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거부하는 예수의 길, '비움의 여정'
그리스도인들이 끝까지 거부하는 예수의 길, '비움의 여정'
  • 최태선 목사
  • 승인 2019.07.22 12:31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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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기독교 신앙이란 가난해지는 것이라는 말을 한다. 하나님 나라 운동은 가난해지기 운동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있어도 가족 때문에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는 드리던 예배를 멈추고 새 부대가 되고자 새로운 시드멤버를 찾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문 앞에서 기꺼이 가난해지려 하는 이들로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예수에 미친 사람이 되자는 내 글에는 동의하는 분들이 제법 있다. 하지만 가난해지자는 글에는 동의하는 사람이 없다. 생각을 해보자. 예수에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님처럼 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소크라테스에 미치면 소크라테스처럼 된다. 방탄소년단에 미치면 방탄소년단처럼 된다. 그러니까 예수에 미치면 우리는 예수처럼 되어야 한다. 하지만 예수에 미치겠다는 사람은 있어도 예수처럼 된 사람은 보기가 어렵다.

나는 프란치스코와 권정생을 좋아한다. 프란치스코는 움부리아의 작은 예수라 불렸다. 그런 그가 작은 예수로 불린 이유는 그가 예수를 닮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일상에서 예수와 같은 삶을 살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런 그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인가. 가난이다. 그는 가난과 혼인하였고 평생 청빈을 삶의 모토로 삼았다.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그리스도처럼 되고자 기꺼이 가난을 택한 것이다.

권정생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삶 역시 가난을 특징으로 한다. 그는 시골 작은 교회의 종지기였다. 그의 몰골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그는 그의 동화 <강아지 똥>에 나오는 강아지 똥과 같이 비루한 삶을 살았다. 폐병에 걸렸어도 치료 한 번 제대로 받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에 보니 그의 통장에는 십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있었다. 계속해서 들어올 판권 역시 큰돈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돈을 사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가난뱅이로 살았다. 그 역시 그리스도처럼 되기를 원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우시고 이 땅에 오셨다. 그리스도인 가운데 이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을 ‘케노시스’라 한다. 그렇다. 분명 기독교 안에는 비움의 신학이 있다. 예수처럼 되려면 가장 먼저 모든 것을 비워야 한다. 그분이 비운 것은 단순히 재물만이 아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비우셨다. 나는 그분이 전지전능함을 비우셨다고 말한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근본적으로 비움의 길이다.

얼마 전 여행에서 나는 그것을 실감했다. 일주일이 지나 돌아올 때가 되었을 때 우리는 각자 사용하던 남은 돈을 모아 다 사용했다. 나는 작은 액수의 돈 몇 장을 주머니에 남겼다. 지극히 보잘것없는 분들을 위한 준비였다.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했을 때 내겐 남은 말레이시아 돈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그 일이 사실 쉽지 않았다. 동전 하나 남기지 않으려면 신경을 써야 한다. 물론 권정생 선생처럼 남은 돈을 다 기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서 다 나누고 한 푼도 남기지 않는 게 더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분은 실오라기 하나 남지 않은 알몸이셨다. 그분은 그렇게 당신의 비움을 완성하셨다. 살 한 조각, 피 한 방울 그분은 남기기 않고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비우셨다.

그렇다. 기독교 신앙은 비움의 여정이다. 

사람들은 내가 가난에 대해 말하면 아브라함을 예로 들며 내 말에 시비를 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삶을 면밀히 살펴보라. 그 역시 비움의 삶을 지향했다. 재물은 계속해서 그에게 복이 아니라 화가 된다.

아브라함이 되기 전 아브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것이 롯이었다고 생각한다. 롯은 그의 뒤를 이을 계승자였다. 당시 고대 근동의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후사였다. 바로에게 행한 열 가지 재앙의 마지막이 장자의 죽음이었다는 사실 역시 이것을 입증한다. 아브람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후사였던 롯과의 결별은 재물 때문이었다. 재물이 끊을 수 없었던 두 사람을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없다. 나 역시 지금까지 그런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다. 재물이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선입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롯 역시 재물을 택한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창13:9-11)

롯은 망설임 없이 물이 넉넉한 땅,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요단 지역을 택한다. 재물을 택한 것이다. 재물 앞에서 그동안의 아브람의 사랑 같은 것은 헌신짝처럼 버려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재물이 두 사람을 완전히 갈라놓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사람 역시 보지 못했다.

더 중요한 사실이 남아있다. 재물을 선택한 롯의 결과를 보아야 한다. 결국 그는 멸망하는 소돔을 떠나야했다. 그곳에서의 삶 역시 부정적이었다는 사실 역시 당연하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겔16:49-50a)

롯과 그의 딸들에게 있었던 것은 풍요함과 게으름과 그로 인한 거만함과 가증함이었다. 이것이 재물을 선택한 결과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나도 안다. 경제가 모든 것이 되고, 자본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에서 재물을 포기하고 가난해진다는 것은 자살행위로 인식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길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도 잘 안다. 그리스도인의 완성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달려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다. 나는 니힐리스트도 마조히스트도 아니다. 남보다 더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처럼 살고,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비움의 길을 걸으며 함께 그 길을 걸을 동료 그리스도인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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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효... 2019-07-26 16:02:41
무소유를 주장하시는건가요?
물론 물질이 우상이 되면 안되지요.
하지만 예수믿는 사람은 가난해져야 한다는 주장은 비성경적입니다.

장인욱 2019-07-24 10:10:28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