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교회가 나그넷길 가기를 기대하며
사랑의교회가 나그넷길 가기를 기대하며
  • 황병구
  • 승인 2010.05.09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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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번식과 성장보다 섬김과 다스림으로

"여보, 다른 집에서 모임을 가질 때에는 집 구경한답시고 이 방 저 방 열어 보기도 하고 이런저런 가재도구들 품평회도 하지만, 우리 집에선 뭐 그런 이야깃거리가 없으니 모임 자체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긴 하다."
 
"그래요. 변변한 공간도 아니고 죄다 중고 살림살이지만 다들 우리 처지를 이해하니깐 그랬겠죠. 유학생 부부가 그렇겠거니 하면서 별 기대가 없어서 더 그랬을 거예요."

유학생 시절, 아내와 나는 교인 몇몇 분들을 초대해서 저녁 대접을 한 후 설거지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오신 분들도 그랬지만 초대한 우리도 그랬다. 그곳에 오래도록 발붙이고 살 계획으로 온 것이라기보다 언젠가 떠날 계획으로 와 있다 보니, 마련하는 살림이라는 것이 다 실용적인 것일 수밖에 없고 도리어 겉치레하는 듯한 생활은 분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그곳에서 자리 잡고 정착하려는 이들이 연연해 할 수밖에 없는 영주권 문제나 주택 모기지 문제 등에 대해서 약간은 관조적으로 볼 수 있는 여유 같은 것이 생겼다. 가장 재정적으로 쪼들렸던 우리가, 상대적으로 넉넉한 수입을 가진 분들의 앞날과 염려에 대해 기도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두 아이의 아빠로 변변한 재원도 없이 늦깎이 유학을 떠났던 내게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것은 나그네로서의 삶이었다. 빈틈없는 계획을 세우지만 아무 것도 보장되지 않았기에 늘 기도해야 했고, 그나마 경쟁 속에서 확보한 권리가 있더라도 언젠가는 내려놓아야 하는 것임을 수시로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나그네로서 자의식을 회복하라

어느새 가정 교회(House Church)는 셀 교회(Cell Church)와 함께 한국 교회의 성장 코드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사역 형태가 되었다. 많은 지역 교회들이 성경공부 중심의 제자훈련에서 한발 더 나아가 평신도를 가정 교회의 지도자로 세우고 각 가정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원초적인 사역의 단위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일면 반갑고도 바람직한 일로 보인다.

다만 유의해야 할 두 가지 왜곡 현상이 있다면, 먼저 가정 교회의 형태를 지역 교회 성장 전략으로써 도구적으로 적용하는 현상이다. 한국 교회의 모든 훈련 프로그램들이 성장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이 지점은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이 유의하려고 애쓰고 있는 듯하다. 다른 한편으로, 가정 교회라는 단위 공동체에 안주하는 우리들의 정착민적인 관성도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이는 아직까지는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하는 부분이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나그네다. 자칫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이 아니다'라는 피안적인 태도로 잘못 살아간다면 안 되겠지만, 삶에 있어 진정한 보장 자산은 이 땅의 재화나 권세가 아님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가정 교회라는 정체성이 암암리에 도피성이나 피난처로, 일종의 안온한 보금자리로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 도리어 성도 각인의 삶의 현장에서, 다시 말해 시장과 거리에서(on the way) 세속적 가치를 뒤집는 반문화적인 삶을 적극적으로 보여 주는 공동체로 인식되어야 한다. 이것이 어찌 보면 신약시대의 초대교회의 모습에 더 가까이 다가간 것이리라.
 
제자들의 정체성 역시 나그네였다. 두 벌 옷도 많다고 하셨던 예수님의 당부가 기억난다.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 생활은 나그네 된 그들의 정체성을 각인시키시는 하나님의 훈련 과정이었다. 그들이 예배하는 하나님의 처소마저도 이동 가능했던 임시 가설물이었던 것을 기억하자.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고 날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하여야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하나님은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한 가나안의 사상이 아닌 다른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도록 단련하셨다. 훗날 하나님께서 학개서 1장에서 탄식하신 바, 자기 백성들은 화려한 거처를 마련하면서도 당신을 형편없는 처소에 내팽개쳤다는 지적은, 당신의 처소를 웅장하고 보암직하게 마련해 달라는 질투나 투정이 아니다. 그의 백성이 나그네로서 정체성을 잊고 하나님보다는 땅의 소산과 안전한 거처를 의지하고 있다는 경고다.

아직도 이 구절을 성전 건축의 근거로만 인용하고 있는 설교자들의 얇은 접근은 늘 아쉽다. 사실 예배와 사역 공간의 필요를 이유로 교회를 건축하지만 실상은 교인들이 활동하는 다목적 공동시설을 마련하기 위한 목적으로 짓는다. 이를 보면, 화려한 자신들의 거처를 마련하다가 혼쭐이 난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그네 된 제자들이 어떠해야 할지도 자명하다. 공동체 역시 이 땅에 의지할 것을 과도하게 남기지 않아야 한다. 의지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거하시는 예배 공동체 그 자체이며, 남길 것이 있다면 성령이 행하신 일상의 증거일 뿐이다. 이런 면에서 요사이 건축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는 사랑의교회를 비롯하여 성장 지향적 교회들이 조금 더 근사하고 덜 불편한 하드웨어를 갖추고자 하는 욕구를 품게 된 것은 나그네로서의 자의식을 잃어 버렸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성한 큰 교회가 큰 섬김을 감당한다?

창세기에 나타난 대표적 문화 명령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 중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은 인간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물고기와 새,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들 모두에게 명하신 복이자 미션이다. 하나님의 법도 안에 있는 생명체들에게 생육과 번성은 자연스러운 결과며 애쓰지 않아도 주어지는 본연의 속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주변에서 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명을 복으로 여기지 못하고 평생 미션으로 삼아 목숨을 거는 번식 성장론자들을 만나게 된다. 물론 생명 있는 모든 것은 번식하고 성장한다는 전통적인 전도와 선교 훈련에서의 기초적 비유와 권면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정 교회든 지역 교회든, 규모가 작은 교회든 큰 교회든 이것을 이른바 지상 명령으로 혼돈하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대표적인 지상 명령으로 꼽히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도 '명령'이 아니고 '약속'이다.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언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자연스레 벌어지는 증인의 삶을 약속하신 것이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으로 이루어질 일들이 바로 문화 명령의 후반부다.

이 문화 명령의 후반부는 사도 바울이 적시한 바, 고린도후서 5장 18절 이하의 '화목 명령'과 잇닿아 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 즉 피조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라(청지기적으로 섬기라)는 명령이, 그리스도의 사신이 되어 타락한 피조계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라는 명령으로 재구성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아울러 이 명령들과 동반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의 권능으로 개인의 소욕을 제어하고 이 계명을 따를 때 세상은 이들이 예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되고, 그런 제자의 삶이 약속하신 증인의 삶인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 부부에게 자녀가 복으로 다가오듯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에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육과 번성을 위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서로 사랑하고 세상을 섬기고 다스리는 삶을 목적으로 할 때 생육과 번성은 그런 이들에게 벌어지는 증거이자 결과다.
 
그래서 나는 생육하고 번성한 큰 교회가 큰 섬김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규모의 경제학'은 근본적으로 오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제자훈련을 기초로 한 성장의 결과라도 마찬가지다. 크게 되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더라도 대책 없이 크게 될 수밖에 없는 번식 프로세스 속에 이를 방임했다면 말이다.

이 프로세스 속엔, 커지면 나름 그 역할이 있을 것이라는 무책임도 일조하는 듯하다. 물론 큰 기업이 큰돈을 번다는 세속적 논리는 어느 정도는 맞다. 그리고 규모가 큰 교회가 많은 일을 조직적으로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션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선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논리나, 생육하고 번성한 후에나 미션을 수행할 수 있다는 논리는 거짓이다.

성경적인 참된 논증이라면 서로 사랑하고 섬기고 다스리는 삶이 우선이다. 그럼 혹자는 질문할 것이다. 이미 성장한 교회들은 이미 그 과정을 실천하고 거쳐 왔기에 소위 부흥을 경험한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솔직히 말해 보자. 한국 교회에서 크기로 존경받은 교회들의 성장 요인이 과연 서로 사랑함의 실천과 세상을 향한 섬김으로 인한 결과였던가. 사실 마음 아픈 진단이지만, 그 대부분은 기복 지향으로 한국인의 입맛에 맞게 대중적 목회를 했거나, 맞춤형 번식(Reproduction) 프로그램의 성공으로 양적 팽창을 한 것이다.

'사랑의교회를 위한 쉽지 않은 기도를 드리며'

한때 내가 뜻을 나누었던 사랑의교회에 다니던 친구들은 대다수가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서 대학을 다니는 이른바 지방 유학생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소박하나마 나그네의 영성이 있었다. 어두침침한 상가 사무실을 기도처로 삼고, 수위 아저씨의 협박 속에서 밤을 밝히며 말씀을 공부하던 구도자들이었다. 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면서, 교회에서도 부서의 고유 공간 하나 없이 집회실을 옮겨가며 하나님 나라와 참된 부흥을 위해 애쓰던 젊은 제자들이었다.

맘 아프게도 지금은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어느새 사랑의교회의 주된 가족들은 강남구·서초구·송파구·분당 등지에 그런 대로 자기 집을 가진 사람들이다. 지역 교회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 주차장은 비좁아지고, 예배 공간엔 대형 PDP 화면이 10미터 간격으로 줄을 서서 회중을 섬긴다. 헌신된 선생님들과 세련된 프로그램으로 새 옷을 입은 아동부, 중고등부와 대학부 친구들에겐 불안정한 미래나 보장되지 않은 진로는 낯설다.
 
그래도 이들에게 모종의 기대를 접지 않는 것이 주 안의 형제 된 자의 도리라는 부담에 오늘도 나는 쉽지 않은 기도를 해 본다. 사랑의교회 성도들이 예수의 제자들로 비록 현실적으로는 풍족한 삶을 누릴지라도 영적으로는 나그네의 정체성을 잃지 않게 해 달라고,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인 교회 역시 번식과 성장보다는 제발 섬김과 다스림으로 참된 사랑의 증거를 열매로 거두게 해달라고, 무엇보다 이들을 이끄는 목자 된 분 역시 자기가 맡은 양들을 멋진 우리 속에서 사육하려는 꿈을 접고, 하나님이 철을 따라 새롭게 하시는 풀밭으로 인도하며 들에서 겸손히 길을 걷게 해 달라고 말이다.

황병구 / 한빛누리 본부장, <복음과상황> 편집위원장

* <복음과상황>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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