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신학의 대중화가 필요하다
  • 김영웅
  • 승인 2017.09.24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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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대중화에서 배운다.
EBS 과학 다큐 비욘드 - 웨어러블 로봇, 강화 인간을 꿈꾸다. 동영상 갈무리 ⓒ EBS

과학이란 학문의 시작과 발달은 소수의 지식층에 의한 것이었지만, 과학적인 호기심으로부터 생겨나는 질문에 답을 해나가는, 소위 과학적인 방법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될 만큼 보편적이다. 신학 또한 마찬가지다. 성경이란 책을 모르거나 예수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거의 없을 만큼 기독교는 가장 널리 알려진 종교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어 있는 반면,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극소수이고, 당연히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과학의 대중화는 뜻이 있는 (부와 명예가 과학의 동기나 목적이 아닌 "순수" 과학자들) 소수의 과학자들에 의해서 진행되어 왔다. 교육방송(EBS)나 여러 책과 미디어를 통해 과학의 대중화 작업은 끊임없이 지속되고 있다. 덕분에 과학이란 학문을 초중고 학생 시절에만 과목으로 배웠던, 소위 "일반인"들의 과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암묵적으로 형성되어져 있던 과학의 높은 벽을 조금씩 무너뜨려 대중과 소통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이는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며 이를 주도하는 과학자들의 헌신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개인적으로 기독교도 대중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위에서 기독교가 가장 널리 알려진 종교라고 언급했으면서 무슨 말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기독교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잘못된 이해에 관한 것이다. 과학적인 호기심의 배경에는 철학적인 호기심이 있다. 그리고 그 철학적인 호기심은 신학적인 호기심과 맞닿아 있다. 과학은 우주와 생명의 진화 과정을 과학적인 증거를 가지고 설명을 한다. 많은 부분 어떻게?(How?)에 관한 대답이다. 반면 철학은 왜? (Why?)에 관한 측면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하며 추론과 논리전개, 관찰과 토의를 통해 답을 도출해 내려고 한다. 예를 들어 우주가 왜 팽창이 되어야만 하는지, 왜 생명이 진화를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을 연구하는 거다. 그러나 신학은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한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서, 그리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의심과 질문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그러나 실제 교회 안에서 그런 질문을 스스럼없이 했다가는 자칫 믿음이 없다거나 조용한 물에 돌을 던져 파장을 일으키는 악한 무리 정도로 여겨지기 일쑤다. 그런 것을 미리 감지한 나머지 많은 교인들은 입을 다물고 그저 예 예 아멘 아멘만 하고 있거나, 마지못해 교회를 떠난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인 일도 행하실 수 있음을 난 믿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초과학적이신 분이시지 비과학적이신 분이 아님도 나는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언급한 자연스런 질문에 대해서, 먼저 예수를 믿게 된 교인들은 대답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난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지엽적인 질의응답에 응하면 마치 부정 타는 것처럼 무속적으로 여기시는 교회 집사, 장로님들이 얼마나 많은지. 자상하고 온화하며 너무나 인격적으로 훌륭하게 보이시는 그분들의 실상은 그저 입 닫고 예수 믿으라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들은 공부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는 지식이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그들의 친절함은 나무랄 데 없이 너무나 훌륭해서 정말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많은 교인들이 그러한 친절함에 처음에는 감동받아 교회에 출석하다가 결국에는 목말라서 떠나는 것도 사실이다. 새로운 교인이 매주 등록을 해도 해마다 교인 수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줄어드는 것은 그만큼 떠나는 교인 수도 지속적임을 증명하는 거다.

끊임없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웃지 못한 사건들은 한국에 자리 잡은 기독교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데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부패한 언론이 판을 치는 가운데서도 대중들은 언론을 통해 소식을 접할 수밖에 없고, 그렇기 때문에 그 기사의 사실여부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 업데이트되는 한국 기독교의 모습은 한국이란 고유한 문화에 너무나 토착화되어 있고 무속화 되어 있다고밖에 설명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수많은 대형교회 목사들의 비리는 작년 국정농단 사건에 있어 공범이라고 여겨지고 있는 대기업들의 정경유착과 너무나도 닮아있다. 안타까운 건 그런 교회들이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며 리드해 오던 곳이었고 특별히 거룩한 예배를 강조했던 곳이라는 사실이다.

즉, 겉으로 보이는 친절함과 실속 없는 “거룩함”은 전도와 선교의 지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함이 이미 역사를 통해 증명이 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를 반복할 뿐이다. 정성이 부족했다거나, 신경을 좀 더 쓰지 못했다고 스스로 자책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 자책이 올바른 반성으로 이어질지는 난 정말 의문이다. 나를 포함한 기독교인들은 전도와 선교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도와 선교를 할 때 과연 기독교인들은 무엇을 전하고 있는지, 무엇을 전해야만 하는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 있는지, 기독교인이 그저 자상하게 웃고만 있으면 되는 것처럼 여기고 있는지, 난 정말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도와 선교를 가로막는 건 다름 아닌 기독교인일 수도 있다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사실 말이다.

그러므로 신학 (여기서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학)의 대중화는 교회 내부에서부터 일어나야만 한다고 난 생각한다. 과학의 대중화를 선도하고 있는 과학자들은 이미 그들 네트워크 내에서는 남녀노소 직급 여하를 막론한 토론 문화에 대한 존중과 끊임없이 배우는 자세가 되어 있다. 이미 그들 먼저 실천을 하고 있는 거다. 마찬가지다. 신학의 바람직한 대중화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교회 안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만 한다. 우리 기독교인부터 진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무엇인지, 금기시 해온 위에 언급한 자연스러운 일반적인 질문들을 포함하여, 서로 문을 열고 대화하고 토론을 하며 겸손하게 배워야 한다. 물론 이를 이미 실천하고 있는 여러 개인과 단체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 새물결아카데미나 기독연구원 느헤미야 등등이 좋은 예다.

나는,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는 말씀이 진정 성취되길 원한다. 교회 안에 형성된 어설픈 거룩함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한다. 올해는 루터의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이하는 해다. 우리 기독교인의 또 한 번의 개혁이 필요하다. 바로 교회 안에서 말이다.

 

글쓴이 김영웅은, 하나님나라에 뿌리를 두고, 문학/철학/신학 분야에서 읽고/쓰고/묵상하고/나누고/배우는 것을 좋아하며, 분자생물학/마우스유전학을 기반으로 혈액암을 연구하는 가난한 선비/과학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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