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를 위한 안식년'은 없다!
'목사를 위한 안식년'은 없다!
  • 강만원
  • 승인 2015.08.17 11:49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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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은 성서 적용의 오류
   
▲ 강만원 © <뉴스 M / 미주 뉴스앤조이>

교회의 일탈과 목사들의 비리에 맞서 그리스도의 영성을 오롯이 회복하려는 개혁 운동의 불길이 서서히 타오르고 있다. ‘철옹성’ 같은 제도권 교회의 견고한 아성을 깨뜨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중세 가톨릭의 전적인 부패에 결연히 저항했던 역사적인 종교개혁이 소수의 ‘깨달은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오늘날 개신교, 특히 “기독교 역사 이래 가장 타락했다”는 한국교회의 불의에 맞선 개혁 형제들의 힘찬 저항 운동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러나 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다는 확신의 한 편에서 개혁의 방향이 바로 설정되었는지 따져보면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운 생각이 없지 않다. 개혁의 본질이 핵심을 벗어나서 지엽적인 제도 개혁에 치우치고 있다는 생각을 도무지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부자 목사들의 세습과 재정 비리, 전횡과 외식에 맞서 제도의 수정과 보완을 개혁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만, 개혁의 본질은 ‘인위적인 제도의 수정’이 아니라 교회를 타락시키고 목회자들을 비리의 수렁으로 내몬 ‘목사 성직주의’의 차별적 의식과 교회의 타락한 권력구조다.

물론 기존의 부당한 제도를 개혁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부정과 불의에 맞설 수 없지만, 제도는 속성상 그 자체로 불의를 해결하지 못한다. 제도가 본연의 기능을 발휘하기 전에 그 배경에 제도를 조종하는 ‘숨은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제도는 권력의 손아귀에 잡힌 종이라는 말이다.

"문제는 목사의 집중권 권력구조"

중세 가톨릭의 부패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상징은 ‘면죄부’였지만, 종교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면죄부’는 사실상 그 자체로 불의가 아니었다. 가톨릭이 말하는 ‘회개의 3단계’의 마지막에 ‘보속’이 있으며, 면죄부는 재물의 보상을 통해서 회개의 3단계를 마무리 짓는 보속의 구체적인 방법이었다. 그렇다면 회개의 결실인 보속으로서 면죄부 자체에 잘못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속을 빌미로 면죄부를 판매하며 부당한 이권을 장악했던 종교권력에 근본적인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면죄부’가 악할망정 제도인 면죄부를 없앤다고 해서 본질인 교황의 비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들의 숱한 비리들 가운데 교회의 공유를 사유재산으로 전락시킨 ‘목회 세습’이 있지만, 세습은 그 자체만으로 불의라고 단언할 수 없다. 예컨대, 주민이 별로 살지 않는 외딴 시골이나 척박한 오지에서, 또는 도시의 한 구석에서 미자립 교회로 힘겹게 목회하는 어떤 목사가 자녀에게 ‘세습’했을 때 과연 그것을 불의라고 싸잡아 비난할 수 있는가. 목회 세습을 비난하는 이유는 중대형교회 목사들이 세습을 통해서 부와 명예, 그리고 교회 권력을 제멋대로 소유하기 때문이며, 이는 교회의 모든 제도를 장악하고 있는 목사들의 권력이 그만큼 강하고. 그만큼 타락했기 때문이다.

교회가 온전히 제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교회의 일탈과 부자 목사들의 비리에 맞서 제도를 개선하기 전에 목사의 독점적인 권력구조 자체를 전면 타파해야 한다. 다시 말해, 죽은 나무를 헛되이 가지치기 하려 들지 말고 썩은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내야 한다는 말이다. 뿌리가 온통 썩었는데 애써 가지치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미 생명을 잃은 나무의 썩은 뿌리는 뿌리째 뽑아내고 살아있는 묘목을 새로 심어야 한다. 썩은 나무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권력이 그대로 있는 한 인위적인 ‘제도 개선’으로는 결코 죽은 교회를 살릴 수 없다.

제도는 언제든지 권력의 하수인으로 전락할 수 있다. 교단에서 애써 ‘세습 금지법’을 만든 들 대형교회의 세습이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엄연히 증거하고 있지 않은가. 세습이 사라지기는커녕 기발한 ‘신종 세습’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을 뿐이다.

목사에게 집중된 권력구조를 타파하지 않는다면 제도 개선은 줄곧 그랬듯이 형식적인 연례행사에 지나지 않는다. 타락한 종교 권력, 이를테면 ‘성직자’라는 허명으로 소수가 독점하는 교권을 근본적으로 철폐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절대로 개혁되지 않으며, 비리 목사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목사에게 집중된 권력구조를 없애려면 ‘제도 개선’이 아니라, 그 전에 목사 성직주의 자체를 근본적으로 철폐해야 한다. 목사가 ‘성속이원론’을 빌미 삼아 따라 우월한 지위를 일방적으로 장악한 상태에서 목사의 독재 권력은 사라지지 않으며, 목사들이 제멋대로 권력을 장악하는 한 교회는 결코 바로 설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절대 권력의 변함없는 속성이다. 중세가톨릭의 교황들이 절대 권력을 장악했고,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하기 때문에 마침내 ‘보속’을 악용해서 면죄부를 팔며 가증스런 죄악을 지질렀던 것처럼 말이다.

기도나 금식, 고행 또는 물질을 통한 보상을 요구하는 ‘보속’ 자체에 오류가 있어서 면죄부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네가 빚을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그 곳에서 나오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가 통용하는 이른바 정경正經의 말씀이다. 타 종교의 교리일망정 보속은 성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나름의 당위성을 지니고 있다. 보속이 잘못이 아니라 보속을 악용하는 권력자의 탐욕이 불의라는 말이다.

   
 

"안식년은 성서적 근거 없어"

목사들의 탐욕을 부추기는 목사 성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먼저 목사들이 차별적으로 누리고 있는 온갖 특혜를 폐지해야 한다. 소수가 향유하는 특혜가 타락한 권력을 부추기고, 타락한 권력이 교회를 타락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목사들이 전유하는 숱한 특혜가 있지만, 이 자리에서는 요즘 들어 자주 회자되는 ‘안식년’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한다. 우선, 간단한 질문을 통해 논지를 전개한다. 중대형교회 목사들의 전유물인 안식년은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이에 대한 나의 대답은 분명히 ‘없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구약성경을 통틀어 살펴봐도 사람을 위한 ‘안식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단위로 일하는 사람의 경우에 안식(휴식)을 위해서는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안식일’이 있을 뿐이다. 반면에 1년 단위로 경작하는 토지는 사람처럼 하루 단위로 산출하지 않기 때문에 토지의 보전을 위해서 6년 경작하고 1년 휴경하는 안식년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을 위한 안식년이 있다면 목사나 교수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고루 안식년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적인 가르침에 따른 ‘기본적인 공의’가 아닌가? 담임목사에게는 있고 부목사에게는 없으며 교수에게는 있되 교사에게는 없는 안식년이, 사람을 계급과 신분으로 차별하며 특혜와 특권을 독점하는 안식년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답은 자명하지 않은가.

요즘은 안식년뿐만 아니라 심지어 ‘안식월’까지 챙기는 목사들이 있다. 경기도 광주의 모 교회에서는 8월 한 달을 담임목사의 안식월로 정하고, 그 기간 동안에 ‘목사님과 가족들이 넉넉히 시용하시라’고 3000만원을 교회에서 지급했다고 한다. 그 교회뿐만 아니라 일부 교회들에서도 요즘 들어 매년 한 달 씩 ‘신종 안식월’을 통해 담임목사들이 때를 만난 듯이 해외여행을 즐기는가 하면, 체류 비용까지 교회가 모두 부담하고 있다.

외견상 “6년 일하고 1년 쉬는 대신에 1년 일하고 한 달 쉬겠다”는 것이기 때문에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조심스레 속내를 살피면 내용인즉 비루하기 이를 데 없다. 6년이 지난 다음에 1년을 안식년으로 보내지 않고 매년 한 달 씩 보내겠다는 이유가 무엇일까?

해당 목사들은 ‘목회의 연속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구차하기 이를 데 없는 변명일 뿐이다. 말과 달리 그들은 자신이 강단을 비우는 1년의 공백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 동안에 혹시 다른 사람이 강단을 장악할까 두렵고, 혹시 재정에 관한 문제나 기타 비리가 드러날까 걱정이 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설교자들에게 교인들이 은혜(?)를 받을까 두렵고, 자신의 기득권을 잃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안식년은 사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토지의 휴경을 위한 제도다. 안식년이 사람을 위한 제도가 아니라 땅을 위한 제도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사람이 소중한 것처럼 하나님이 지으신 천하 만물이 모두 소중하다는 것이다. 즉, 생명 존중 사상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 자연 전체로 널리 확산돼야 한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은 그 모두가 소중하기 때문이다.

물론 성경은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한 인간의 생명이 광대한 우주 만물보다 귀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천하 만물보다 귀하다는 말은 만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말하는 것일 뿐, 결코 인간 사이에서 차별적인 특혜를 의미하지 않는다.

생명과 인권 존중은 특정한 부류를 위한 배타적인 제도가 아니라 보편 가치가 돼야 한다. 요컨대 안식년을 통해서 천하 만물에 안식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경우에도 소수의 목사들이 독점하는 차별적인 특혜가 될 수 없다. 안식년이 성경적인 가치관에 부합하려면 모든 사람이 안식년을 누릴 수 있어야 하며, 고루 누려야 한다.

소수 특권 계층의 안식년(안식월)은 성경의 엄연한 왜곡이며, “제 배를 불리기 위한” 탐욕에 지나지 않는다. 안식년, 종교인 비과세, 목회 활동비 따위 부당한 특혜가 교회를 타락시키고 있지 않는지 곰곰 생각할 일이다.

 

 [안식년, 표준새번역]

1. 주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라. ○내가 너희에게 주기로 한 그 땅으로 너희가 들어가면, 나 주가 쉴 때에, 땅도 쉬게 하여야 한다.

3.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너희 밭에 씨를 뿌려라. 여섯 해 동안은 너희가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두어라.

4. 그러나 일곱째 해에는 나 주가 쉬므로, 땅도 반드시 쉬게 하여야 한다. 그 해에는, 밭에 씨를 뿌려도 안 되며, 포도원을 가꾸어도 안 된다.

5. 거둘 때에, 떨어져 저절로 자란 것들은 거두지 말아야 하며, 너희가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저절로 열린 포도도 따서는 안 된다. 이것이 땅의 안식년이다.

6. 땅을 이렇게 쉬게 해야만, 땅도 너희에게 먹을거리를 내어 줄 것이다. 너뿐만 아니라, 남종과 여종과 품꾼과 너와 함께 사는 나그네에게도, 먹을거리를 줄 것이다.

7. 또한 너의 가축도, 너의 땅에서 사는 짐승까지도, 땅에서 나는 모든 것을 먹이로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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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있는 반항 2015-08-21 02:09:59
늘 의문이었던 점이었습니다. 안식년/달 을 찾아 먹으며 하는 이유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썰 뿐이었고, 그것을 당연히 허락(?) 하는 당회는 도무지 뭐지..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마치 내가 이만큼 교회를 키워 놓았으니 난 이제 몇달을 쉬겠다 말하면.. 다 들.. '네 그러세요'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아니 그러면 이거 뭐지? 이렇게 괜찮은 비지니스가 있나? 그래서 안달을 하고 그 자식들에게 같은 길을 강요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밖엔 들지 않죠. 당연히 그렇게 하는 '담임' 목사들도 원망이 가지만 너무나 당연히 받아드리는지 아님 강요해서 어쩔수 없이 허락 할 수 밖엔 없게 쇄뇌가 된 당회/직분지/교인들이 원말 스럽네요. 아무런생각이 없는지도.



이렇게 쌈빡하게 정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추 !!

문제의 핵심 2015-08-18 07:27:07
좋은 글감사합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보다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본질은 순종입니다. 복음에 따라 사랑에 투신하는 것, 그것만이 영원히 개혁의 대상인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입니다. 서로 사랑하기에 아무도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는 성령공동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용서와 화해 그리고 평화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미워하는 마음, 옳게 바꾸려는 마음, 그래서 뒤집고 싶은 마음으로는 그 순종을 이뤄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 그 길이라고 믿습니다. 좋은 열매가 맺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