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은 축복, 부는 저주!?
가난은 축복, 부는 저주!?
  • 강만원
  • 승인 2015.02.09 05:5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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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만원ⓒ <뉴스 M>

성경적인 관점에서 가난은 축복이며 부는 저주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하면, “가난한 자라야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서 결국 ‘가난이 축복의 조건’이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난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있으며, 부자는 이유불문하고 구원을 잃을 수 밖에 없다는 뜻인가. 다시말해 세상의 가치관과 달리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가난이 축복이며 부는 저주라는 말인가. 성경을 제대로 읽었다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허튼 주장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부터 시작해서 신약 시대에 이르기까지 부가 하나님의 은혜일 수는 있어도 결코 저주의 상징이 아니다.

당대의 족장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은 모두 부자였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기록한다.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에게 예수는 “나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다”라며 ‘현재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지금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 않은가.

신약시대는 다른가? 세리장 삭개오는 당대의 부자다. 유대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여 로마에 바치는 세리는 자신이 징수한 세금에 비례해서 보수를 받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들을망정 세리장은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런 삭개오가 주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삭개오는 자신의 소유에서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고 약속했고, 예수께서는 즉각,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선언하셨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이라는데, 절반을 나눠주어도 부자는 여전히 부자이며 삭개오는 여전히 부자로 구원을 받았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세상에서 가난하기 때문에 세상의 탐욕과 쾌락에 연연하지 않고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자에게 구원이 있다는 뜻일 뿐, 가난 자체가 축복이라는 말이 아니다. 가난이 축복이라면 일하지 않는 자는 결국 축복받은 자가 아닌가. ‘게으름’은 기독교의 7대 중죄 가운데 하나로서, 돌이켜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코 구원을 얻을 수 없는 가증한 죄일 뿐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씀을 잘못 빗대서 부자를 마치 저주받은 자의 상징처럼 여기는 태도 역시 성경적인 관점이 아니며, 결코 하나님의 뜻일 수 없다. 남들보다 열심히 일해서 나름대로 부를 소유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능력이 있어서 재물을 모을 수 있었다면 ‘부의 소유’는 오히려 성실한 삶의 보상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남다른 능력을 부여받은 은혜의 증거일 수 있다.

하지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익히 보듯이 성경은 부자에 대해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무슨 이유일까? 성경속의 ‘부자’는 사실상 저주받을 만한 특별한 죄를 지은 것도 없었으며, 거지 나사로에게 따뜻한 온정을 베풀지 않았을망정 거칠게 쫓아내지도 않았지만 비유를 통해서 주께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히 부자는 지옥에 갔고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 들어갔다.

성경에 계시된 ‘부’의 진정한 의미와 부자에게 주어진 준엄한 사명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부자는 단지 부를 소유했다는 이유로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부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죄로 저주받은 것이다. 이를테면, 부자는 자신의 소유를 일신의 쾌락에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어야 한다는 것이 부에 관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며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다.

‘저주받은 부자’에 대해서 성경이 다른 죄를 명시하지 않고 다만,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즐기더라.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하는 한 거지가 버려진 채...”라고 기록한 사실에 주목하라. ‘부자’의 유일한 죄는 자신의 쾌락에 탐닉하면서 거지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던 죄로, 이를테면 ‘부의 독식과 그릇된 사용’이다.

요컨대 부자라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다. 저주받은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면, 부자이면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난한 형제들에게 자신의 소유를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재물의 본래 주인은 우주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엄밀히 말하면 재물의 소유자가 아니라 일시적으로 재물을 맡은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재물을 사용하는 자가 돼야 한다.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서 재물은 악하다고 단정짓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주께서 하신 말씀인데, 이 구절이 “악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뜻이라면 결국 친구를 사귀기 위해서 불의를 마다하지 말라는 의미가 된다. 이것이 주의 뜻일 수 있을까? 불의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악하다는 의미의 불의와 의롭지도 않으며 악하지도 않다는 의미에서 가치중립적인 불의가 있다. 재물은 그 자체로 악하거나 선한 것이 아니라 본래 가치중립이며, 선하게 사용할 때 비로소 선한 도구가 되며 악하게 사용할 때 악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재물을 바르게 사용하면 주의 계명을 지키는 의의 도구가 될 수 있으며, 부자가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용하는 순간, 그는 당당히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랑하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부자라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가난한 자라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뚜렷한 교훈이다. 당신이 부자라면 하나님의 축복을 함부로 입에 담아서도 안되지만, 헛되이 저주의 두려움을 가질 필요도 없다. 다만, 부의 바른 사용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라. 가난이 축복이며 부가 저주가 아닌 것처럼, 부가 축복이며 가난이 저주도 아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재물은 선악의 내재적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라 바른 사용과 그릇된 사용에 따라서 구원과 저주를 가르는 심판의 도구일 뿐이다.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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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두기 2015-02-09 22:48:49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이 가난한 자가 뭘 뜻하는지 더 명확히 보여줍니다. 성경 해석은 그냥 목사님들 설교를 듣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또 삭개오가 재산의 반만 나누어 주어서 여전히 부자로 구원을 받았다고 썼지만 사실 성경에는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했습니다. 그가 축적한 부가 세리로서 얻은 것이면 거의가 실제 세금을 부풀려서 착복한 것일 것이고 저는 그가 전 재산을 털어도 네 갑절을 갚을 수 있는지가 궁금했지 여전히 부자로 잘 살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2015-02-09 08:38:48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두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인간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재물을 사용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선생님은 정말 소유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사용하고 계시며 또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두 번째는 가난이 주는 영적 유익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가난에, 그것도 엄청난 가난에 처해야 알게 되는 삶의 지혜와 영적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가난의 자리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보아도 다만 어리석거나 미련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설명할 수 없고, 또 소용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의도와 관계없이 부에 고삐를 놓아줌으로써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신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욕망을 선한 것으로 주장하는 신자유주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10)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를 즐기되 겸허하게 자신의 한계를 늘 인식하며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영원한 경계가 선생님에게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