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나에서 들었던 1년 전 비보
사우나에서 들었던 1년 전 비보
  • 김정주
  • 승인 2015.04.14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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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신학으로 구타당했던 나

작년 4월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나는 사우나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었다. 당시 그곳에서 일을 하는 것도 상당히 현실감 없는 일이었는데,  세월호 사건을 보면서 현실로 여겨지지 않아 어지럽고 매스꺼웠다.

내가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되는 건가 ?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 과연 이러한 사건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 아니 분명 살아 계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영역이지만 그분은 선하시고 전능하시지 않은가 ?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지 ? 라는 생각이 나를 많이 괴롭혔다. 머리에서 마음까지 체한 듯 영혼은 계속 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민들 속에서 누가 손을 따듯 뻥하고 정리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문창극씨가 총리후보로 거론되면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과거의 발언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그 때 어떤 자매가 나에게 물었다..

ㅡ 전도사님은 문 후보자가 한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나는 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 자매는 말했다.

ㅡ 저는 그 사람이 진짜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였고, 실제로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굽히지 않고 말하는 것을 보니까 정말 믿음이 대단한 사람인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이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

어이가 없었다.

ㅡ 그럼 자매님이 하나님 앞에서 좀  막 나가고 막 생활을 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자매님의 부모님이 교통사고가 나서 두 분이 다 돌아가셨어요. 그럼 하나님이 자매님을 깨닫게 해주시려고 부모님의 생명을 앗아가신 거네요 ? 그리고 그 교통사고를 낸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거고요 ?

이렇게 묻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눌러서 삼켰다. 그리고 그 자매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이라는 생각해 볼 때에 마음이 답답하고 아팠다.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어떤 목사님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ㅡ 우리나라사람들의 죄악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너무나 수위를 지나쳤기 때문에 그들의 죄악으로 말미암아서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나게 하신 겁니다. 우리가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계속 죽을 것입니다.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목사님은 하나님을 무슨 심청전에 나오는 용왕처럼 생각하는 용왕신학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우리가 죄가 있으면 우리가 받아야지 왜 무고한 생명들이 그 깊고 넓은 바다에서 희생을 당하는가 ? 하나님은 무고한 생명들의 피에  기분이 좀 풀리시는 분이신가 ? 그리고 그런 어이 없는 소리에 아멘을 하는 사람들은 더 싫었다. 본인들의 자녀가 그런 일을 당해도 과연 그렇게 아멘 할 수 있냐고 진지하게 묻고 싶었다. 무지는 거의 악이라고 한 칼뱅의 말이 생각났다.

계속해서 토할 것 같은 나의 영혼의 손을 누가 따주기를 그렇게나 기다렸건만 바늘을 가진 사람을 만날수  없었다. 이렇게 된 거 스스로 따야겠다 라고 바늘을 구하려고 했지만 당시에 나는 책상에 앉아 있을 시간이 하루에 1,2시간도 허락되지 않기에 도저히 그 바늘을 구할 수가 없었다. 답답한 마음도 이젠 점점 적응이 되는지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리고 약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나는 이번 주일 1부 예배 설교를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참 기이한 일이었다. 철야나 새벽예배 설교는 종종 했지만 주일 1부 예배 설교는 지금까지 딱 한번 해봤다. 담임목사님께서 보통 맡기시는 일이 없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세워주셨다. 무엇을 설교해야 할지에 대해서 잠시 기도하는데 작년의 그 시간들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 시점에 있어서 세월호 사건에 대한 신정론에 관한 설교를 하는 것은 나에게 숙명과도 같이 다가왔다.

설교를 위애 박영식의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 와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 을 읽었다.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 은 400페이지가 넘는 신정론에 대한 신학적인 물음과 답변을 쓴 책이기에 조금 어렵고 복잡한 내용이었다면, <그 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 는 세월호 사건 이후에 저자가 받은 충격과 고뇌와 아픔 속에서 간결하면서도 정확하게 그리고 남의 이야기가 아닌 본인의 이야기를 타고 전달되기에 그 몰입도는 가히 영화 <위플래쉬>와 같았다.

마침내 일년 전에 만나고 싶었던 바늘을 그 책에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바늘로 머리와 가슴 사이에 막힌 그 혈점을 꾹 하고 찔렀을 때에 무척 아프기는 했지만, 정말 속이 시원하도록 뻥 뚫린  카타르시스를 만끽할수 있었다. 이러한 방대한 신정론에 대한 것을 어떻게 설교할까 낑낑되면서 발버둥 쳤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지만 케이팝 스타에서 이진아에게 어떤 심사 위원이 '치열하게 만들어서 쉽게 들려줘서 고맙습니다' 라고 한 말이 자주 생각났다. 분명히 내일 설교를 들을 사람들 중에서는 작년 이때쯤에 내가 체한 것처럼 아직까지 체한 상태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꼭 세월호 사건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 이라는 폭력아래에서 집단구타를 당해서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받고 살아가는 영혼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들에게 내가 경험한 바늘로 손을 따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드니까 치열하긴 했지만 기쁜, 깊은 밤이었다.

준비를 마치고 잠을 청했을 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그리 힘들지도 않았다. 설교하러 앞에 섰을 때에 1부 예배에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와있는 것을 느꼈다. 본문은 마태복음 27:46 이었다.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설교제목은 책 제목 그대로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 로 정했다.

작년에 내가 느꼈던 그 메스꺼움과 혼란, 그리고 답답함. 그러한 것들을 설교의 조미료로 잘 사용해서 함께 나누며 시작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 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신앙폭력에 대해서 반론을 제시했고, 전통적인 '예지와 예정' 에 대한 반론, 죄로 말미암은 인과응보로써의 고통에 대한 반론 ,그리고 사랑의 전능에서 주어진 자유의지의 축복, 그리고 만능이 아닌 전능, 그리고 전능의 하나님은 우리가 고통 받는 바로 그 지점에서 팔짱 끼고 바라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약함을 가진 전능으로 눈물 흘리시며 고통 받으시는 분이라고 설교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정의로움에 대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변호하실 필요는 없지만, 우리는 고통 속에서 그분에 치열하게 질문하고 솔직하게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까 가만히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라고 하나님께 절규한 것처럼 우리 또한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통과 악 앞에서 절규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 속에서 함께 우셨던 그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우리가 아직도 그러한 고통과 악 앞에서 절규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다가가고, 이 구조적인 사회악에 대해서 우리는 진리를 붙잡고 정의를 위해서 저항해야 한다고 설교했다. 세월호 사건이 있었던 그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나 ? 바로 그곳에 계셨다.

유창하게 잘 하지는 못했지만, 치열하게 준비해서 쉽게 들려주려고 애썼다. 몇몇 분들에게 좋은 피드백을 받기도 했지만 사실 가장 큰 은혜를 받았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20대 중반에 태어났을 때부터 나를 무척 사랑해주셨던 할머니가 갑자기 아프시고 돌아가시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나이가 많으시긴 했지만 그 2주간은 나에게 무척이나 큰 고통이었다. 할머니는 건강하셨는데 갑자기 아프시기 시작했고, 그 기간은 나에게 중요한 학교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아무것도 못하는 패닉 상태에 있는 나를 심히 괴롭혔던 것은 이러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 라는 전통적인 예지와 예정에서 온 생각이었고, 더 괴롭게 했던 것은 죄로 말미암은 인과응보에서 고통이 나온다는 신앙이었다.

지나치게 시달렸고 나는 마음속 깊이 하나님께 따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착한 마음에 꾹꾹 누르며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 내 죄를 보면서 회개해야지 라는 마음으로 그 시간을 견뎠다. 끝내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장례를 치를 때에 나는 상주였고, 그 기간은 정확히 시험기간과 겹쳤다. 교수님들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말했지만 그래도 시험을 봐야 된다고 하는 교수님들도 계셨고, 페이퍼 비슷하게 제출하라는 분들도 계셨다. 그래서 나는 장례식장에서 책을 펴고 들어오지도 않는 걸 보고, 써내려 갔다. 친척들 중 몇 명은 나에게 저새끼는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같다고 욕을 했다. 심지어 할머니를 화장하고 오는 길에 어떤 교수님은 그래도 시험을 보고 오라고 해서 나는 손에 그 할머니의 뼈의 온기가 사라지지도 않았는데 그대로 가서 시험을 봤다. 시험을 보고 나오는데 예수님을 믿고 나서 거의 처음으로 입 밖으로 조용하지만 선명하게 욕을 했다.

ㅡ X발 그지같네 ...

상주여서 충분히 슬퍼할 시간도, 기말고사라는 연결고리 때문에 정신은 많이 분열되었다.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정신병에 걸렸다. 마음이 사이코패스가 된 듯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기쁜 것도, 슬픈 것도 전혀 와 닿지 않았다. 당시를 생각하면 자살을 하거나, 칼로 손가락을 잘라도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았다. 병원에 갔는데 충분히 슬퍼하라고 했다. 이 일에 대해서 따지고 싶으면 따지고 화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화내라고 했다. 학교 교수님들 몇 명이 생각났지만 사실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하나님이 생각나긴 했지만 감히 어떻게 ? 라고 하면서 마음 속에 묻어놓았다.

점점  정신병자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가 않으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위로했다. 제일 싫은 소리였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데 문득 하나님이 미웠다. 그냥 마구 튀어나오는 대로 하나님께 기도했다. 왜 ? 당신이 뭔데 ?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 정말 선하고 전능한거 맞어 ? 말 좀 해보시지. 나는 정말 당신이 싫다. 꼴도 보기 싫고 나한테 이런 것을 허락하는 당신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욕을 섞어가면서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몇 시간을 그렇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시간들이 끝나자 조용히 하지만 꼭 하나님은 나를 안아주셨다.

언어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었지만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순간에 하나님은 나와 함께 우셨다. 아니 할머니의 일이 있었을 때나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고통 속에서 늘 함께 계시며 내가 울 때에 함께 우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달 동안 말라있던 눈물이 회복이 되었고 통곡을 했고, 주님도 함께 울었다. 회복이 있었다.

오늘 설교가 끝나고 내려오면서 그때 상당히 망가져있었지만 하나님의 뜻 이라는 감옥에 갇혀서 예정과 예지와 인과응보의 교리로 구타당해서 울지도 못하고 쭈그려 앉아있는 나를 보았다. 그때는 안아 줄 수 없었던 나를 꼭 안아주며 함께 울었다. 결국 모든 설교는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의 마음으로 그때의 나를 향한 선포에서 시작되어서 너를 향한 선포로 우리를 향한 선포로 마무리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같은 병을 앓고 계시는 모든 영혼들을 안아드리고 싶다. 이 글이 그러한 온기를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굿윌헌팅에서 나온 내가 좋아하는 대사로 글을 마무리 하고 싶다. 내가 하나님께 따지고 욕했던 그 날 밤에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주시면서 주셨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ㅡ It's not your fault (네 잘못이 아니야)

그렇다

It's not your fault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

안아주고 싶다 -

김정주,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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