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신교 장로.' 이명박 대통령과 한완상 대한적십자사 전 총재가 공히 가진 별도의 직함이다. 하지만 최근 경색된 남북 관계에 대한 '두 장로'의 처방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이 대통령은 천안함 사태로 북한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대응까지 거론한 반면, 한 전 총재는 냉전적 대립 세력이 생산해낸 "적대적 상조 관계"를 문제로 지적하며 북한에 대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을 주문했다. 또한 이를 위해 수많은 한인 교회가 평화를 만드는 일에 힘써 줄 것을 당부했다.
적십자사 총재로, 통일부 장관으로 남북 교류에 힘 쏟아온 한 총재가 최근 한반도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6.15공동선언실천 미국위원회가 주최한 강연회 참석차 LA를 방문한 한 전 총재는 "현 정부 출범 이후 남북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절망적인 수준"이라고 진단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희망은 "예수의 정신"에 있었다. 아래는 강연회 내용과 평화의교회(김기대 목사) 주일 설교, 한 전 총재와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해 정리한 것이다.
'적대적 상조 관계'가 문제의 핵심
한 전 총재는 "적대적 상조 관계"를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했다. '전쟁불사론'까지 나돌고 있는 최근의 암울한 남북 관계를 빚어낸 적대적 상조 관계란 무엇인가. 두 체제 간에 긴장과 갈등이 고조되면 각 집단 안에 이득을 얻는 세력이 있기 마련인데, 이를 통해 자기 기득권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메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한 전 총재는 "그것을 꿰뚫어봐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한 간에 적대적 상조 관계가 강화되고 약화되는 역사가 반복되어 왔다. 두 집단 간의 긴장이 고조되면 권력이 강화되는 세력이 있다. 두 집단은 상대방을 주적이나 악으로 정죄하고 서로를 초전박살 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공식적으로는 서로를 정죄하지만 희한하게도 서로를 도와준다."
양쪽의 냉전 세력은 상대방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증오하지만, 적대적 의도와는 자신의 그토록 증오하는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 역설을 불러왔다. 서로 강경한 언행을 주고받는 사이 서로의 기득권은 공고해지고 두 집단 사이의 갈등은 깊어지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북한의 강경 세력 간에 적대적 공생관계가 흥하면, 온건 평화 세력이 발붙일 곳은 그만큼 줄어든다. 이런 상조 관계가 김대중 정부 때는 가장 약화됐다 이명박 정부 들어 극단적으로 강화됐다고 한 전 총재는 말했다.
"2007년 10월까지 남북 관계는 상당히 전망이 좋았다. 남북 간에 온갖 종류의 교류가 굉장히 활발했다가 2008년 12월에 침몰하기 시작했다. 현 정부 출범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1년 반 동안 남북 관계는 교착 상태로 빠지고 절망적인 수준에 이른 것 같다."
한 전 총재가 적대적 상조 관계를 부추기는 양쪽의 강경 세력의 실체를 인식한 것은 그가 김영삼 정부의 통일부총리를 역임하던 때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끈질기게 설득해 보복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기존 남북관계의 패러다임을 벗어버리고, 인도주의적 포용정책으로 방향 전환하도록 했다.
"김영삼 정부 이전까지 남북관계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보복의 악순환이었다. 문민정부는 새로운 발상으로 인도주의적인 포용으로 나가자며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다. '대통령께서도 장로님이니까. 새로운 비전으로 대북정책을 하자'고."
조건 없는 과감한 대북정책을 하자고 김 전 대통령에게 제안했던 한 전 총재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비전향 장기수 대북 송환을 추진했다. 1993년 3월 11일 우여곡절 끝에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씨를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날 그에게 돌아온 소식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이었다. 이에 적대적 상조 관계를 부추기는 냉전 세력은 보란 듯 한 전 총재를 공격했다.
'때문에 사랑'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해야
그런 점에서 한 전 총리 역시 적대적 상조 관계의 피해자 중 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포용 정책을 일관되게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한 전 총리도 북한을 주적이라 규정하는 데는 토를 달지 않았다. 다만 예수가 주적을 어떻게 대하라고 가르쳤는지, 왜 그렇게 말했을지 생각해보라며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대화 내용을 언급했다.
"북한을 원수고 주적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예수는 '주적'을 사랑하라고 했다. 왜 그렇게 말했겠나. 원수를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은 무력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때문에'가 있고 '불구하고의 사랑'이 있다. 때문에의 사랑은 보복적·응징적 사랑이지만 불구하고의 사랑은 높은 수준의 사랑이다. 불구하고의 사랑이 예수님의 사랑이 아닌가."
남북 관계를 ‘그러므로’의 논리로 풀지 말고,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자세로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과정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갈등 해결의 길이라는 것이 한 전 총재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런 점에서 한 전 총재의 판단 기준은 정치공학적 논리가 아닌 성경의 가르침이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에 연루되어 법정에 섰을 때도, 그는 "기독교 신자로서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한 바 있다. 이후에도 남북 관계에 대한 그의 해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수훈에서 비롯됐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중요한 메시지는 산상수훈이다. 8가지 복을 이야기했는데 그 복 중에 어느 복이 제일 큰 고하니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 것이 내 것이다. 그 복을 받은 사람이 누구냐. 평화를 만드는 자다. 여기서 화평케 하는 것은 'peace maker'다. 'peace keeper'와는 다르다. 'peace keeper'는 무력으로, 힘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선으로 악을 이겨야한 전 총재는 평화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길 때에만 '적대적 상조 관계'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선순환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전 총재는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까지 이어져온 햇볕정책 역시 선으로 악을 이기기 위한 선택이었다. 햇볕정책 덕택에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야릇한 기운을 녹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로 배려하는 것, 적대적 공생관계를 종식시킨 것이6.15선언이 준 효과다. 예전에는 '통미봉남'(通美封南)이었는데, 6.15선언 이후 봉남(封南)이 통남(通南)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통남통미'가 되면 3자(남한, 북한, 미국) 관계가 호전되는 길이 열리고,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가 정착되는 열매가 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기독교 근본주의 신앙에 냉전 근본주의 신념까지 결합되어, 특정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고 증오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다.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사회를 옭아맸던 철 지난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기세를 떨치는 곳 중에 하나가 교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 전 총재는 한반도 평화 정착이 어렵지만 그 가능성이 다 죽었다고 보지 않았다. 현재의 어려움은 냉전 세력의 정치적인 계산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계산은 오래 못 간다. 하지만 인도주의적인 계산은 오래간다. '사랑은 영원하다'고 성서가 말하지 않았나. 증오는 오래 버티지 못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 전 총재는 남북 관계 개선되려면 워싱턴의 정책 변화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오바마가 대통령 후보 때 상대방이 주먹을 풀면 우리도 악수할 것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제 노벨평화상도 받았으니 약한 사람의 주먹을 놓게 하려면 강자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미국은 독수리고 북한은 참새 같은 존재 아닌가. 오바마가 북한에게 손을 내밀 수 있도록 미주에 있는 한인들이 힘써 달라."
한 전 총재는 미주 한인들에게 '평화만듦이'로서의 삶을 당부하며 한인 교회에 대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LA에 교회가 참 많다. 교회가 많을수록 평화 만드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 교회가 많은데 평화 만드는 사람이 없고 증오만 만든다면 그게 교회인가? 물론 교회는 교회다. 하지만 예수님의 교회는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