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가 부르는데 엉덩이 긁적인 넌 빨갱이"
"애국가 부르는데 엉덩이 긁적인 넌 빨갱이"
  • 김명곤
  • 승인 2010.07.07 01:4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하수상한 시절에 되돌아보는 '20세기 최대의 스캔들'

"자, 여기들 좀 보세요,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이 뭔지 아십니까? 소련 스파이 노릇을 하는 빨갱이 국무부 관리 205명의 명단입니다 여러분!"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위스콘신 출신 상원 의원 조셉 매카시는 웨스트버지니아 휠링의 한 여성 단체가 주최한 연설회에서 호기롭게 외쳤다. '나비효과'를 불러온 불온한 역사의 서막은 이름 없는 작은 동네에서 이렇게 시작되었다.

▲ 1950년대 조작되고 왜곡된 자료를 통해 미국과 전세계에 빨갱이 광풍을 일으킨 조셉 매카시 의원(오른쪽)의 의회 청문회 광경. (공개역사자료)
1·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미국이 세계 재편을 목적으로 치열한 세력전을 펼치고 있던 차에 소련 스파이 빨갱이가 미국 행정부의 심장부에 득실거리고 있다니… 더구나 두 번의 큰 전쟁에서 자식 잃고 남편 잃은 일반 미국민들에게는 경악할 일이었다.

빨갱이 명단을 폭로하던 1950년 2월 당시에야 훗날 멀고 먼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 '매카시즘'이라는 레테르가 붙여져 수출되고, 그 나라에서 골동품적 가치로 그렇게 오랫동안 애지중지 추앙될 지 누군들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

매카시의 빨갱이 명단은 당시 미국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계, 학계, 산업계 등에까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이 파문이 퍼져나간 경로를 보면, 어떤 국가적 위기의식 앞에서 집단 무의식 또는 집단사고(集團思考)가 어떤 경로를 통해 형성되고, 그 앞에서 개인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이성적 존재가 되는지, 더 나아가 한 사회가 얼마나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는지를 여실히 알게 된다.

이 같은 경로를 이해하기 위해 당시 상황을 좀 더 풀어 보기로 하자.

참 희안하게도 매카시가 말하던 혐의자 수는 시간이 지나며 들쑥날쑥 했고, 심지어 명단이 어떤 경위를 통해 작성되고 입수되었는지 확인조차 되지 않았는데도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져가기만 했다.

극우 정치인들과 언론은 매카시의 폭로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매카시가 제시한 주요 증거 가운데 일부는 상원 조사관들에 의해 곧 사실무근으로 밝혀지기도 했지만, 맹목적 애국심에 충만해 있던 미국 사회의 분위기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증거'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 빨갱이 소동으로 작은 공구상 주인에 불과했던 로젠버그 부부를 비롯 수많은 사람들이 검거되어 처형당하고, 40년대 원자폭탄 제조를 지휘한 오펜하이머 박사마저 혐의자로 몰려 처벌을 받게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빨갱이 혐의'란 미국의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당시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던 애치슨 국무장관조차도 위험인물 1호로 지목되었을 정도였다.

빨갱이 사냥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른바 공직자의 사상을 검증한다며 '충성도 심사 프로그램'이 미 전역에서 실시됐고, 수많은 공무원과 교수들, 심지어는 연예인들까지 검거 되었다.

그 유명한 찰리 채플린도 이때 '빨갱이' 딱지가 붙여져 스위스 등지에서 자그마치 20년 동안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했다. <에덴의 동쪽> 등 여러 명작으로 유명한 엘리야 카잔 감독도 빨갱이 딱지로 고생했다. 디즈니랜드 설립자 월트 디즈니는 동료를 고발하고 살아남은 대표적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빨갱이 사냥은 실존 인물을 넘어 가상의 인물까지도 그 대상에 올려졌다. 미국민들이 그토록 사랑했던 소설 속 인물 '로빈 후드'가 빨갱이를 영웅화한 것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부자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준 로빈 후드의 행동은 영락없이 마르크스의 철학을 미화한 것이란다.

오죽했으면 <말타의 배>로 유명한 스타 험프리 보가트는 당시의 상황을 "(애)국가를 부르는 동안 엉덩이를 긁적인 사람은 모두 빨갱이 혐의를 받았다"고 희화적으로 묘사했을까. 말도 안 될 것 같은 일이 당시엔 말이 되었고, 후세 사람들은 이때의 빨갱이 소동을 가리켜 '20세기 최대의 스캔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처럼 온 세상에 빨간 물을 뿌려대며 기세를 부리던 빨갱이 소동은 의외로 싱겁게 막을 내리고 말았다. 붉은 세력을 막아낸다는 명분으로 치른 한국전쟁을 거치며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매카시가 이제는 미 군부까지 공격하다 오히려 덜미가 잡히게 된 것이다. 1954년 TV로 생중계 된 가운데 열린 36일간의 '육군-매카시 청문회'는 그가 지목한 빨갱이들의 무고를 밝혀낸 재판정이 되었다.

▲ 메카시 광풍에 휩쓸려 전기의자에 처형당한 로젠버그 부부. (공개역사자료)
당시 청문회를 목격한 나이든 미국인들에게는 두고두고 회자되는 유명한 논쟁이 있다. 청문회 막바지에 벌어진 이른바 매카시-웰치 논쟁이다. 매카시의 기세는 이 논쟁을 기점으로 완전히 꺾이게 되었고, 빨갱이 드라마의 종막으로 치닫게 된다.

청문회가 열린지 30일째 되던 날, 매카시는 육군 내부에 빨갱이가 우글거리고 있다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며 조셉 웰치 육군 법률고문에게 태클을 걸었다. 매카시는 빨갱이 혐의자 프레드 피셔라는 젊은 변호사의 후원자인 웰치를 향해 피셔가 대학생 시절 '좌파' 법률 단체에 관여한 적이 있다며 색깔론 공세의 폭을 넓혔다. 별 관련성이 없는 머나먼 옛일까지 그럴듯하게 엮어내고, 이젠 피셔를 후원하는 웰치까지 빨갱이 그물망을 넓히려 든 것이다. 그러나 웰치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의원님, 나는 이제껏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죄없는 젊은이를 난도질할 정도로 당신이 그토록 잔혹 무지한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스스로를 신사라고 생각합니다만, 당신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을 누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얼굴이 벌게지며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매카시에게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웰치는 다시 속사포처럼 퍼부었다.

"죄 없는 사람에 대한 정치적 살인 행위를 이제 그만 중단하시기를 간청합니다.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당신은 예의도 모르십니까?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겁니까?"

매카시가 우물우물 뭐라고 반박하려 들었으나 매카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뚜벅뚜벅 회의장을 걸어 나갔다.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전 미국을 수년 동안 불안과 공포, 불신 속에 잠기게 했던 '괴물'의 면전에 대고 속 시원한 소리를 내뱉은 신사에게 보내는 기꺼운 지지의 박수였다. 그간 청문회 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미국민들도 막판에 벼락같은 결정타를 가한 웰치에게 박수를 보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되었을 정도다.

결국 50년대 매카시 광풍은 군복무를 조작한 알코올 중독자이자 세상을 온통 빨간색으로만 보는 한 '색맹' 환자의 단순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 선동은 시류를 탄 언론의 '협조'로 마녀사냥식 집단사고(集團思考)를 만들어냈고, 이 집단사고는 개인들의 유기적 집합체인 사회를 엉뚱한 방향으로 뒤틀며 왜곡된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매카시는 청문회에서 자신의 병역 조작과 개인 비리까지 밝혀져 되려 탄핵을 당했고, 그 충격 때문이었는지 3년 뒤인 1957년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런데 그가 떠난 지 50여 년이나 지난 지금, 우리 땅에서는 아직도 매카시의 망령이 시퍼렇게 살아서 활개 치며 뒤틀린 역사를 이어가고 있으니 이를 어쩐다?

김명곤 / <코리아위클리> 발행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