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주의의 함정에 빠진 한국 교회
보신주의의 함정에 빠진 한국 교회
  • 최태선
  • 승인 2019.07.1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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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교회 세습의 불법성에 대한 총회 재판국의 결정이 연기되었다. 이를 놓고 설왕설래 말이 많다. 나는 갈멜산의 이스라엘이 떠오른다. 엘리야는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에게 물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질문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가운데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은 현실을 직시한다. 아합과 이세벨이 두려운 것이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는 결정을 연기한 총회 재판국 목사들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들은 모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평생을 두루뭉술한 자세로 목회를 해왔다. 목회란 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목회를 이해상충으로 인한 갈등을 피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려 깊고 노련한 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보신保身이다. 자신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말이다.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지 못하고 결정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판결 이후의 문제를 더 염두에 두기 때문이고 이번 경우는 어떤 결정을 내놓더라도 모가 나기 때문에 미룰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안위 때문에 결정을 미룬 것이다. 우리는 보신이 된 목회의 실상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목회는 보신이 된지 오래다.

이것이 치명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성공한 목사들을 보라. 처신이 매우 신중하다. 물론 목회란 기본적으로 사려 깊어야 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경우라도 분명해야 할 때가 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기도가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때는 당연히 그래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결코 모호하지 않다. 하지만 오늘날 목회는 개인의 이익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모호하다. 보신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보신이 우선이 된 목회로 양육된 신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는가. 우문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성공 불신실패’의 설교에 10만 명씩 모여든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모인 사람들이 세습을 불의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불의를 보고 돌아 나올 수 있겠는가. 그걸 기대하는 사람들이 이상한 사람들이다. 방법이 없다. 설사 세습이 불법이라는 결정이 나오더라도 그들에게는 대수로울 수가 없다. 애초에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는 보신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다 나 잘살자고 믿는 것이 아니던가.

예레미야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제사장과 서기관과 선지자가 다 한 통속이 되어 말씀을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쉽게 마실 수 있도록 물을 탐으로써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들은 여전히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시대의 지도자들이 역겨운 일을 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고 꾸짖으신다. 과도한 욕망이 영적인 무감각을 낳은 것이다. 그러나 돌이킬 줄 모르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진멸이다.

 그러면 보신주의라는 함정에 빠진 이들은 명성교회뿐인가. 총회 재판국뿐인가. 세습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은 보신주의로부터 자유로운가.

유감스럽지만 나는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세습이라는 불의가 행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보신주의에 빠진 목사와 교인들에겐 필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예수성공 불신실패’라는 견고한 디엔에이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겐 백약이 무효다. 어떤 말을 해도 우이독경이다. 그들은 예레미야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그들을 내버려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니느웨와 같이 돌이켜 회개하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의 불의를 지적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의 불의를 진멸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그들의 불의를 볼 수 있는 사람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불의를 보고 진리의 길을 걷는 것이다. 자신도 그들처럼 보신주의라는 함정에 빠져 진리의 길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확인하고 보신주의와는 반대의 길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그런 자신을 합리화하는 길은 책임전가이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불의를 지적하는 일에 집착하는 것은 바로 그런 책임전가가 될 수 있다. 명성교회가 세습을 철회하는 일도 없겠지만 철회한다고 해서 그 교회가 바로 서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예수성공 불신실패’라는 보신주의의 함정에 깊이 함몰되어 있다.

어거스틴은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진리를 피하면서 찾고 있었다'고 말했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회심하기 이전의 어거스틴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찾는다고 하면서 진리를 피한다. 한사코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면서 진리를 찾겠다고 ‘예수성공 불신실패’라는 보신주의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여정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는 일도,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는 일도, 그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는 일도 우리의 욕망이 끝까지 거절하는 지난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용기 있게 도전할 때 우리는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주님을 만나고, 우리 속에 역사하는 그분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불의를 보고 분노하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있어 고맙고 감사하다. 그분들에게 보신주의의 함정에 빠진 오늘날의 기독교의 절망적인 모습을 보고 보신주의에서 벗어나 십자가의 길을 걷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그것이 오늘날 부패하고 타락한 교회를 바로 세우는 첩경이라고 믿는다.

최태선목사 / 본지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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