 우주의 전체 흐름 속에서, 내 인생의 전 과정 속에서, 정말 나 자신이 그런 판단을 내릴 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작은 것을 맡기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큰 것을 아무런 앙금없이 맡길 수 없다. 두려움없이 불안없이,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판단 앞에 내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만이 가장 온전한 판단을 내리고 가장 선하신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고 우리는 고백하지 않는가?

하지만 실제의 모습은 판이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입과 삶이 유리되어 있다. 무게가 실리지도, 그렇게 살아가야 할 신앙의 틀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믿고 구원받았다는 이야기만 되풀이할 뿐, 구원받은 자가 이 땅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틀이 없다. 의롭다함을 받은 순간부터 거듭남으로 나아가야 하며, 성화되어야 한다. 거듭남과 성화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내 바깥에서 활동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그 순례를 지속할 수 없다. 구원의 완성에 이를 수도 없다.

내가 먹는 음식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은 자기 몸도 사소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요즈음은 한창 건강식이 유행이다. 유기농을 값비싸게 구입하여 먹는다. 그 역시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그리고 소위 말하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며 건강식을 찾는다. 정말 그렇게 먹으면 자신에게 유익할까? 몸뚱아리가 건강하면 좋은 인간, 바른 인간, 행복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나 하나 건강하기 위해, 남에게 나누어주어야 마땅한 음식 값을 낭비(?) 하는 것은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결정일까? 자신이 없다. 남을 돌아보지 못하는 건강체는 어딘가 한 군데가 빠진 허약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동시에 몸만 건강하다고 인간이 건강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몸은 건강한데, 정신이 썩은 사람도 있다. 지극히 이기적이고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어서 남에게 해가 되는 인간도 있다. 자신의 속 사람은 신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내가 이리저리하는 것이 내게 유익할 것이라고 내리는 결정이 결코 절대적일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내가 내린 결정이 내게 도움과 유익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나를 신뢰할 수 없다. 적어도 나의 개인적인 체험으로는 나는 그렇게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없이 내린 결정은, 그렇게 사는 것은 하나님과의 실질적인 단절로 이끌어간다. 다시 말해 하나님없이 살아가게 만든다.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지로는 하나님없이 잘 살아가고 만다.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마틴 루터는 죄라고 불렀다. 실질적인 관계가 없이 살아가면서 죄를 안 짓는다고,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대단한 용기(?)이다.)

개신교 신학은 인간의 한계에 대해 늘상 지적해 왔다. 스스로 선을 행할 능력과 지혜가 없다고...., 이 한계성을 인간론의 첫 장에 둔다. 동시에 원죄론과 연계해서 인간의 피조성과 하나님의 은총의 필수성을 강조해 왔다. 더욱 심화되면 “대속론”과도 이어지고, 인간의 구원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불가하다는 것을 대전제로 삼는다. 그래서 은총으로 구원받으며, -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 앞서 행하셨다 (루터) -, 나는 그저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면 된다고 가르쳤다.

과연 그렇게 살았나?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나?

그런데 실제적인 삶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도, 인간의 한계성을 심각하게 강조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 의존해야 한다. 그 의존의 첫 단계가 여쭈어 보는 것이다. 먼저 물어보아야 한다. 듣고 못 듣고 차후 문제이다. 묻는 자세가 중요하다. 내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것이 먼저이다. 그렇다면, 겸손을 배울 수 있다.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는 그 한계를 벗어나는 길도 알게 된다.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이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시기에, 내 안에서 속삭이며 설득하며 받아들이도록 인도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다. 근자에 이르러서는, 인간됨을 스스로 결정하는 능력으로 오인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은총의 초대를 거부하는 것을 마치 자유의지인양 혼동하게 되었다. 수용과 피동성이 하챦은 영적 미덕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먼저 계획하시고 말씀하시고 행하시고, 우리의 응답을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은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시 되묻고 재차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묻고 대답하고, 다시 들으면서 확신이 생기고, 갈 방향을 깨닫게 되며, 그리고 갈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이 전체 과정이 바로 믿음이다. 동시에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이다. 점점 예민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게 되고, 그 뜻을 분별하며, 겸손하게 힘을 얻게 될 때까지 기다릴 줄 알게 된다. 그래서 수용적이며 피동적인 사람이 되어간다. 앞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친히 앞서실 때까지, 결정을 내려주실 때까지, 얌전한 신부처럼 기다리게 된다.

가까이 다가와 내 가슴을 풀어주는 것을 온 몸이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분의 향기를 구별할 줄 알게 된다. 어느 길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원하심인지 점점 더 밝히 알게 된다. 지치고 곤하여 주저앉을 때 다가와 속삭이며 위로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게 된다. 점점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 교제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 첫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 짜장면을 먹을까요? 짬뽕을 먹을까요?”이다. 이런 것부터 묻기 시작해야 한다. 물으면서 수없이 틀려야 한다. 그 속에서 아직도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작은 욕망이며,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쉽게 살려는 안일한 자기 보호 본능임을 깨닫게 된다. 내 안에 두 개의 법이 있음을 온 몸이 알게 된다. 원하는 선 대신, 원하는 하나님의 뜻 대신, 쉽고 편하고, 내게 유익한 것처럼 보이며 짧은 이익에 내 전 존재를 팔아치우는 것을 스스로 목격할 수 있다. 너무 쉽게 판단하고, 거의 반사적으로 결정을 내리고 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아니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받은 은총이 얼마나 큰데! 자신의 한계를 마주하게 된다. 이런 실수를 수없이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점점 헤아릴 수 있게 된다. 많이 물을수록 내가 얼마나 그 분으로부터 멀리 있는지 알게 된다. 동시에 이끌림을 받아 내린 결정이 궁극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점점 - 이성적 비판의 과정을 통해 - 확신하게 된다. 그래도 넘어진다. 래서 더 기도할 수밖에 없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판단을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가슴을 열게 된다. 솔직해진다. 숨김이 없어진다. 하나님께서 나보다 더 나를 잘 알고 계심을 점점 느끼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가리지 않고, 솔직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열어 놓으며 다가 갈 때, 그 어느 때보다 가까운 친밀함이 무르익어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 안에 온통 가득해짐을 맛볼 수 있다.

하나님을 진정 사랑하는가?

나의 모든 것을 내어드릴 수 있는가? 그 시작은 사소한 것의 판단과 결정을 하나님께 내어드림으로부터 시작된다.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에, 내 삶의 가장 사소한 것부터 가장 소중한 것까지 그 분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 무엇이 가장 소중하며 무엇이 사소한 것인지? 그 순서와 배열을 다시 배우게 된다. 곧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된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사셨던 삶의 모습이, 그 마음을 헤아리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게 될수록, 진정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 무엇인지 뚜렷해진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나 - 남들이 보는 나에 얽매였던 - 나의 가치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의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진정 신뢰하고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 오래 전부터 한없이 사랑해 오셨음을 마치 처음인 것처럼 - 놀람으로 알게 된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뗄 때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셔서, 내게 가장 유익한 판단과 결정을 주셨음을 확인하게 된다. 하나님의 오묘하심과 신비, 무한하심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나를 위해 오늘도 당신의 등에 채찍을 대며, 나를 보호하고 계심을 신비적인 방식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 사랑 앞에 다시 무너지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바친 신뢰와 맡김이라는 것이 그 사랑 앞에서 얼마나 허약하고 비천한 것인지 확인하게 된다. 그래서 다시 엎드려 기도하게 된다. 사랑을 감사하고 내 사랑을 고백하게 된다. 사실 할 말이 없다. 넘을 수 없는 벽 앞에 서기 때문이다. 지치지 않고 여전히 밀물처럼 나를 덮치듯 사랑으로 다가오시기 때문이다. 점점 맡긴다는 구별된 의식이 엷어진다. 여기까지 이르기가 정말 쉽지 않다.

하지만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의 사랑에 압도당한다. 그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를 더듬어 헤아려갈수록 질문이 없어진다. 말이 준다. 모든 시작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내 몸이 알기 때문이다. 머리로 굳이 떠올려 분별하고 분석할 이유가 없다. 온 몸으로 밀물처럼 밀려오는 그 사랑, 자기 몸을 찢으면서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신비를 체득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을 진정 신뢰하기에, 모든 것을 믿고 맡길 수 있다. 하나님을 내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의 또다른 얼굴이다. 나를 위해 묻지 않는다. 내게 어떤 결정이 더 유익할까? 해서 묻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느 정도 하나님 안에 소멸되기 시작했다. 이 세상에서 더 가지고 더 누리고 싶은 생각이 많이 엷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서 내리신 결정이라면 어떤 모습 어떤 형태이든지 그냥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나 역시 주시는 대로 가리지 않고 신뢰하며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서로가 자신의 유익은 구하지 않는다. 고난과 축복이 구별될 수 없다. 하나님과 나 역시도 구별이 쉽지 않게 된다. 어느 순간에서든지 내 사랑은 그 분 안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 역시 아직도 한계와 피조성의 울타리에 갇힌 내 안에서 무한을 향해 활동하신다.

 

강성도 목사 / 하나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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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14-11-12 09:43:31
저라면 짬뽕을 먹겠습니다. 자장면은 제 아내가 맛있게 만들 줄 알거든요.

이해하기가 어려워서인지 글을 대충 읽었지만, 그런 것까지 하나님께 묻고싶지는 않네요. 뭘 먹든 감사하며 먹으면 그만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