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섬의 노란단풍
돌섬의 노란단풍
  • 이계선
  • 승인 2015.11.23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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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계선 목사 ⓒ <뉴스 M>

“베어마운틴의 단풍이 얼머스트 천국입니다. 붉게 물든 단풍길을 달려 산에 오르는 운전 자체가 천국의 드라이브이지요. 자녀들이 운전하게 하고 사모님과 함께 오세요. 우리부부가 연구개발한 일식요리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뉴욕 베어마운틴 숲속에 사는 남자 로빈의 목소리다.

“목사님, 빨간 단풍가지 아래로 파란물결이 굴러가는 개울옆 저희집으로 오세요. 백포도주에 빨간 단풍잎을 띄워 님에게 드리겠습니다.”

뉴저지의 미녀 제니퍼가 유혹한다. 스위스에 사는 알프스의 소녀 명숙낭자는 몽블랑의 단풍사진을 보내왔다. 달려가고 싶다. 단풍보다도 더 붉은 마음들과 어울려 만산만야를 헤매고 싶다.

단풍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뉴욕업스테이트 키스코마운틴으로 단풍여행을 떠나곤 했다. 그곳에 팬클럽회장 장석열박사의 폴링산장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더했다. 단풍을 찾아 내장산 덕유산 지리산 한라산을 올라갔다. 설악산에는 아예 명성콘도를 사놓고 단풍숙박을 즐겼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꼼짝을 안한다. 파킨슨씨 병 때문이다.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버리고 졸음이 찾아오는 이병은 먼길을 귀찮아한다. 발병이후 워싱턴 브릿지를 건넌 적이 없다. 후러싱이 고작이다. 그러니 단풍초청을 모른체 할수밖에.

그러나 그것 말고 진짜 이유가 있다. 나는 파킨슨병 말고 또 다른 병을 앓고 있기때문이다. 파킨슨병 때문에 생긴 합병증이다. 이름하여 행복증후군(幸福症候群)이다. 파킨슨을 받아드리고 나니 병이 내 몸의 일부가 되어 무섭지 않다. 대신 심포니 지휘자처럼 감성이 섬세하고 예민해졌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이 아름답다. 순간이 영원처럼 즐겁다. 병적일 정도로 심하다. 행복에 이르는 병이니 행복증후군(幸福症候群)이라 부른다.

매일 조각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바닷가를 걷는다. 돌섬길이 고향길처럼 정겹다.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그리움이 밀려온다. 그리움속에서 지난세월을 만난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가 아름답다. 지나온 75년이 이렇게 행복했었구나!

다람쥐가 채 바퀴만 돌아도 우주를 도는데 구태여 바위산 나무숲을 오르내릴 필요가 있을까? 좌경천리(坐境千里)가 이런 걸까? 득도한 고승이 부럽지 않다. 단풍보자고 생고생해가면서 먼산을 찾아갈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새벽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본다. 어둠속으로 부슬비가 내리고 있다. 괜히 슬프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면/ 두고온 내 고향이 그리워져/ 눈물을 감추며 돌아서듯/ 순이는 지금은 무얼하나/ 만나면 이별이지만/ 이별은 서러워/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

조영남이 부른 “물래방아 인생”을 흥얼거리다 보니 여명이 밝아온다. 그 새에 부슬비가 안개비로 바뀌어졌다. 안개속에 잠들어 있다가 깨어나는 새벽정경이 아름답다. 아파트창문 아래로 잔디가 파랗게 깔려있는 미니파크. 밤새워 파크를 지키느라 병정처럼 서있는 나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소나무 참나무 전나무 단풍나무. 그런데 단풍나무잎이 노랗다. 몸둥이는 안개속에 감추고 노란 단풍잎만 살며시 들어내 보이는 단풍이 아름답다. 어느 미녀의 누드그림이 이처럼 아름다울까?

“여보, 일어나 봐요. 아파트 공원에서 노란단풍들이 안개속에서 퍼포먼스를 하고 있어요. 비오는 날의 수채화보다 더 아름다운 안개속의 수채화야. 언제 저렇게 아름다운노란단풍이 있었지?”

혼자 보기가 아까워 아내를 흔들어 깨웠다. 밤잠을 설치는 아내는 새벽이 다 돼야 겨우 잠이 드는 우리집 공주님이다.

“아유, 깜짝이야? 난 당신에게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 났는줄 알고 꿈을 꾸다말고 놀라서 일어났어요. 내가 중전마마가 되어 무능도원을 즐기는 꿈이었는데...해마다 피는 노란단풍인데 당신은 오늘 처음 보는 것처럼 야단이군요”

남편을 꾸짓고는 꿈속을 찾아 이불속으로 들어간다. 난 옷을 주섬주섬 주워입고 새벽 단풍관광을 나선다. 480세대가 사는 시영아파트는 4개동으로 돼있다. 아파트 둘래는 조경예술이 아름다운 미니공원이다. 공원을 돌면서 노란 단풍나무들이 병풍처럼 서있다. 바다가 있는 섬이라서 돌섬엔 안개가 자주 낀다. 안개속에서 피어오르는 새벽단풍은 그림이다. 아침햇살을 맞으면 노란단풍은 황금빛 잎새로 바뀐다. 나무마다 황금이 주렁주렁 매달린 에덴동산처럼. 난 갑자기 에덴의 남자가 된 기분이다. 이상하다. 지내해만 해도 노란단풍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붉은 단풍뿐이었다. 빨강은 정열이요 사랑이다. 빨간 단풍이 산야를 붉게 태워버린 겨울산은 검은 나목으로 남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미녀의 벗은 몸처럼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래서 나체(裸體)요 나목(裸木)이다. 노산은 불타는 단풍을 보고 이렇게 “사랑“을 노래했다.

 

“탈대로 다 타시오/ 타다 말진 부디 마오/ 타고 다시 타서/ 재 될 법은 하거니와

타다가/ 남은 동강은/ 쓰올 곳이 없소이다// 반 타고 거질진대/ 아예 타지 말으시오

차라리 아니 타고/ 생으로 있으시오/ 탈진대/ 재 그것조차/ 마저 탐이 옳소이다“

 

인생 황혼이 되니 빨간색이 노랑으로 바뀌나보다. 황혼(黃昏)의 황(黃)자가 누루황(노란)이 아니던가? 노란색은 그리움이요 추억이요 우정이다. 관조요 명상이다. 늙으면 남녀관계도 우정으로, 부부관계도 어린시절의 소꿉친구로 바뀐다. 얼마나 좋은가?

젊은이들처럼 불태우러 들지 말라. 빨간 립스틱을 칠하고 머리염색을 하고 젊은 연인을 찾지 말라. 늙어 불장난은 애들 불장난 보다도 더 위험하다.

돌섬엔 붉은 단풍이 없다. 어딜 가나 노란단풍 뿐이다. 난 노란단풍이 좋다. 젊은 여인 제니퍼는 빨간 단풍이 이글거리는 뉴저지로 오라고 하지만 난 안갈 셈이다.

“제니퍼, 돌섬의 노란단풍이 더 아름다워요. 추수감사절에 딸과 함께 돌섬으로 놀러와요. 단풍은 다졌겠지만 선물이 있어요. 내가 제니퍼에게 줄 노오란 단풍잎 하나 를 따 놨으니까....”   

등촌, 이계선 목사 / 제1회 광양 신인문학상 소설 등단 "대형교회가 망해야 한국교회가 산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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