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만능주의'란 껍데기는 가라
'믿음 만능주의'란 껍데기는 가라
  • 정용섭
  • 승인 2010.08.22 02:0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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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정용섭 목사의 신학단상(11) 믿음 지상주의란 불신앙

한국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되고 있는 믿음을 무시하라는 말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선 바울이 믿음에 대해서 뭐라고 말했는지를 알면 필자의 주장이 그렇게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 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고전 13:2) 무슨 말인가?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어떤 전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의미가 있지 그렇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뜻이다. 그 전제 조건은 하나님의 존재론이라 할 사랑이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아름다운 언어로 사랑을 예찬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사랑이 모두 드러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거기서 설명하고 있는 것뿐이다.

여기서 우리 기독교인이 사랑을 말할 때 조심해야 할 대목이 있다. 사랑은 낭만도 아니고 자기도취도 아니고 자기연민도 아니다. 사랑은 바로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에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한다면 사랑도 아직 전체적으로는 알지 못한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사랑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중심으로 한 예수 사건에서 우리가 선취적으로 맛보았고 그렇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 자리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만하고, 하나님이 바로 믿음의 전제조건이라는 사실만 확인하도록 하자. 그러니까 바울의 말은 산을 옮길만한 믿음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아마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자신들은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이다. 자신들의 믿음은 곧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말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믿음을 말할 때 하나님보다는 그 믿음의 주체자인 인간을 강조한다. 그래서 믿기 힘든 것까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얼마나 큰 불신앙인가?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의 모든 믿음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바울의 말을 기억한다면 청중들에게 믿음을 억지로 강요하는 것은 불신앙이다. 그런데도 설교자들이 설교 중에 '믿습니까?' 하면서 믿음을 강요하고 있다. 만약 하나님을 바르게 전하기만 하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이 청중들은 자연스럽게 믿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믿습니다!'를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믿기 힘들다는 불안이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을만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다는 말이다.

지금 한국 교회의 현장에는 공허한 믿음만 양산되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의 심리적 작용을 믿음으로 착각한다는 뜻이다. 이런 방식의 믿음은 모든 사이비 이단들에게서 훨씬 강력하게 나온다. 정통 기독교가 통일교나 전도관이나 JMS와 경쟁하자는 말인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믿음을 무시해야 한다.” 하나님을 단지 세례문답의 차원에 고착시켜놓고 사람들의 심리만 자극해서 믿음만 키우려는 기독교의 근본 태도를 교정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선교의 비전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른 자세로 진리에 대해서 알고 싶은 사람들은 믿음 만능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믿음을 우습게 볼 것이다. 반대로 무당과 점쟁이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수준에서 기독교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있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계속 이런 믿음 일방주의로 나가도 되겠지만 인간, 세계, 역사, 모순, 깊이, 시간, 죽음, 종말 등등, 이 많은 삶의 심연을 책임 있게 생각하는 지도자라고 한다면 결코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제시한 '오직 믿음'이라는 말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루터의 말은 업적주의에 대한 반론이었지 믿음 지상주의는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된 청중을 대상으로 산타클로스를 믿으라고 강요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서 그런 믿음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소외시키고 있다. 그리고 광신자들끼리만, 또는 믿지 못하면서도 믿는 척하는 위선자들끼리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을 뿐이다. 필자가 보기에 이런 믿음은 껍데기다. 껍데기는 가라.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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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co1875 2010-09-02 14:46:31
목회자이기 때문에 해야하는 설교라면 내용없는 믿음을 강조하겠지요. 그러나 영혼에 대한 사랑이 담긴 설교라면 분별없는 믿음 타령은 하지 않겠지요. 그러나 인격은 훌륭하지만 표현을 잘하지 못하는 사역자도 보았습니다. 분석하고 파헤찰려 하지 말고 그 분을 위해서 기도해주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achoi 2010-08-27 11:58:38
지금의 교회공동체가 제대로된 믿음을 고백하는지 이런글로도 충분히 반성할 수 있도고 봅니다.

이선봉 2010-08-24 12:09:44
정용섭 목사의 신학적 오류는 곳곳에 그의 문장에서 쉽게 드러난다.
12행의 "사랑은 바로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에" 라는 그의 주장은 엉터리다.
어떤 근거로 그는 사랑이 하나님 자체라고 주장하는가?
이 문장으로 이 사이비 엉터리 신학이 그대로 증명되고 있다.

성서는 하나님이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사랑이 곧 하나님 자체라는 주장은 정용섭이라는 개인의, 그래도 신학을 했다는
근거없는 주장일 뿐이다.

뉴조는 이 점을 명심하고 기사를 실었으면 한다.

마태5 2010-08-24 07:36:20
목사님이 비판하시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인 것 같습니다.
그러한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믿음’이 왜곡된 것이 사실이고 또 그로 인해 교회가 부정적으로 비쳐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독교의 핵심 개념인 ‘믿음’까지 싸잡아서 부정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라고 목사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진리를 가장 잘 담고 있는 말씀 중 하나가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아가 8:6)
라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의 실체와 힘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사랑’도 볼 수 없지만 그것의 실체와 힘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일부’ 있습니다. ‘모두’가 아니고 ‘일부’인데, 이 일부의 사람들이 그 ‘하나님-사랑’을 볼 수 있는 힘,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고 하는 게 아닐까요?

믿음은 ‘하나님-사랑’, 곧 실체이며 힘이신 예수님이 복음서 곳곳에서 누차 강조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딘가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