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이라는 이데올로기
종말론이라는 이데올로기
  • 지성수
  • 승인 2016.09.17 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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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보다 강한 이데올로기는 없다. 해방 이후 혼란기에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소작농, 머슴들이 지주를 폭행하고 내쫓고 심지어는 살해를 하는 무질서한 시기가 잠시 있었다. 오랫동안 착취와 수탈을 당했던 그들의 현실 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없었던 탓이다.

기독교의 종말론도 현실로 느껴질 때처럼 강력한 이데올로기가 되는 법이 없다. 한창 다미 선교회가 기승를 부릴 때 호주에서도 몇몇 사람이 생업을 팽개치고 종말 선포에 나섰는데 이들의 방법이 기가 막혔다. 영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호주 전역을 하루에 수백 km씩 달려서 오지의 조그만 마을에 있는 집들의 우체통에 전도지를 넣는 방법을 썼다. 호주 백인들도 평생에 한 번도 가 볼 일이 없는 오지를 단순히 전도지를 돌리기 위해서 돌아 다닌 것이다.

92년 10월 예수 재림과 종말을 설파하던 다미선교회 포교 모습.

서울 강변도로를 달리다 보면 건물이 큰 교회가 보인다. 내가 아는 허파에 바람이 든 장로교 목사가 능력보다 크게 건축을 하다가 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 팔았고 공교롭게도 역시 허파에 바람이 든 내가 아는 감리교 목사가 그 건물을 샀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장로교 목사는 인간적으로 허파에 바람이 들었고 감리교 목사는 신학적으로 바람이 들었다는 것이다.

장로교 목사는 교회 성장주의에 사로 잡혀 무리하게 교회를 크게 지었고 감리교 목사는 종말론에 몰입해서 목회를 한다. 나는 감리교 목사가 자기 목회를 특화 시키기 위해서 종말론을 활용하는 것인지 정말로 곧 다가올 종말을 준비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다.

다만 나는 종말론이 현실에서 이데올로기화 하는 것을 염려할 뿐이다. 하나 뿐인 지구를 살리기 위한 환경운동이 이데올로기 되었다면 다행이련만 예수를 기다리는 종말론을 이데올로기로 삼고 있다면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촌에서는 하루도 어김 없이 언제나 지구촌 곳곳의 고통이 화면에 펼쳐진다. 도대체 이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일까?

기독교 전통에서 메시아주의는 미래의 어느 막연한 시점에서 현실의 절망적 공간 안으로 들어오는 한 슈퍼스타를 기다리는 열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메시야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 마치 정감록의 정도령 사상 마냥 인간이 열심히 믿고 잘 하고 있어야 오는 것이다. 즉 인간들이 하는 것을 보아서 오는 것이다.

그러니 끊임없이 “이 땅의 민중들이여, 조금만 더 참고 견디라! 이제 곧 그 분이 오신다!” 라고 주술을 걸어야 한다. 즉 개신교의 메시아주의는 역사적 종말과 인간의 믿음 사이에 일정한 함수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나이 들면서 그런 메시야주의에는 점점 회의적이 되어 지금은 “유대교로 개종해야 할까” 심각하게 고려하게 되었다.

그것은 유대교의 메시야주의 때문이고 나에게 그런 눈을 뜨게 해준 인물로서 발터 벤야민이라는 인물이 있다. 발터 벤야민은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 독일계 유대인으로서 파국의 역사를 온몸으로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서구 세계의 변증법적 시간관은 한 마디로 말해서 ‘살다 보면 좋은 날이 오는 법이여…’다. 즉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역사관이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기대의 지평 속에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벤야민은 파국을 향하여 치닫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그게 그럴까?” 하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게 되었다.

유대교 메시아주의에는 세상의 법칙과 하늘의 법칙, 세속적 질서와 신적 질서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 구원이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적 원리도 아니고, 인간 주체의 변혁을 향한 의지와 노력과도 하등의 관련이 없다는 말이다. 유대교 사상에는 구원을 위한 인간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유대교에서 구원은 전적 초월의 사건이 되는 셈이다.

기독교에서 종말에 대하여 특별히 예민한 종파들 중에 대표적으로 제칠일예수재림교회가 있다. 흔히 안식일 교회라고 하는 그들은 늘 종말에 징조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좋은 것만 먹고 살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들의 관심은 종말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흔히 종말론에 매몰되어 있는 다른 교파와는 달리 좋은 점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마치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유엔 제재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북의 경제가 혼란에 빠지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김정은의 등장으로 내부 불만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군도 이탈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조금만 더 기다리면…" "조금만 더 조이면…" 북한이 조만간 망할 것이라는, 망해야 한다는 믿음에 사로 잡힌 보수 우익들 처럼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다.

‘실현되지 않을 종말론’이라는 것이 있다. 즉 종말론은 실제 이루어질 사건이라기 보다 인류에게 경고로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사실은 종교인들이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시작이 있었으니 언젠가는 끝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너무 종말에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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