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
‘21세기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
  • 이병주
  • 승인 2017.12.09 0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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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지는 기독법률가회 이병주 변호사의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과 ‘21세기 교회개혁의 네가지 과제’라는 제목의 글을 두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 <편집자 주>

‘21세기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독교의 사회적 위험

예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고 하셨지만 (마태복음 5:13-14), 기독교인들이 교만과 무지로 인하여 자신의 신앙과 세상에 대한 오해와 혼동에 빠지면, 거꾸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독교’를 만들어냅니다. 탄핵 저지를 위해서 군대를 동원하고 계엄령을 선포하자는 태극기집회에 십자가와 찬송가를 동원하는 ‘한국교회의 정치적 탈선’이 그것이고, 미국 역사상 가장 비윤리적이고 인종주의적이며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를 설교하는 극우적 대통령 후보 트럼프에 대해서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악한 왕도 쓰신다.”는 신정론(Theodicy)적 궤변을 동원해 가면서 80%를 넘는 압도적 지지로 대통령에 당선시킨 ‘미국교회 백인 복음주의자들(White Evangelicals)의 신앙적 탈선’이 그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선하고 세상만 악하다는 생각은 오해이고 거짓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얼마든지 세상을 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람은 다 죄인이고, 교회에도 인간들의 악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한쪽에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불쌍히 여기고 돕는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다른 한쪽에는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몰아내라고 소리 지르는 기독교인들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어서 내세의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냉혹하게 공격하고 세상을 이생의 지옥으로 만드는 일에 얼마든지 앞장설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세상은 괴로운 마음으로 오늘의 기독교인들에게 묻습니다. 권력자들의 불의는 쉽게 용서하고 공감하고 얼마든지 불쌍히 여기면서, 권력에 의해서 무시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희생자들과 서민들의 외침에 대해서는 공감하지 않고 불편해 하며 도리어 공격과 비난을 가하는 냉정한 기독교, 나의 이익과 나의 안녕과 나의 욕망을 위해서 사회의 소수자들과 나그네들을 몰아내자는 구호에 열렬하게 환호하는 오늘의 무정한 기독교는 과연 누구를 위한 기독교이며, 무엇을 위한 기독교인가? 정치적 극단주의를 열렬히 지지하면서 사회의 소수자와 약자들을 악몽과 공포에 빠뜨리는 복음주의자(evangelical)들이 전하려는 복음(福音)은 도대체 무슨 복음의 좋은 소식(good news)이란 말인가?

세월호 사건에서 탄핵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박근혜 사태에서 한국교회는 한국 사회 전체에 ‘한국의 개신교 = 공개적으로 민주주의를 반대하고 사회적 불의를 옹호하는 유일한 종교세력’이라는 사회적 충격을 주었고, 미국의 트럼프 사태에서 미국교회는 개인주의적인 자기사랑의 추구에 마비된 미국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의 도덕적 위선과 사회적 파산 상태를 생생하게 보여줌으로써, 제도로서의 기독교는 물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 5백주년을 맞은 2017년, 21세기의 초반 한국은 물론 전세계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세상을 어지럽히는 기독교’의 사회적 진상입니다. 개인주의적 복음을 추구하는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적으로 파산했습니다. 한국교회의 목회자들도, 한국교회의 신학자들도, 한국교회의 평신도들도, 모두 이 사태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의 원인'
한국교회 신앙의 비사회성과반사회성과 무사회성

그렇다면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의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을 기독교인들의 특정한 정치적인 성향 때문인 것으로 보는 접근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사회의 정치적 보수와 정치적 진보 간의 대립을 그대로 교회 안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지고 들어와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기독교인 모두가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에 대한 공동의 책임을 회피할 수 없고, 모두가 회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무정함’과 비정치적인 경건주의 기독교인들의 ‘무관심’과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의 ‘무능함’이 모두 합력하여,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 사태’를 (무정하게) 만들고 (무관심으로) 조장하고 (무능력하게) 방치했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사회적 실패’는 복음전도의 길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우리가 믿는 복음의 진실성 자체를 도전합니다. 사회적 무관심을 넘어서 사회적 위험으로까지 전락한 우리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문제점을 다음의세 가지로 고백하고 고발합니다. 첫째는 ‘개인적 구원의 복음주의’로 말미암은 기독교 신앙의 ‘신학적 비(非)사회성’이라는 신앙적 결함(缺陷)이고, 둘째는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 ‘자기사랑의 복음주의’가 만들어낸 기독교 신앙의 ‘실천적 반(反)사회성’이라는 신앙적 왜곡(歪曲)이며, 셋째는 ‘교회에서의 신앙생활’만을 강조하는 신앙생활의 편중성으로 인한 기독교 신앙의 ‘제도적 무(無)사회성’이라는 신앙적 제한(制限)입니다. 

 

첫째, 개인주의적 복음주의로 인한 한국교회 신앙의 신학적 비(非)사회성입니다.

우리가 한국교회에서 배우고 가르쳐온 복음은 기본적으로 ‘개인적 구원’의 복음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갚으셨는데, 이 죄인들은 ‘개인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 ‘개인적’ 구원의 논의에는 집단과 사회의 문제가 끼어 들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영적 구원에 대한 관심으로 이생의 일에 대한 관심이 없고, 개인적 구원에 집중하여 사회와 집단의 일에 관심이 없는 개인적 복음주의의 주된 흐름은, 결국 세상의 사회적 정의와 불의의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는 ‘사회적 무관심’의 상태에 있거나,사회적 삶의 긴장과 갈등에 대해서뚜렷한 인식이나 이론이 없는 ‘사회적 무지식’의 상태로 빠져들게 됩니다.

개인적 구원론은 인간의 개인적이고 영적인 악에만 신학적으로 집중하고, 인간의 집단적인 악과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죄와 악에 대해서는 연구하지도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개인적 구원의 복음주의를 통해서 세상과 사회와 집단의 정의와 불의와 악과 죄의 문제에 대해서는 배운 것이 없으니까, 한국교회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생활만 열심히 하면 세상에서는 어떤 일을 해도 자기의 구원에 상관이 없다는 ‘신앙적 자유(自由)’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을 끼고 사는 독실한 악당들이 생겨납니다. 결국 개인적으로 구원받은 기독교인들은 사회적 무관심으로 세상의 악을 방치하고, 사회적 무지식으로 인한 정치적 맹목성으로 세상의 불의를 조장하면서, 오늘날 기독교의 사회적 파산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의 비사회적 신학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끼고 사는 사회적으로 독실한 악당’들을 대량으로 만들어 한국사회에 배출합니다.    

 

둘째, 자기사랑의 복음주의로 인한 한국교회 신앙의 실천적 반(反)사회성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세 가지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과 자기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신앙의 초월적인 측면에, 이웃사랑은 사회의 공적 질서에, 자기사랑은 개인적 인생의 사적 생존에 연결됩니다. 기독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강조하지만, 기독교인들의 인생과 신앙은 실상 개인적인 자기사랑에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속마음으로는, 우리가 매일, 매주 고백하고 찬양하는 하나님 사랑조차도 사실은 ‘나’를 구원해 주고 ‘나’를 도와주고 ‘나’를 위로해 주는 ‘나’의 하나님에 대한 ‘반사(反射)된 자기사랑’이란 측면이 강하니, 자기사랑의 신앙적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합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에게 ‘나’를 사랑해 달라고 매달리는 자기사랑의 복음주의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적 배신입니다. 자기사랑의 축복과 자기사랑의 위로에 취해서 자기부인의 긴장을 망각한 자기사랑의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세상의 악을 만듭니다.

‘자기사랑의 기독교’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면 ‘개인적 자기사랑’의 성공주의, 성장주의에 대한 우상숭배, 개인적인 기복주의 신앙으로 비교적 온건하게 나타나지만, ‘자기사랑의 기독교’가 집단적인 차원으로 전개되면 금방 ‘집단적 자기사랑’의 양상인 국가주의 우상숭배, 반공주의 우상숭배, 인종주의 우상숭배의 극렬한 사회정치적 폭력성과 결합됩니다. 이것이 한국의 박근혜 사태에서 자기사랑의 태극기와 동맹을 맺은 자기사랑의 십자가, 미국의 트럼프 사태에서 자기사랑의 인종주의와 결합한 자기사랑의 백인 복음주의가 등장하게 된 논리적 필연성입니다. 현재 21세기의 세계는 ‘자기사랑의 복음주의’를 통해서 ‘자기사랑의 집단적 이기주의’와 정치적·영적 동맹관계를 형성한 반사회적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공격성에 경악하고 있습니다.  

 

셋째, 교회활동에 편중된 신앙생활로 인한 한국교회의 제도적 무사회성입니다.

기독교인의 인생과 신앙에는 ‘교회’와 ‘사회’라는 두 가지 공간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생과 신앙의 초월적인 측면을 담당하고, ‘사회’는 다시 ‘가정’과 ‘직장’과 ‘국가’라는 세 가지 기관을 통해서 인생과 신앙의 사적이고 공적인 내용들을 담당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복음은 ‘교회’에서도 일하고 ‘사회’에서도 일해야 합니다. 그러나 개인구원과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한국교회는 사람들을 교회로 모아 교회 일을 하게 하는 교회중심의 신앙생활만 가르치고, 사람들은 교회 밖에서, 직장과 가정과 국가에서 씨름하는 사회적 신앙생활을 배우지 못합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의 독실한 신자들은 ‘교회’라는 우물에 갇혀 우물 밖의 세상과 사회를 신앙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신앙적인 우물 안 개구리’가 되었습니다. 결국 평신도를 깨워서 열심히 교회 일만 시키는 한국교회 신앙활동의 제도적 ‘무(無)사회성’은 사회를 모르는 기독교를 만들고, 개인적으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사회적으로 경건의 능력은 없는 무기력한 기독교인들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문제를 모르면 답을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면 문제를 풀고 답을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21세기 한국교회의 사회적 실패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찾아냈다면, 지금부터는 그에 대한 답을 내고 문제를 풀어나가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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