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비밀
교회의 비밀
  • 송강호
  • 승인 2009.12.23 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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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갈등과 반목, 분당과 파벌에서 벗어나려면

교회에는 비밀들이 있다.

처음 교회를 나갔을 때 낯설게 들린 말은 바로 '주님'이라는 호칭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서나 "주님, 주님" 하는 말이 입에 배어 있었다. 기도할 때뿐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내가 평생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이 낯선 호칭을 시도 때도 없이 불렀다. 심지어 버스에서 졸다가 성경을 떨어뜨려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주여"라고 했다. 나는 이때마다 '도대체 주님이라는 분은 어디에 계신단 말인가' 의문을 품고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부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을 뿐, 진정으로 주님을 모시는 종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교회에서 알게 된 첫째 비밀이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은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면, 적어도 우리는 더 이상 임의대로 살아가는 자유인의 신분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기로 한 것이다. 교인들이 전도할 때 이 중대한 사실을 왜 알려 주지 않는 것인지 모르겠다. 마치 보험 계약을 하면서 약관을 숨긴 채 계약을 맺는 것과 같다. 일반 사회에서조차도 이런 사기성 다분한 계약은 무효다. 처음부터 이를 모른 채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고 교회에서는 종 된 삶에 대해 진지하게 가르치지 않기에, 교회 공동체는 심각한 갈등과 반목, 분당과 파벌을 만들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실정이다.

내가 섬기는 '개척자들 공동체'도 예외가 아니다. 자신이 종의 신분임을 충분히 각인하지 못했고 준비되지 않은 채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만든다고 달려들어 갈등과 고통을 겪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또 그리스도의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해 반드시 미리 준비해야만 했을 마음의 준비를 소홀히 한 대가를 뒤늦게 치렀던 것이다. 그 대가는 바로 우리가 종이라는 각오다.

순종과 겸손

우리 시대에 하나님께 순종하는 척하는 그리스도인은 많지만 진정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기 어렵고, 겸손한 척하는 목회자들은 많지만 진정으로 겸손한 목회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 하나님의 종을 자처하는 부흥사들의 만행과 횡포 때문에 종이 포악한 상전을 뜻하는 것으로 의미가 도치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다. 전도된 가치 앞에서 순종은 몰상식한 권위에 맹종하는 것으로 뒤틀려져 버리고, 교회는 주의 종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맹종하는 맹신자와 광신자들이 되든지, 아니면 반대로 앞에서는 순종하는 척하지만 뒤로 돌아서는 비웃는 냉소주의자가 되어 버리는 현실이다.

맹종하는 사람은 그 추종자를 본받아 타인들이나 타 종교인들에게 매우 오만불손한 데 비해, 순종하는 사람은 주인뿐 아니라 타자들에 대해서도 겸손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면 하나님께도 순종할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해서도 종으로서의 예의와 품격을 갖추어 서로를 대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이런 진실한 순종과 섬김을 찾아보기 심히 어렵다. 종처럼 조용히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입장을 주목하고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을 끝까지 관철하기 위해 고집 부리는 모습이 더 익숙하다.

자신이 한 선행을 남들 앞에서 무의식적으로 자랑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고, 이를 남들이 알아주지 않을 경우 분통을 터뜨리거나 가슴앓이하는 모습을 보아 왔다.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다고 교회가 마치 자기 사기업인 양 교회 일을 자기 방식대로 하려고 고집하는 장로님들이나 교회의 성도들을 자기 양이라고 착각하는 목사들, 교회에 헌물을 기증하고 인정과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집사들 때문에 교회는 시끄럽다. 공동체 안에서도 자기의 의에 사로잡혀서 남들의 죄와 잘못만을 탓할 뿐, 자신의 실수와 허물은 전혀 돌아보지 못할 때 갈등의 골은 더 깊어진다.

종들의 공동체는 모든 갈등과 반목, 불신과 분쟁 심지어는 우리 안에서 빚어진 질병과 고통까지도 모두가 내 탓임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그리고 서로에 대해 용서를 구하는 공동체다. 무엇보다도 어른들과 선배들이 더 나이 어린 사람들과 후배들 앞에 엎드려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배워야 한다. 공동체가 건강하게 지속하기 위해서는 어른과 선배들이 철저히 자신의 특권을 버리고 희생과 손해를 먼저 감수해야 하며 후배들에게 더 경청하고 겸손해져야 한다. 종은 모든 기대를 포기한 사람이다. 정당한 대우도 바라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이렇게 묘사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눅 17:7~10)

나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이런 종의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살아 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화의 기술이나 바른 의사소통을 위한 모든 노력도 종의 정신이 기초가 되지 않는 이상, 수면 위를 맴돌 뿐 물밑의 갈등과 분쟁의 근본 원인은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종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주인의 뜻을 수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우리는 늘 꾸물거리거나 늦게 응답하고, 귀찮거나 힘들거나 손해가 될 경우에는 때때로 말을 듣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도 사람에게 심부름을 시켜서 기꺼이 하려 들지 않으면 더 이상 일을 시키려 들지 않듯이, 하나님도 이제는 당신의 말을 잘 안 듣는 종에게 더 이상 심부름을 시키거나 일을 맡기려 들지 않으시는 줄을 알고 있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어도 20년, 30년 동안 하나님이 무슨 뜻을 갖고 있는지, 소명이 무엇인지 도통 알지도 못하고 알 수도 없으리라는 자포자기에 빠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소유와 단순한 삶

종은 스스로 자유와 함께 소유권을 포기한 사람이다. 물을 포도주가 되게 하거나 죽은 사람을 살릴 능력은 없다. 그러나 내 땅이나 재산에 대한 소유권을 다른 형제자매들과 나누어 함께 사용할 수는 있다.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에게 기적을 구하기 위해 시간과 정열을 바쳐 기도하기보다, 이미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함께 나누기 시작하라고 일러 주고 싶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실천이다.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포기하고 주님의 손에 드렸을 때, 5,000명이 먹을 수 있는 양식으로 늘어났다. 기적은 우리의 손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손에서 벌어졌다.

쇼처럼 화려하게 치장된 강단에서 박사 학위 가운 같은 현란한 옷을 입고 설교하는 소위 하나님의 종들을 보노라면 왕에게 환호하는 시민들의 환호 소리가 자기를 칭송하는 줄로 착각하고 우쭐하는 이솝우화를 떠올리게 된다. 실로 교회의 수다한 성직자들, 특별히 기적과 신유의 은사를 받은 주의 종들 중에 이렇게 우쭐대는 말이 많다. 이들이 바로 이미 자기 상급을 다 받은 사람들이요,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심판 날에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다 물러가라"고 책망받을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무소유 공동체의 외관상의 특징은 단순한 삶이다. 값비싼 가구나 의복이나 승용차는 종들의 삶에 어울리는 것들이 아니다. 계절마다 갈아입을 몇 벌의 옷을 담을 작은 가구 하나, 저렴하고 소박한 의복들, 석유 소비를 부끄러워하듯이 기름을 절약하는 경차들이 종들의 단순한 삶에 더 적합한 것들일 것이다. 이런 재미없는 삶이 어디 있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들은 인생의 재미를 돈 쓰는 데서 찾지 않고, 돈과 에너지를 소비하지 않으면서 인생의 맛과 멋을 찾아내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은 종일 부서져 내리는 빛의 폭포를 감상할 줄 알고, 맑고 깨끗한 시냇물과 대화하며, 지는 벚꽃이 눈처럼 내리는 길을 거니는 사람이다. 탐심을 버리고 단순한 삶을 살아갈 때 풀과 나무들, 산과 바위들이 당신들이 되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이런 변화들이 미술과 음악을 값없이 즐기는 새로운 재미있는 삶을 선물로 준다.

무소유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필수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자본주의가 압도하는 세상 속에서 자기들의 소유를 서로 나누고 함께 이용하여 가난하고 궁핍한 형제자매들이 없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무소유 공동체들이 점차 늘어난다면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역할을 드러내는 것이리라. 한국 포천의 사랑방교회나 수유리의 아름다운마을공동체처럼 교회들이 그 안에 한두 개 이상의 소규모 무소유 공동체를 육성한다면, 대안적 사회를 지향하는 공동체들이 많이 생겨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임과 면책

종들에게는 그들만의 특권이 있다. 그들은 주인 이외의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며 그들의 모든 행위는 주인이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종들은 아무런 염려나 근심이 필요 없다. 주어진 일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주의 일을 남의 일 하듯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의 일이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주의 일을 자기 일인 양 염려하고 근심하며 끙끙대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주님의 일이니 주께서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그분에게 의지하고 그분에게 기도하며 마침내 그분이 성취하시도록 참고 기다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 일의 결과도 결코 나의 공이 아니기에 나를 위한 논공행상(論功行賞)은 당치 않다.

자기의 의를 드러내거나 공을 인정받으려는 종들은 주인의 것과 자기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 우리는 도우미일 뿐이다. 더 여유롭고 편한 마음으로 주님에게 의지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하나님의 소원으로 미화하기도 하고, 탐욕을 하나님의 열망으로 치장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핑계 삼아 자기의 욕심을 채우는 것이다. 이런 열심이 우리를 소진시키고 낙심하게 하며 분노하게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나의 일이 아닌 그분의 일로 여기고 한다면 우리는 책임감에 짓눌릴 필요도 없고 필요한 재정이나 비용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이고 모든 결과도 결국 하나님이 책임지실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면서 그분의 일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돕는 것이다. 이 일이 그분의 일이기 때문에 기도하면서 능력을 의지하게 된다.

내가 공동체를 섬기면서 늘 마음에 품고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하는 백지수표가 있다.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라"(마7:7)는 말씀이 그것이다. 이보다 더 안심을 주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종들은 주님의 능력에 의지해서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리는 자다. 버릴 것들과 가지고 살아야 할 것들을 잘 분간하자. 돈도 명예도 권세도 고집도 독선도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도 다 버리자. 대신 종의 정신과 자세, 주인에 대한 확실하고도 완전한 신뢰로 우리 안을 채우자.

우리가 종으로 돌아올 때, 그리스도 공동체는 갈등을 그치고 낙담과 절망에 빠지거나 짓눌림과 탈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님의 이름을 헛되이 불러 왔다. 종이 없는 주님이란 허상이다. 그런 허울에 가려진 채 주님을 믿어 왔다. 우리가 진정으로 종이 되지 못하면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없다. 주님은 종이 있을 때만 존재할 수 있는 반대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제 진정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모시자. 그리고 종의 자리로 기꺼이 내려가자. 이 길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앞서 먼저 가신 길이었고, 교회와 공동체를 살리고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다. 이 생명의 길을 찾는 사람은 극히 적다. 그 길이 좁기 때문이다.

송강호 / 한국 개척자들 부설 코메니우스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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