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이 구한 '복', 하나님이 주신 '복'
야곱이 구한 '복', 하나님이 주신 '복'
  • 곽건용
  • 승인 2010.01.05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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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설교] 곽건용 목사, 브니엘의 아침 해

한국의 <교수신문>은 매년 그 해의 사자성어를 뽑는데 2009년의 사자성어로 ‘방기곡경’(旁岐曲逕)을 선정했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큰길이 아닌 샛길과 굽은 길'을 가리키는 말인데 2009년 한국 사회가 바른길을 좇아 순탄하게 일을 처리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이루려는 모습을 많이 보였으므로 이 말을 2009년의 사자성어로 선정했다고 합니다.

매년 <교수신문>이 뽑은 사자성어를 보면 지식인들이라 그런지 보통사람들이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어려운 말을 뽑더군요. 뜻을 알고 보면 공감이 가지만 도대체 '방기곡경'이란 말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고 실제로 사용하는 사람이 얼마나 된다고 이 말을 선정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방기곡경'(旁岐曲逕), '설상가상'(雪上加霜)

이보다는 인터넷 누리꾼들이 뽑은 2009년의 사자성어가 피부에 더 와 닿습니다. 누리꾼들은 '설상가상(雪上加霜)'을 2009년을 대표하는 사자성어로 가장 많이 꼽았고 '우이독경(牛耳讀經)', '안하무인(眼下無人)', '첩첩산중(疊疊山中)' 등이 그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인권 상황이 악화됐으며 서민 경제가 파탄 나고 사회의 강자들에게는 법이 무력한 반면 약자들에게만 법질서 준수가 강요되고 있으며 수평적으로나 수직적으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 아니라 금상첨화(錦上添花)가 2009년의 사자성어였으면 얼마나 좋았겠나마는 이런 소박한 소망은 또 내년으로 미뤄졌습니다.

이 나라 미국의 사정도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2009년은 경제적으로 최악의 해였습니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취임으로 2009년의 막을 열었지만 그의 지지도는 1년 사이에 50%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연말에 의료개혁안을 연방 상원에서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뒀지만 이 의료개혁은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최악은 아프가니스탄에 3만여 명의 군인을 증파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노벨 평화상 수상을 무색하게 만든 일입니다. 이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끝내기는커녕 거기 더 깊이 발을 들여놓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들을 보면 올 한 해도 작년처럼 힘든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허리춤을 맞잡고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출처 : 위키피디아)
새해 첫 주일에 야곱을 생각하다

이런 상황에서 새해 첫 주일에 야곱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과히 유쾌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기이한 인물에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고 그가 겪은 특별한 경험은 새해를 맞은 우리들에게 줄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으므로 저는 야곱 이야기를 오랫동안 새해 첫 주일 설교의 단골 주제로 삼아왔습니다.

야곱은 아브라함, 이삭, 요셉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이 떠받드는 위대한 조상들 중 한 사람이지만 그는 나머지 세 명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독특함은 그가 남달리 신앙이 깊었다거나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남 못지않게 풍파 많고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었습니다. 야곱의 생을 사자성어로 푼다면 그것은 '자업자득'이 되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쌍둥이 형보다 먼저 세상에 나오려고 어머니의 태중에서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 이름에는 ‘사기꾼’이란 뜻도 있다고 합니다. 과연 어느 아버지가 자식에게 이런 이름을 붙일 생각을 했을까 싶습니다.

야곱이란 이름의 어원이 사기꾼임은 추측일 뿐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원의 정확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는 평생을 속임수로 일관해온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민족이든 자기 조상의 나쁜 점을 감추고 좋은 점은 과장하기 마련인데 성경은 야곱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야곱은 속임수로 아버지와 형에게서 축복과 장자의 권리를 가로챘습니다. 그는 사람뿐 아니라 하나님까지도 속일 수 있다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자기에게 속은 형이 자기를 해하려 하자 그는 외삼촌 라반이 사는 먼 곳으로 도망쳐 오랫동안 거기서 살면서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았습니다. 그러나 제 버릇 남 못 준다고 거기서도 야곱은 반듯하게 살지 않았습니다. 라반과 야곱은 서로 속고 속이기를 경쟁한 끝에 속임수로 말하자면 라반보다 고수(高手)인 야곱이 판정승을 거둬 그는 많은 재산을 갖게 됐습니다.

이런 야곱이 오랜 타향살이를 정리하고 아내들과 자식들과 종들과 우양(牛羊)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식솔이나 재산으로 보면 분명 금의환향(錦衣還鄕)인 셈이지만 형과 만나야 했기에 그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형의 보복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영영 고향을 저버릴 수는 없었으니 언젠가 한번은 형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그는 형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선물을 바리바리 챙겨서 식구들을 함께 먼저 강 건너로 보내놓고 나서 자기만 혼자 뒤에 처졌습니다. 하지만 그는 형을 만나기 전에 생각지 못했던 다른 분과 먼저 만나야 했는데 그분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예상치 않았던 이 만남은 사실 형과의 만남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무서운 만남이었습니다.

타향살이를 하는 동안 야곱과 하나님 사이에는 그 어떤 모양의 소통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을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었고 하나님도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거나 지시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야곱은 마치 하느님이 안 계신 것처럼 속임수를 쓰며 살았고 하나님도 야곱에게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의 삶에 관여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야곱이 나루터에 홀로 누워 뭘 했을까요? 하나님께 기도했을까요? 그럴 수 있겠지요. 사람은 다급하면 하나님을 찾게 되니 말입니다. 하지만 야곱은 정말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리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정말 하나님이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그가 기대했고 필요로 한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하나님은 불안한 마음에 평화를 주고 ‘걱정 말라’고 위로와 용기를 주는 하나님이었겠지만 정작 그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다짜고짜 그의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하자고 덤벼드는 분이었습니다. 사정없이 그를 공격하고 그에게 상처를 주고 그를 넘어뜨리려고 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야곱은 영문도 모른 채 이런 하나님과 밤새도록 씨름해야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허리춤을 잡고 씨름하는 것

제가 구약성경을 좋아하는 까닭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모습 때문입니다. 야곱의 허리춤을 붙잡고 씨름하는 하나님! 저 먼 하늘 위에서 사람의 삶과 역사를 원격조종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한복판으로 몸소 내려오셔서 사람들과 치고받고 뒹굴고 씨름하는 하나님,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사람들과 끌고 당기며 씨름하는 하나님, 성경은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고 말합니다. 저는 그래서 성경이 좋습니다.

믿음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믿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허리춤을 맞잡고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 외의 다른 모든 씨름과 겨룸은 부수적이요 오픈 게임입니다. 본 게임은 하나님과의 씨름입니다. 여러분이 신앙인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로 레슬링처럼 그저 적당히 흉내만 내는 겨룸이 아니라 거친 숨 몰아쉬면서 온몸이 땀범벅이 되어서 때로는 피를 흘려가면서까지 하나님과 씨름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모름지기 씨름은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씨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긴다는 말은 곧 설득한다는 뜻이고 진다는 말을 곧 설득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이긴다 함은 하나님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뜻이고 반대로 진하는 말은 하나님에게 설득됐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과의 씨름에서는 누가 이기든 모두가 승자인 셈입니다. 물론 모두가 승자라고 해서 적당히 시늉만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씨름은 죽기 살기로 겨뤄야 하는 씨름입니다.

사람과의 씨름에서 정정당당히 힘과 기술로 이겨야 하듯이 하나님과의 씨름도 마찬가지로 정정당당히 겨뤄 이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무엇을 원하고 기도한다면 왜 그것을 원하는지, 왜 그것을 달라고 하는지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왜 그렇게 살고 싶고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왜 그렇게 사는 데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 하는지 하나님을 설득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한 것이 주어진다고 해서 무조건 그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고 하나님이 주셨다고 믿으면 안 됩니다. 재물 같은 것을 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 말고도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악마도 줄 수 있습니다. 악마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자기에게 절하면 천하의 권세를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므로…" 같은 모호한 이유로 하나님을 설득하려 해서는 안 됨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사람이 떵떵거리며 부자로 살아야지 지지리 궁상맞게 살면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기 때문에…" 같이 자기기만적인 기도를 해서도 안 됩니다. 재물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 재물이 필요한지, 무엇에 쓰려고 그 재물이 필요한지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설득이 되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움직이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오죽하겠습니까! 하나님은 겉치레와 미사여구에 혹해서 마음이 움직이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키지도 않을 헛된 약속에 넘어가서 행동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벌이신 씨름은 야곱을 몸으로 설득하시기 위해 벌인 일이었습니다.
 
내가 구한 것과 내가 받은 것

야곱과 하나님의 씨름은 의외의 결말로 끝났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변칙공격을 하셨습니다. 상대가 누구든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상대를 이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환도 뼈를 쳐서 야곱을 쓰러뜨렸으니 야곱은 하나님의 변칙공격에 당한 셈입니다. 그래도 야곱은 쓰러져가면서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쓰러진 채로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복을 주지 않으면 절대 놓아주지 않겠다면서 그는 하나님을 붙들고 늘어졌습니다. 그가 무슨 복을 구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형으로부터의 안전 같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내용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셨지만 그 내용은 야곱이 구했던 것과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란 뜻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 복에 대해서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자기가 구한 복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요. 새로운 이름이 왜 어떤 의미에서 축복인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때로 우리가 구한 것과 다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원하는 것으로 축복하시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필요한 것으로 축복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받는 사람에게 당장은 그것이 축복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복 그 자체가 아니라 복을 주시는 분을 믿기 때문에 받은 것이 우리가 구한 것이 아닐지라도 감사히 받을 일입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하여 힘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 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맘속에 진작 표현 못한 기도는 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많은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새로운 이름은 새로운 인격과 새로운 존재를 상징합니다. 새로운 인격, 새로운 존재는 변화되지 않고는 이룰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한 후에 야곱에게 변화가 생겼는데 그것은 그가 다리를 절게 된 일입니다. 절뚝거림은 그가 죽을 때가지 사라지지 않았던 변화의 흔적이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절뚝거리며 살았는데 이 절뚝거림은 곧 그가 하나님과 씨름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바울의 말한 '예수의 낙인'을 봅니다. "앞으로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내 몸에는 예수의 낙인이 찍혀 있습니다."(갈라디아 6:17) 야곱에게 절뚝거림은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였습니다. 바울이 가졌던 예수의 낙인은 그가 예수의 참된 제자였던 표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은 가고 이스라엘이 뜨는 해를 바라보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하나님께 선택된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우쭐거리며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씨름한 흔적으로 절뚝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절뚝거림은 약함의 상징입니다. 바울이 말한 예수의 낙인도 마찬가지로 약함의 상징입니다. 예수의 십자가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그가 곧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힘이며 하나님의 지혜입니다(고린도전서 1:22-24).
 
예수의 제자는 약해 보이지만 하나님의 힘이며 지혜인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는 면류관을 왕관처럼 쓰고 거들먹거리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의 고난의 흔적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 고난의 흔적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하며 절뚝거리면서도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사람, 바로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예수의 제자입니다.

하나님이 떠난 후 동편 하늘에 해가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야곱은 그 해를 바라보며 "내가 여기서 하나님과 대면하고도 목숨을 건졌구나"라고 중얼거리며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불렀습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직역하면 뜻이므로 거기서 야곱이 하나님과 대면했음을 상징하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떠나가셨습니다. 야곱도 떠나갔습니다. 남아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 사람은 하나님과의 씨름의 흔적은 안고 절뚝거리며 살아갈 '이스라엘'이었습니다.

2010년 한 해를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있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과 씨름하며 사십시오. 하나님의 허리띠를 놓치지 말고 힘껏 하나님과 씨름하며 살아가십시오. 그 씨름의 흔적을 안고 절뚝거리며 사십시오. 이것이 에베소 1장 3절에서 바울이 말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는 하늘의 영적 축복"입니다.

곽건용 목사 / LA 향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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