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와 신앙
똘레랑스와 신앙
  • 이준수 목사
  • 승인 2018.07.15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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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수 목사 칼럼
이준수 목사 <미주 뉴스앤조이>
이준수 목사는 남가주밀알선교단 문서선교사역 팀장이다. 한국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도미후 대학원과 박사과정에서 역사학을 연구하였으며, 이후 시카고 트리니티 신학대학원에서 목회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었다. 다양한 학문적 여정 뿐만 아니라 뇌성마비 장애인으로서의 삶 또한 다름과 타자를 향한 똘레랑스와 신앙의 의미를 더욱 깊이 고민하게 하는 계기로 삼고 있다고 한다. 

똘레랑스란 무엇인가?

흔히 ‘똘레랑스(La Tolerance)’라는 프랑스어 단어는 한국어로 ‘관용’ 또는 ‘아량’이라고 번역되고 있다. 또 ‘배려’의 마음을 가리킬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하곤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똘레랑스란 단어 본래의 의미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관용이나 아량은 "남의 잘못을, 또는 나와 뜻이 다른 상대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란 의미를 갖고 있는데, 똘레랑스는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를 받아들이거나 용서하는 차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를 한다는 자체가 상대의 주장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의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똘레랑스의 진정한 의미는 관용이나 아량 보다는 ‘존중’ 또는 ‘인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내가 동의하기 어려운 상대의 생각과 행동을 그대로 ‘용인’ 한다는 뜻이다. 내가 우월한 위치에서, 선의를 베풀어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있는 모습 그대로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하는 것이 똘레랑스의 참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생각과 신념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것 역시 똑같이 소중하므로 그것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홍세화’ 씨가 그의 저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에서 소개한 대로, 파리의 한 공원 잔디밭 팻말에 쓰여 있다는 ‘Respectez, et faites respecter –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라는 표현이나 프랑스 철도노조에서 파업을 감행할 때 시민들이 아무런 불평이나 비난 없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한다는 사례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똘레랑스 정신이 어떤 것인지 잘 말해주고 있다.

물론 나의 사상과 행동이 옳다고 생각되면 상대방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할 수는 있다. 그리고 여기서 필요한 것이 ‘논쟁’과 ‘토론’의 기법이다.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사회에서 어린 나이 때부터 논쟁과 토론 교육을 중시하는 것도 나와 생각이 다른 상대를 효과적으로 설득하는 법울 배우기 위함이다. 그러나 치열한 논쟁과 토론을 통해서도 상대를 설득시키지 못할 경우 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말고 그대로 용인하고 인정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똘레랑스가 방어적 개념이 아니라 적극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단지 이견이나 차이에 대한 의도적인 용인에서 끝나지 않고, 이견과 차이의 존중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하는 의무까지도 포괄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는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겼던 것이다. “나는 당신이 말한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침해당할 경우 그 권리를 위해서는 죽도록 싸울 것이다(Je déteste ce que vous écrivez, mais je donnerai ma vie pour que vous puissiez continuer à écrire.)” 

볼테르 <다음카페>

흔히 기독교, 특히 복음주의적 개신교계에서는 똘레랑스가 동성애와 종교다원주의를 옹호한다고 하여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본래 똘레랑스란 개념은 개신교가 새롭게 정립된 16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등장한 것이다. 여타 유럽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16세기 프랑스 역시 가톨릭과 개신교도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노골화되어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 등 살육전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나라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개신교도인 ‘나바르의 앙리’가 왕위에 올라 자신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프랑스 내 칼뱅주의 개신교파인 위그노(Huguenot)’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똘레랑스’의 유래인 것이다.

또 교회사적 영역 뿐 아니라 성경의 여러 구절을 통해서도 똘레랑스에 대해 가르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구약시대의 율법에서 고아와 과부를 보호하고 돌보라고 한 것이나 요한복음 13장 등에서 “서로 용납하고 사랑하며 섬기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 역시 똘레랑스 정신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10장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의 관계를 설명하며 서로 판단하거나 비판하지 말고 화목하라고 교훈하고 있는데, 이보다 똘레랑스의 진수를 더 확실히 보여주는 표현은 찾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 안에서 내가 어느 음식이든 먹을 수 있고 무슨 행동이든 다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약자들이 실족하고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 내가 가진 자유를 절제하며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하겠다고 선언하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똘레랑스의 본질을 가장 명확히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교회가 신앙과 세상에 대한 지경을 더욱 확장하고 현대 사회가 지닌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협소한 교리적 틀에 박혀 똘레랑스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문학, 철학, 역사학 등의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의 습득을 통해 똘레랑스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이를 신앙생활에 적용시켜 나가야할 것이다.

또 최근 IS의 테러와 난민의 증가 등으로 똘레랑스의 본고장 프랑스에서조차도 똘레랑스 정신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일수록 오히려 똘레랑스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믿는다. 작금의 위기는 과도한 똘레랑스 때문이 아니라 똘레랑스를 버려서 발생한 일이다. 부의 불공정한 분배, 자본과 자원의 독점 등이 무슬림들을 소외시켜 이들을 자꾸 난민으로 내몰고 IS와 같은 과격 테러단체에 가담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난민을 줄이고 IS를 격퇴하기 위해서는 미국과 유럽 사람들이 자신들만 배 부르려 하지 말고 중동, 아프리카 같은 가난한 지역에 더 많은 부를 분배하고 민주주의를 전파하여 이 지역 주민들도 윤택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똘레랑스 정신에 따른 공존과 이해만이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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