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회 쇠퇴'는 옳다 하지만…
'미국 교회 쇠퇴'는 옳다 하지만…
  • 김기대
  • 승인 2010.05.07 18:1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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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미국 교회는 어디로 갈 것인가

미국의 주류 교단, 즉 장로교 감리교 성공회 루터교 등은 쇠퇴하고 있다. 백인 중산층 이상을 타깃으로 했던 이 교단들은 미국 역사상 교회가 저질렀던 모든 범죄의 주범들이기도 하다.

서구 민주주의의 모태가 되었다고 자부하는 장로교의 대의 정치, 아직 가톨릭의 색채를 못 벗어난 성공회, 감리교의 감독 정치처럼 이들은 교직 체계 중심으로 교회를 운영하며 황금기를 누렸지만 1970년대 이후 기성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사회 주류로 부상하면서 쇠퇴를 시작했다.

뒤늦게 놀란 이들은 허둥대며 새로운 의제들을 생산해 냈다. 과거사 반성, 진보에의 동참, 비서구 종교에 대한 관심을 표명하지만 떨어지기 시작한 교세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뿌리 깊은 백인 문화에 대한 반성이 없으면 주류 교회는 다시 일어서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교회의 핵심을 비백인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주류 교단은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슬픈 삼단 논리다.
 
미국이 이들의 땅이 아닌데 이들만 보고 미국 기독교의 쇠퇴를 이야기하지 말라는 <the next evangelicalism>이라는 책의 지적은 옳다. 그런데 우리의 고민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교회의 부흥과 쇠퇴의 기준은 무엇인가?

비백인 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도 미국 교회의 일부인데 왜 쇠퇴를 운운하냐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맞지만 결국 그 기준은 우리가 그토록 경멸하던 '숫자'다. 또한 그 성장에는 미국 사회를 이끌어갈 힘이 있는가도 물어야 한다.

단적으로 미주 한인 교회를 보자. 분명 미국 교회의 일부로서 그들은 쇠퇴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로운 미래를 보여줄 비전은 있는가. 그들이 말하는 비전이란 고작 교회 성장의 도구일 뿐이다.
 
여타의 비백인 미국 교회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토착 문화의 도입이 신선해 보이지만 오랫동안 가난에 찌들었던 그들의 신앙은 기복적인 요소가 강하다. 

아이티의 재난 때 무식한 교회 지도자들이 부두교의 저주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 소리가 듣기 싫다고 부두교를 편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니 만약 부두교를 긍정적으로 보고 싶다면 성장과 축복 병에 들어 있는 한국 교회도 인정해야 한다.

한인 교회와 부두교와 뭐 그리 다르겠는가? 그런데 부두교나 자메이카 기독교 같은 교회 형태를 인정하면서 한국 교회의 부두교화를 비판하는 소리가 한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점이 참 독특한 한국 진보 신학계의 문화다.
 
미국 교회가 쇠퇴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 즉 비교파 교회의 성장은 어떤가? 릭 워렌, 조엘 오스틴처럼 교묘한 자기 개발과 가벼운 감동으로 무장된 이러한 교회들에 기성 교회에서 퇴출된(아니 자퇴한) 백인 중산층이 모여들고 있는 이 현상은 쇠퇴인가? 부흥인가?

비교파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교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를 싫어했으며 거대 담론을 싫어했다. 비교파 지도자들은 이 점에 착안했다. 청바지를 입고 설교단에 오르며 설교 시간에는 정의 평화보다 속옷 상표인 빅토리아 시크릿 이야기 같은 가벼운 소재들로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베이비부머 세대들이 교회의 권위에 대해 가졌던 반감들이 고작 청바지 하나에 무너질 만큼 취약한 것이었음을 그들 스스로가 증명하고 있다.

어떤 교직 체계도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교회 속에서 대중들은 아무런 자기 의견도 반영하지 못한다. 모든 사람의 의견이 다 반영되어야 하는 시스템은 민주주의의 한 장르일 뿐인데 그것을 민주주의 전체라고 곡해했던 그들 스로가 판 무덤에 다름 아니다.

결국 대의 정치나 감독정치 체계에서만큼도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 채, 주류 교단이 내어 놓는 새로운 의제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채 그들은 도끼 자루 썩는지 모르는 신선놀음과 같은 얄팍한 개인적 영성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간다.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될지언정 나는 이 현상을 미국 교회의 진정한 쇠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 해답은 무엇인가? 이라크 전에 대한 문제 제기, 동성결혼에 대한 전향적 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서의 공정무역 운동 등 새로운 의제들을 내어놓는 주류 교단의 뒤늦은 반성은 눈여겨 볼만하지만 모든 것을 백인 문화의 틀 속에서 운영하려는 그들은 쇠퇴를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비백인 문화에 대한 주류 교단의 관심은 관용일 뿐 기득권 포기가 아니기에 좋은 의제조차도 진정성이 의심 받는다. 분명히 쇠퇴다. GM 대리점 꼴이 날 것이라는 기사의 내용대로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장하는 삼성이 대안은 아니지 않는가? 미국 자동차 산업이 노조 때문에 망했다고 하는 의견 속에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삼성은 과연 경제 성장의 모델이 될 수 있겠는가. 비주류 교회들의 성장을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의 문제는 바로 삼성의 문제와 같다. 다시 말해 결과주의로 모든 것을 단정할 수 없다.
 
결국 미국 교회는 주류 교단의 대중성 확보 실패로 인한 쇠퇴, 대중성을 확보한 비주류 교단의 의제 실종으로 인한 쇠퇴(숫자상으로는 성장)를 반복하며 하향길로 갈 것이다. 어쭙잖은 대안들은 단기 처방만 될 뿐이다. 단기 처방조차 내어 놓지 않았던 유럽 교회들처럼 철저하게 망가질 필요가 있다. 유럽 기독교는 바로 그 망가진 지점에서 조금씩 부활의 기미를 보이고 있다. 흥미 있는 것은 그 부활을 교회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포스트모던 철학자들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미국 교회(그 아류인 한국교회까지)는 더 쇠퇴해야 한다. 아니 죽기까지 낮아져야 한다(빌립보 2:8). 마치 종말을 다룬 영화의 기본 줄거리처럼 모든 것이 다 망해버린 지구에서 몇몇이 다시 문화를 일구기 위해 노력하듯이 교회는 바로 그 자리에 서야 한다.
 
쇠퇴하는 교단 중 하나인 미국장로교 소속의 목사인 당신의 입장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의 사명은 교단 중흥이나 기독교 중흥과 같은 역사적 사명에 있지 않다.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아직은 교단이 내어 놓는 거대 담론이 의미 있기에 그들을 존중하며, 그에 걸맞은 선포를 하며 목회할 것이다.

거대 담론 속에 지친 교인들을 위로하되 가벼운 감상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함께 기도하며 교인들과 우리의 길을 갈 것이다. 개인의 욕망을 폄하하지 않되 공공의 소망 앞에서는 그 욕망을 잠시 유예할 줄 아는 교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되도록 함께 노력할 것이다.

그래도 큰 배가 침몰하는데 작은 배가 어찌 견디겠는가. 하지만 배가 침몰한다고 비겁하게 먼저 뛰어내릴 수야 없지 않겠는가. 배와 함께 장렬히 전사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의 결말은 하나님께 맡기고 말이다. 

김기대 /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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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2010-05-12 12:40:13
까짓것 죽자고요. 죽으면 또 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