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한계
사람으로 어찌 해 볼 수 없는 한계
  • 강성도
  • 승인 2015.01.31 22:4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맨 얼굴을 만나는 기회

받아들이지 못함이 죄나 교만이라고 판단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은 극단으로 몰릴 때가 있습니다.

종말론적 체험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사람으로 어찌 더 해볼 수 없는 한계 ......, 너무나 버겁지만,

어느 특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도 하기에는 너무나 보편적인 경험이기도 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손 끝을 넘어 선 자리입니다. 후회하거나, 회한의 기둥을 만지작거린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합니다. 한 번 헤집고 일어섰다고 해서, 종결되는 경험도 아닙니다. 사람으로 살아가는 한, 평생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심장과 뼈에 날카로운 창 끝을 박아놓은 것 같은 아픔을 가져다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아픔조차 느낄 수 없는 자리에 쳐하기도 합니다. 사람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자리, 그러나 사람이기에 안고 살아 가야만 하는 벽을 만납니다. 감성적인 아픔을 잠시 접으면, 신학적으로는 궁색한 한 가지 대답이 있습니다. 사실, 나의 한계를 본다는 것은, 은총입니다.

설령, 내 이익을 위해, 내가 쉽게 살려다가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하더라도, 하나님이 주신 은총의 기회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한계를 만날 수 있는 것은, 평생에 자주오지 않는 기회입니다.

나의 맨 얼굴을 만나는 기회입니다. 그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 내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며 하나님을 향해, 인간의 근본적 한계를 수용하는 믿음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나 스스로 넘어설 수 없는 자리에서, 나의 부족과 나의 약함을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되돌아볼수록 "쪽 팔리고", "뼈가 아프고" "내가 왜 그리 미련했던가?", “사사로운 것에 얽매여 살았던가?” 하는 모든 회한들이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해주는 방편이 됩니다.

 오늘, 내가 내린 결정을 통해, 내일 최고의 삶을 살 수 았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나의 한계와 이미 벌어진 일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입니다. 다시 한번, 제대로 살아가는 것이 부활이듯이.....,

다음에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덤벼보는 것뿐입니다.

실패했던 일을 꼭 다시 극복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과거의 일이 새롭게 맞이하는 오늘의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한계경험을 한 후에, 비슷한 일이 다시 주어진다면, 비슷한 정황에 다시 들어가게 된다면, 힘겹게 버티기보다는 미리 손들고 항복한 후, 하늘이 어떻게 도와주시는 지를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 주는 지혜일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머리로 가슴으로 이해한다손치더라도, 심장이 아리고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까지 받아들이고, 하늘을 향해 "원하시는 대로 하시고, 나로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도와달라" 고 기도해보는 것외에 길이 없습니다.

잔인하지만 이제 정리해 봅시다.

한계 경험은, 자신이 만든 허구의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뜻합니다. 좋은 가정, 믿음으로 살아가는 가정, 내가 낳은 내 사랑하는 아들 등등의 모든 규정이 허구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좋은 가정이라는 개념과 이상적 설정이 내가 그린 그림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것이 남들이, 부모가, 세상이 그려서, 내 속에 심어준 것임을, 나의 이상, 나의 꿈이라고 살아온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시에, 내가 "이상(ideal)"이라고 그린 그림 역시, 목숨과 바꿀 만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내 힘과 지혜로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포기/수용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내 남편을 위해, 내 아내를 위해, 내 아들과 딸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내가 단 한 번도 내 남편을, 내 아내를, 내 자식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들도 같은 부류입니다.

나 자신조차 진정으로 사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일종의 인간 한계가 빚어낸 "자폐"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자폐인 줄 모른 채.....,

자기만의 세계를 설정하고, 그 속에서 최고의 목표와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매진합니다. 어느 날 그 모든 것이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되는 부서짐의 아픔이 찾아옵니다.

 아무도 미리 알 수 없었던 벽을 만날 때, 진정 중요한 것은, 나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한계라는 것을 미처 몰랐다는 것뿐입니다.."그 전까지만 좋은 사람,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사람이 참 '좋다'는, '믿음이 있다'는, '우리는 이런 일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모든 규정이 "자기 기만"일 경우가 많습니다.

 

“얘들아 !  사기치지 마라!”


하나님께서 그 한계를 보여주신 것인지도 모릅니다. "얘들아! 사기치지 마라!"고 하시면서,

“넌 그렇지 않아! 짐을 지지마라!” 하시며  우리들이 설정한 최고의 선, 최고의 애, 최고의 진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보여주시기 위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믿으셨을지 모릅니다.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자신을 직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못 다한 것 때문에 회한이 남기보다는, 자기 한계와 허상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넋 놓고 울기를 그 분은 기다리셨는지도 모릅니다. 주님을 배신했던 베드로가 목놓아 울었던 것처럼 사막에 쫓겨난 하갈이 목놓아 울었던 것처럼 얼굴을 돌리거나, 달아나지 않고, 앉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하면서, "아! 하나님,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 하고 원망하거나, 스스로를 미워하고 자책하거나, 감당하지 못한 자신의 무능을 탓하지 말고, 앉아서 그저 우는 나를 기다리셨는지 모릅니다. 실컷 울고, 울 힘조차 사라지고, 그래서 달아나지 못하고, 처절하게 자신의 껍질을 바라보게 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리 하시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래, 이것이 내 모습이야!” 이제 울 힘조차 없어서, 소리를 질러 하나님께 덤빌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달아나서 숨거나 피하거나, 대체만족을 얻을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리는 것을 기다리셨는지도 모릅니다.묵시나 종말은 바로 그 순간 찾아옵니다. 그 순간 내 안에서 이미 계셨음을 보는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살아가는 삶으로의 초대는, 때로 이렇듯 처절할 수도 있습니다. 자아가 꺽어진다는 것이 그만큼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 자아라고 믿어왔던 나 자신이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허상을 스스로 깨부수기는 정말 힘듭니다.

내가 아니라 남이 내게 덧붙여주었던 나!

믿음 좋은 목사, 설교 잘하는 목사, 선교에 열정을 가진 목회자, 남 돕기를 진정 원하는 사랑으로 넘치는 주의 종! 이 모른 레이블이 다 벗겨지고도, - 때로 벌레처럼, 남들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며 비웃은 자리까지 쳐 박힌 뒤에도 -하나님 한 분으로 내 가슴이 벅찰 수 있다면, 그 분은 나를 단 한 순간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뼈에 새길 수 있다면, 아무 것도 가지지 않아도, 나 스스로를 내세울 것들을 이루지 못해도, 나를 치장할 것들을 가지지 않아도, 그냥 하루하루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런 감정이 개입되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담담히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에 족할 것입니다. 더 먹고, 더 가지고, 더 이룸으로부터 자연스러워지는.....,아! 해방이나 구원이란, 이토록 처절하고 힘겨운 것임이 너무 버겁습니다. 모두가 여기에 이르기 전에 달아나고, 꺽이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그러다가 타협하고, 적당한 형태의 신앙놀이를 하고 맙니다.

게다가 교회는, 피해갈 길까지 열어주니까, 이 땅에서 누리는 천국, 영생의 삶은 한없이 멀어져 갑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내 영혼이 족하고, 내 영혼의 중심에 예수님만 보이는 삶! 많은 사람들이 수근거리고 비웃 건만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머리카락으로,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주님만을 온 몸 온 마음으로 끌어안고서, 하늘과 땅이 이어지고, 시간과 공간이 멈추는 순간이었습니다.

아! 모든 기독교인들이 이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 한계 경험은, 주검이 없는 이를 위해 준비한 향유 옥합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싶어 깨뜨려버릴 수 있는 용기를 부어줍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허구를 깨뜨릴 수 있는 내면을 바라보게 합니다.  마지막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다 드리고 그 품에 안긴 삶! 내 힘으로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뼈와 살로 받아들이며 나를 안아주시는 주님의 품에서 눈물지을 수 있는 따사로움이 있는 삶! 하루 하루를 이렇게 진하게 살 수 있다면?

강성도 목사 / 미주 감리교 신학대학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