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밟기 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땅밟기 운동’을 다시 생각한다
  • 김동문
  • 승인 2010.11.07 03:25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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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복음 선포, 일방주의 아닌 인격적 만남과 소통으로

봉은사 땅밟기 동영상 파문이 일어난 지도 2주째로 접어든다. 동영상 작업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된 관계자들이 봉은사를 찾아 사과를 하고, 봉은사에서 사과를 수용하는 등의 과정을 지나면서 표면적으로는 이 파문이 종결이 된 듯하다. 그러나 정작 기독교 공동체는 이 파문을 둘러싼 이슈에 대해 적극적인 토론이나 신학적‧사회적 반성과 담론을 형성하는 것에 민감하지 못했던 것같다. 이슈를 선점하기보다는 끌려 다니는 인상이었다. 이 글은 이미 여러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문제 제기를 하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있지 않다. 뒷북을 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땅밟기 운동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을 촉구했던  것을 돌아보며 짧은 글을 옮겨 본다. 깊이 있는 고민을 담은 것이 아니라 필자의 개인적인 단상을 옮긴 것이다.

땅밟기 운동, 어떻게 시작되었나

봉은사 땅밟기 동영상 등의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선포’와 ‘결박’, ‘대적 기도’라는 것이다. 잠시 그 유사한 모양을 갖고 있던 기독교 운동을 떠올려보자. 80년대에는 캠퍼스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예수 대행진이라는 기독교인들의 문화적 표현이 있었다. 캠퍼스 찬양 문화도 존재했다. 이 당시의 찬양과 대행진은 기독교인들의 자기 고백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문화적 대안 운동 성격이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움직임의 실효성에 대한 평가는 다양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성시화운동’이나 대규모 집회 같은 것이 있었다. 이 당시의 이런 움직임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자기 고백적 경향이 더 강했다고 할 수 있다.

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며 큰 전환점이 있었다. 선포와 결박 운동이 좀 더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양상으로 변하고, 영적전쟁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캠퍼스와 특정 사회와 비기독교인들을 미혹의 영, 음란의 영, 불순종의 영 등 다양한 이름의 어두운 영들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흐름이 커졌다. 그 영들을 대적하고 결박하는 적극적인 대응 형태로서 땅밟기 기도, 땅밟기 선교 등이 보다 일반화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런 흐름은 그 시절 유행하기 시작했던 피터 와그너 등 신사도주의, 세대주의 경향의 저술가들과 인사들에게 큰 도전을 받은 것 같다. (글의 전개를 위해 편의상 땅밟기 운동이라고 적고자 한다.) 그 기본적인 태도는 이념적으로는 친이스라엘과 반아랍 또는 반이슬람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우월주의, 한국 기독교 선민주의 같은 경향으로도 비춰졌다.

땅밟기 운동은 국내는 물론 이른바 해외 선교지에서 더 적극적으로 표출되었다. 2000년대 들어서면서 카자흐스탄에서 있었던 실크로드 2000, 2004, 2005년의 예루살렘 평화대행진, 2006년의 아프가니스탄과 이집트에서의 대행진(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등이 한국 교회 안팎에 노출되었다. 대규모 인원이 참여했으나 노출되지 않은 땅밟기 운동도 많았다. 터키에서, 요르단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에서 그리고 다른 이슬람 지역에서 일어났다. 이슬람 사원 주변을 돌면서, 때로는 사원 안에서 선포와 결박의 찬양과 고백이 드려지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을 주도하거나 큰 영향력을 끼친 단체들이 있었다. 80, 90년대 찬양 운동을 주도했던 공동체와 A 선교단체와 B 단체 등이 대표적이다. “이 땅의 악한 영들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결박될지어다. 결박될지어다. … 주여, 이제 일어나소서, 일하소서, 모든 주권이 주께 있나이다…”는 식의 고백이 뒤따랐다.

땅밟기 운동의 근거에 대한 비판과 평가

이런 주장을 하거나 운동을 하는 이들의 성경적‧신학적‧현장 사역적 이해에는 비판과 평가가 필요할 것 같다. 땅밟기 운동을 펼치는 이들의 성경적 근거를 말하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땅밟기 방식으로 여호수아의 여리고 성 돌기가 애용된다. 그러나 여리고 성 돌기가 땅밟기를 정당화시켜 주는 성경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성 돌기의 가장 큰 특징은 침묵이었다. 일주일간의 성 돌기 과정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침묵이 강조되었다. 혀끝 하나 놀리지 말라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지시가 뒤따랐기 때문이었다.

영적 대결과 지역 영들을 둘러싼 해석과 대응을 둘러싼 해석과 적용에도 다른 시각이 존재한다. 땅밟기 운동은 해외에서 이슬람권과 깊이 연관되어 표출되고 있다. 그 내면에는 ‘백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주장에는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이르면 예수님의 재림이 완성되는데, 예루살렘 주변에 57개의 이슬람 국가가 장애물로 자리하고 있다, 이 이슬람의 견고한 진이 깨뜨려져야 예루살렘까지 복음이 이를 수 있다, 우리가 그 땅의 악한 영들을 대적하고 결박함으로 예수께서 일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루살렘 주변의 이슬람 국가들이 복음의 불모지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2000년의 전통을 이어온 교회들이 존재하며,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복음 활동이 전개되고 있다. 이슬람 세계를 표현하는 영적인 표현에는 모든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진다. 음란과 미혹과 불신의 영 등. 그러나 이런 표현이 정당하다면, 이슬람권보다 더 음란하고 미혹과 불신이 가득 찬 곳은 많다. 유럽 기독교 사회도 이런 면에서 만만치 않다. 균형의 고민이 필요한 대목이다.

선포와 결박을 둘러싼 고민에 앞서 우리에게는 성육신과 동화에 대한 고민이 더 필요할 것 같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리고 성경 속의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행동을 통해 배워야 할 것들이 있다. 성경 속의 땅밟기는 관계 맺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과 선지자들의 선포는 일방적이고 비인격적 방법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하늘에서도 큰 권능으로 선포할 수도 있었던 복음의 메시지를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하신 하나님의 방법은 성육신과 동화였다. 이것은 인격적 관계 맺음이라 말할 수 있다. 복음을 일상 속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배려한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성경은 다문화‧다종교 상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집트의 다신 숭배 문화는 물론 메소포타미아, 가나안 등이 다종교였으며, 예수님 시대도 다문화‧다종교 사회였다. 심지어 황제와 통치자가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당시 다른 종교 집단이나 다른 종족과 민족을 향한 배타적 행동을 지지하지 않았다. 로마 신전이나 황제 가이사 신전을 대적하는 집단행동이나 이른바 영적전쟁을 벌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공동체 내부의 우상숭배와 이교도적 행동과 태도에 대한 신랄한 자기비판과 개혁을 향한 목소리는 강경했다.

복음 선포, 일방주의 아닌 인격적 만남과 소통으로

선포는 인격적인 만남과 소통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은 일방주의가 아니다. 복음은 인격을 통해 전달되는 것 같다. 그것도 상대방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과 형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땅밟기 운동의 맹점 가운데 하나는 이원론과 이분법적인 생각이다. 물론 선한 것과 악한 것이 존재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 생각과 내 편은 옳고 정의로운 하나님의 사람들로 여기지만, 자신이 속한 그룹을 반대하거나 맞서는 집단을 악의 축처럼 취급하기에 빚어지는 지나친 배타성과 '무례함'이다. 가까이 했던 베드로조차 악의 축, 사단이라고 독설을 퍼부을 정도였던 예수님의 과격성을 눈여겨 봐야한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경향을 보이는 이들에게서 느끼는 무한한 무책임성이다. 모든 것이 악한 영들의 궤계나 방해나 도전으로 치부하는 경향들은 공동체 내부의 행동이나 태도에 대한 냉정한 비판과 성찰을 방해한다. 선한 것, 잘한 것은 자신들의 공로이고, 나쁜 것은 악한 세력 탓이라는 생각을 한다. 선포는 믿음의 표현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일상 속에서의 삶의 열매가 뒤따르지 않는 선포는 그저 말일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과 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열의와 투지에 의해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치열한 삶을 통해 이뤄져 가는 성육신과 동화라는 측면이 있다. 입으로 이 땅과 이 민족과 온 세상 민족과 족속과 나라를 다 하나님께 돌려 드린다고, 돌려 드렸다고 선언하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일상성의 회복과 인격적 삶이 필요하다. 예수님 시대는 물론이고 구약과 신약 시대, 사도 시대와 초대 교회 시대를 막론하고 다종교‧다문화‧다민족 사회 속에 교회는 존재했다. 하나님나라 확장은 열린 믿음의 공동체,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함께할 수 있었던 공동체의 역동성과 삶의 진정성, 실천력을 통해 이뤄진 측면이 크다.

문득 팔복 설교를 하시던 주님과 산상수훈의 설교를 듣던 공동체,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광야 식탁 공동체를 떠올린다. 허다한 무리들, 다양한 곳에서 모여든 다양한 족속들이 그 대상들이었다.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베레아)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마태 4:25, 5:1) 하나님나라는 기독교 왕국이 아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기독교인만으로 이뤄지는 공동체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고백적 삶이다.

김동문 / 목사‧<복음과상황> 편집위원

* 한국의 <복음과상황>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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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하세요 2010-11-25 04:18:58
요즘 미주 한인교회에 침투하여 땅밟기를 종용하는 선교단체가 있다. 그 선교단체의 이름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이 잘 알 것이다. 교회에 들어와 선교교육을 시킨 후에는 중동으로, 중앙아시아로 땅밟기 하라고 하면서 막 보내려고 한다. 또한 따로 모집하여 보낸다. 그 땅에 가서 땅밟기를 하고 온다면, 그 땅에 하나님나라가 이뤄진다고 하면서 자꾸만 가라고 한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진한 교인들은 거기에 호응하여 떠난다. 미주 한인교회들은 땅밟기를 종용하는 그 선교단체를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멀리 해야 한다. 안그러면 제 2 아프카니스탄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

선교방해하는 인터콥 2010-11-24 03:47:02
중국 티벳지역에서 있었던 일

인터콥 단기선교팀들이 들어와서 전도지를 신나게 뿌려놓고 갔습니다
열정에 사로잡혀서 눈물 뿌리며 뿌렸겠지요?
찬양도 힘차게 하며 땅도 쾅쾅 밟았겠지요?
그렇게 일을 벌여놓고 그들이 떠나면
중국 공안당국에서는 그 전도지를 회수하고
인근의 한국인 선교사들을 소환함
전도지 뿌린 팀이 어떻게 들어오게 됫나를 추궁하고,
아무 관련이 없는 선교사 하나 지목하여 추방시킴

더 심각한것 2010-11-24 01:26:09
최바울씨가 지금은 귀신론 베뢰아를 떠났다곤 하지만
거기서 젊은날에 영향받은 것들은 결코 무시할 수 없음.
최바울과 김기동의 관계성은 두고 두고 지켜 볼 필요가 있을 듯 함.

최바울씨가 쓴 "영적도해"란 책의 앞부분에 보면, 그러한 냄새가 물씬 풍김. 김기동씨의 사상과 비슷함을 볼 수 있음

미주한인교회들에게 2010-11-24 01:01:01
한인교들은 인터콥을 제대로 알아야 함
1. 인터콥은 선교한국에서 4가지 이유로 제명 됨
회비 안내서 제명된 게 아님(물론 포함) 그 외 4가지 중요 이유 때문에 제명 됨. 4가지 이유는 선교한국에 물어보면 알수있음
2. 예장합동조사단으로부터도 조사 받고, 문제점을 시정하겠다고도 약속. 그러나 고치지 않고 있음
3. KWMW(한국세계선교협의회)에서도 경고 받음
그들은 위의 사항을 다 말하지 않고, 회비 안내서 제명됫다 함

경계이유 2010-11-24 00:54:32
한인교들은 인터콥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1. 인터콥은 선교한국에서 4가지 이유로 제명 됬음.
회비 안내서 쫒겨난 게 아니라(물론 포함) 그 외 4가지 근본 이유 때문에 제명됬음. 4가지 이유는 선교한국에 물어보면 알수있음
2. 예장합동조사단으로부터도 조사 받고 자기들의 잘못을 시정하겠다고도 약속했음. 그러나 고치지 않고 있음
3. KWMW(한국세계선교협의회)로 부터도 경고 받았음.
이걸 볼 때 멀리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