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집회에 집착하는 한국 교회의 메커니즘
대형 집회에 집착하는 한국 교회의 메커니즘
  • 김성한
  • 승인 2010.08.04 05:43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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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예배와 하나님나라⑧ 누구를 위한 대형 집회인가

지난 6월 22일 나는 서울 상암 월드컵경기장에 있었다. 한국전쟁 60주년인 6월 25일을 앞두고 월드컵경기장에 성도들이 모여서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는데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다. 미국의 전직 대통령 조지 W. 부시가 평화기도회에서 간증을 한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고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을 죽고 다치게 한 책임이 있는 사람 아닌가.

만약 전직 대통령인 지미 카터를 초대했다면 이야기는 달랐을 것이다. 그는 남북관계를 비롯해서 세계 곳곳의 분쟁 지역에서 평화의 일꾼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부시가 간증하는 평화기도회에 참석하는 대신, 경기장 바깥에서 진행된 ‘다이인피스몹’(Die-in Peace Mob, 전쟁에서 죽은 이들처럼 바닥에 누워 시위하는 것 - 편집자 주)에 참여하기로 했다.

경기장 바깥에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거대한 월드컵경기장에서는 익숙한 찬양 소리가 들려 왔고, 피스몹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둘러싼 경찰들 너머로 바쁘게 지나가는 성도님들의 꾸짖는 소리가 이어졌다.

▲ 부시 초청 평화 기도회에 반대하는 기독인과 평화 활동가들이 '다이 인 피스몹'을 벌이는 모습.
잠실 올림픽경기장에 처음 가보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대학에 입학하면서 ‘88 꿈나무’ 소리를 들었던 내가 정작 서울 잠실 올림픽경기장에 처음 간 것은 올림픽이 끝나고도 한참 뒤인 1995년이 되어서였다. 월드 스타의 내한 공연이나 한일전 축구 경기 관람 때문이 아니었다. ‘Student Mission 2000 - 대학생 미션 2000’(이하 SM2000)이라는 집회 때문이었다. 굳이 십수 년 전의 이 집회를 언급하는 이유는 필자가 지금까지 참석해 본 집회 중 가장 큰 규모의 대형 집회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글이기는 하지만 CMI(국제대학선교협의회)의 김요한 목사는 ‘한국 대학생 선교자원 운동의 역사적 의미와 활성화 방안-미국 SVM 운동과 비교하여’라는 글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지난 1995년 GCOWE 서울대회 기간 중 5월 20일 올림픽경기장에서 약 8만여 명의 한국 기독 대학생 청년들이 모여 ‘대학생 미션 2000’ 대회를 가졌다. 이 대회는 GCOWE 서울대회에 참석한 180개국 4,500여 명의 국내외 기독교 지도자들의 큰 충격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것은 곧 한국 대학생 청년 선교운동의 무한한 잠재력과 세계 복음화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역사적인 Sign(사인)이었다."

우중 백문일답

어떤 의미에서 SM2000이 GCOWE(세계선교대회) 참가자들에게 ‘큰 충격과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SM2000의 모습을 조금 더 복기해 보자. 1995년 5월 20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토요일 오후, 올림픽경기장에는 전국에서 버스를 타고 모여든 대학생들로 북적였다. 운동 경기를 위한 공간이라는 특성과 쉬지 않고 내리는 비로 인해 음향 상태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소천하신 어느 노 목사님의 선창에 따라 함께한 백문일답(百聞一答)이다. 목사님이 하는 모든 질문에 ‘예수 그리스도’라고 답하는 시간이었다. 수천 명의 GCOWE 해외 참가자들에게 혹시 이런 모습이 큰 충격이었을까? 그러나 과연 이 집회가 어떤 근거로 “한국 대학생 청년 선교운동의 무한한 잠재력과 세계 복음화의 가능성을 확인하는 역사적인 Sign”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뚜렷한 내용이 없는 대규모 집회였기 때문이다. 비오는 토요일에 8만 명이나 모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빗속에서 외친 백문일답이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확인시켜 주는 강력한 증거가 될 수 있었을까? 집회가 끝나고 학생들과 춘천으로 돌아오는 길은 허전하고 불편했다. 특히 간사의 입장에서 바쁜 아이들을 설득하고 ‘동원’해 서울까지 끌고 왔기에 미안한 마음이 컸다.

모든 집회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모든 집회는 그냥 저절로 되지 않는다. 대형 집회는 더욱 그렇다. 누군가가 앞서 기획하고 준비했을 것이다. 예상되는 참석 인원을 수용하기에 적절한 규모와 일정이 맞고, 규모도 적정한 장소를 찾았을 것이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사와 출연진을 섭외하고, 음향‧조명‧영상과 같은 하드웨어를 결정했을 것이다. 그리고 필요한 재정을 조달할  방안을 강구하고, 집회를 알리기 위한 홍보와 인원 동원에 대한 계획들을 세웠을 것이다
 
문제는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이런 대형 집회를 기획하고 진행하는가다. 치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한 이벤트로서의 대형 집회를 넘어서 묻고 따져봐야 할 더 근본적인 질문들이 있다.  단지 사람들을 많이 모았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 시청 앞에 모여서 세를 과시하려는 대형 집회라면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공포심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옳은 것인가? 평화기도회에 부시를 초대하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는 심하게 왜곡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 그것이 좋은 것인가?

대형 집회에는 명확한 장점과 단점이 있다. 그리고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이 발생하는 비용을 비롯해 생각하고 따져 봐야 할 것은 많아진다. 예를 들어 규모가 커질수록, 참석 인원의 확보, 홍보와 동원의 문제는 계속 커지게 된다. 순수한 자발적 참여로 자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권하여’ 그 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교회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15년 전 SM2000이 후회스러운 기억으로 남는 것은 몇몇 학생 선교단체들과 연합하여 이 대회를 준비했기 때문이다. 5월의 SM2000을 앞두고 춘천 지역의 선교단체들은 이 대회를 위한 준비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졌다. 물론 준비 모임의 대부분의 논의는 홍보와 동원에 대한 것이었다. 대부분의 대형 집회들은 이와 같은 연합 운동의 형태를 띤다. 문제는 그 집회가 지향하는 가치와 내용에 동의하지 않으면 종종 연합을 깨는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소도시나 대학 캠퍼스와 같이 계속 얼굴을 봐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입장과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연합의 요청은 거절하기 힘든 부담으로 다가올 때가 많다.

누구를 위한 대형 집회인가

한국 교회는 체육관, 시청 앞 광장, 선교지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많은 대형 집회들을 열었다. 그토록 많은 노력과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대형 집회를 개최하려는 목적은 무엇일까? 대형 집회를 선호하는 우리 안에 내재된 보이지 않는 메커니즘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한국 교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대형 집회의 기반이 되는 ‘부흥회적인 신앙 형태’를 선호해 왔다. 부흥회적인 신앙 형태는 구한말 조선을 찾았던 미국 선교사들의 대다수가 학생자원자운동(SVM : 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SVM은 18~19세기 미국의 대각성 운동과 대부흥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형 집회들을 알리는 홍보물과 관련된 기사들을 살펴보면 ‘영적 대각성, 대부흥’과 같은 단어와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 한국 교회는 2007년 한 해 동안 곳곳에서 ‘Again 1907’을 외치며 평양대부흥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했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것처럼 2007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2007년을 보내고 내린 결론은 대부흥은 성령의 역사로 인한 결과이지, 대부흥을 위한 물리적 여건을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성령께서 역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그날 관중석에 앉아 내가 본 것은 초대형 집회 형태로 자신이 지향하는 신앙의 가치를 최대로 확장시킨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다.
마음 속 우중 백문일답

6월 22일 오후, 경기장 바깥의 상황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갈 무렵, 경기장 안에서 기도회를 막 시작하려 했다. 바로 조금 전까지도 시위 진압용 방패와 굳은 얼굴의 경찰들이 험한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경기장 입구에는 환한 얼굴로 맞아 주는 대학생 형제자매들이 있었다. 난 그들의 안내를 따라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버스를 타고 속속 도착한 성도님들은 인솔자들과 함께 이미 정해져 있는 교회별, 교구별 좌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경기장 한복판에는 대형 태극기가 놓여 있었고 기도회 순서지의 마지막 면 역시 태극기가 인쇄되어 있었다.

그날 관중석에 앉아 내가 본 것은 초대형 집회 형태로 자신이 지향하는 신앙의 가치를 최대로 확장시킨 한국 교회의 모습이었다. 각지에서 교회 버스를 타고 와서 객석을 메운 성도들, 경기장을 가득 채운 음향, 대형 화면으로 펼쳐지는 방송사들의 중계 화면, 현직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와 초강대국 전직 대통령의 간증, 수만 명이 동시에 수용되는 훌륭한 경기장 시설 속에는 어린양에 대한 충성보다는 태극기로 상징되는 국가주의에 대한 한없는 지지, 분단 체제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샬롬에 대한 확신보다는 잊지 말아야 할 우방국의 은혜가 더욱 크게 보였다.

아주 잠깐이지만 로마의 황제가 주재하고 있는 거대한 승전 의식에 참여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도 내 마음은 잔뜩 흐리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는 우중 백문일답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물어 봐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이런 대형 집회는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김성한 / 한국 IVF 미디어 총무 간사  

* 이 글은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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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 2023-04-22 13:51:28
알바 얼마 받았나요?
꼭 그래야 했냐?

돈키호테 2023-04-22 13:49:59
부칸주민 굶어 죽는데 부칸정권에 쌀 보내 주어야 한다는 꽁산나부랭이들이 안타깝습니다.

돈키호테 2023-04-22 13:48:33
부칸정권에 아부해야 진뽀라고 생각하는 멍총한 뽈갱이 알바들이 안타깝습니다.

과객 2010-08-04 22:53:02
대형 교회를 지향하면서, 교회, 신학교 등 단체에 돈을 제공할 줄 알아야 큰 목사로 인정을 받는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욱 더 큰 교회의 필요성이 부각되는거지요. 그러나 큰 교회를 이룬 목사님들은 보편적으로 신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분들입니다. 단순히 성공 지향적이고, 은혜를 강조하면서 책임의 부분은 소홀히 가르치는 분들입니다. 조 목사님, 김목사님이 그 예가 되겠지요. 자기 변화와 삶 속의 책임을 소홀히 여기는 은혜의 복음은 교회와 성경을 값싼 것으로 떨어 뜨립니다.그러나 이런 길을 좁고 혐착하여 찾는 이가 적은 것이 사실입니다. 교회와 말씀을 대중에 맞추어 설교하는 현실이 개혁되지 않으면, 교회는 외적으로 성장하면서 욕먹는 현실이 부끄럽고 안타까울뿐입니다. 개혁 정신 또는 큰 교회 목사님 눈치 보느라고 기를 펴지 못하는 것이 사실 아닐까요? 어찌해야 할까요? Lord, what shall we 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