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이유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패배한 이유
  • 최용준
  • 승인 2009.09.30 14: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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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벨기에는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끼여 있기 때문에 각종 큰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중 19세기에 가장 유명한 전쟁은 워털루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1815년 6월 18일,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웰링턴, 블뤼허가 이끄는 영국·네델란드 및 프로이센 연합군에 패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나폴레옹 최후의 전쟁이며 여기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2번째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생을 마감합니다. 이 전쟁 이후 영어에는 이런 관용구가 생겼다고 합니다. 'He has faced his own waterloo.' 즉 '그는 최후를 맞았다'는 뜻입니다. 워털루가 벨기에에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시는 분이 많은데 브뤼셀에서 남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곳에 있으며 그 동네 이름이 워털루입니다.

나폴레옹은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한 후, 폐위되어 엘바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빈회의에서 전후 처리 문제로 연합군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엘바섬을 탈출해 7,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다시 파리에 입성합니다.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고 동맹국에게 공존을 주장했으나 나폴레옹의 복귀 소식은 유럽을 다시금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고, 나아가 프랑스 제국의 해체로 인해 생기는 영토와 이득을 욕심낸 연합국은 일치단결하여 프랑스를 향해 진격해왔습니다.

당시 프랑스 군대 병력은 7만 2,000명에 250개의 대포를 보유한 백전노장의 군인들이었던 반면 웰링턴 장군의 연합군은6만 8,000명, 블뤼허 장군의 프로이센군은 4만 5,000명으로 전체 11만 3,000명의 병력에 150개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연합군을 과소평가하여 단숨에 해치울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전체 병력 수는 연합군에 크게 뒤지지만 각각 나눠 싸우면 승산이 있어 나폴레옹은 신속한 각개격파 작전으로 승리한다는 전략을 세웁니다.

우선 나폴레옹은 네이 원수에게 2만 4,000명을 맡겨 웰링턴군과 카트르 브라에서 전투를 벌이게 하고 자신은 리니에서 프로이센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합니다. 웰링턴은 블뤼허가 후퇴했기 때문에 자신의 군대도 일단 후퇴시켰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이 완전히 후퇴한 것으로 착각하여 다음날 아침 그루시 원수에게 3만 명의 별동대로 프로이센군을 추격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것은 나폴레옹이 패전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그루시는 결단력이 부족해 추격을 계속했으나, 그들을 붙잡지 못했습니다.

웰링턴군은 몽-셀-장에 구축한 방어 진지에 도착한 후 수비를 굳건히 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웰링턴군 정면에 포진하여 보병 사단을 전면에, 기병 여단을 그 후방 양익에 그리고 중앙 후방에는 근위군을 결전용 예비 병력으로 배치했습니다. 웰링턴은 보병대를 전면에 전개하고 중앙 후방에 기병 사단을 집중 배치하여 프로이센군이 도착할 때까지 방어를 우선하게 포진했습니다.

전날 밤 호우로 인해 땅이 진흙탕으로 변해버려 대포의 이동이 늦어져 나폴레옹은 공격 개시 시간을 아침에서 11시로 늦추게 되는데 이것 또한 프랑스군 패배의 또 다른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나아가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군을 추격하기 위해 보냈던 그루시 원수를 불러 들이기 위해 전령을 보낼 것을 지시했으나, 명령을 받은 장군은 겨우 1명만 보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맙니다. 정오가 지나면서 프로이센군이 멀리 보이는 지점까지 도달했고 프로이센군이 도착하기 전에 결판을 지어야 하는 나폴레옹이 포격을 재개하자, 웰링턴은 전선을 다시 후퇴시킵니다. 18시에 프로이센군이 도착해 무너진 좌익을 보강하자 웰링턴은 보병을 4열 횡대로 산개시켰습니다.

나폴레옹의 근위군 기병의 호위를 받으며 전진했지만 영국 근위 사단이 일제 사격을 퍼붓자 프랑스 근위병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자 웰링턴은 영국 기병대를 내보냈고 프로이센군도 우익에서 돌격하자 프랑스군은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때까지 투입되지 않았던 친위대 일부가 나폴레옹의 퇴각을 엄호했으며 그 희생으로 나폴레옹은 전장을 이탈했고, 프랑스군은 패주하고 만 것입니다. 결국 연합군은 승리하였고 나폴레옹은 항복한 후 세인트헬레나섬에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후 1820년 네덜란드의 왕이었던 윌리엄 1세는 이 전투지, 특히 그의 아들이 부상당한 곳으로 알려진 곳에 기념물을 건축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사자의 언덕으로 알려진 이곳을 건설하기 위해 30만 평방미터의 흙이 사용되었으며 그 위에는 당시에 사용된 무기를 녹여 사자상을 만들어 올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그 곳을 불어로 Butte de Lion(사자의 언덕)이라고 합니다.

이 워털루 전쟁은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먼저 나폴레옹의 자만은 결국 패망의 선봉이 되었다는 성경적 진리입니다.(잠 16:18) 그리고 아무리 병력과 장비가 좋아도 비가 오는 바람에 패배한 것은 결국 전쟁은 주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삼상 17:47) 마지막으로 지금 워털루의 언덕에 있는 사자는 궁극적으로 유다 지파의 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계 5:5)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주시는 만왕의 왕이심을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최용준 목사 / 벨기에 브뤼셀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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