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건 예수, 따르는 건 세상?"
"믿는 건 예수, 따르는 건 세상?"
  • 최태선
  • 승인 2010.12.20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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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최태선 목사의 평화의 사람들, ‘동경이 나를 이끈다’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는 성경 다음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많이 읽은 책이라고 합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인 이 책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단순한 것이고 진정한 재산은 남에게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부드럽게 표현하면서도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존재들입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꼭 남에게 강요하거나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으면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해도 아무런 저항이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런 사람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우리더러 평화의 사람들이 되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더 거칠고 사나운 사람들이 되는 것 같습니다. 혹 틀리는 말을 하더라도 그것이 참람한 신성모독이 아니라면 그냥 들어주고 기다려주는 여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갔다가 다시 올 수 있도록 좋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진리의 길은 분명 좁은 길이지만 그 길이 모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공통된 요소가 있지만 시대와 상황과 그리고 사람에 따라 그 방식은 다양할 것입니다. 행기를 조종하며 푸른 창공에서 멀리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일까요? 생텍쥐베리는 동경이라는 말로 우리를 우리의 좁은 시야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만약 당신이 배를 짓고 싶다면, 목재를 사고 도구를 준비하고 일감들을 나누어주고 작업을 정리하기 위해 사람들을 소집하지 말라. 다만 사람들로 하여금 넓고 무한한 바다를 동경하게 가르치라." (<요새>)

그런데 생텍쥐베리의 말대로 무한한 바다를 동경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어떤 취급을 받게 될까요? 게으르고 나태한 몽상가라는 오명을 벗기 어려울 것입니다. 특별히 진리와 관련된 일들은 더더욱 동경하는 일이 그런 판단을 받게 할 것입니다. 조급한 사람들로부터 네가 한 일이 무엇이냐? 너만 옳다는 말이냐? 등등의 말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경은 반드시 현실과 연관되어 무언가를 이루어냅니다. 그것이 비록 처음에 꿈꾸던 모습과 많이 다를지라도 목재를 사고 도구를 준비하고 일감을 찾아 일하고 사람들을 소집하는 사람이 만들어 낸 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배를 만들어낼 것입니다. 폴 고갱을 모델로 한 소설, 서머셋 모옴의 <달과 육 펜스>에서 은행가였던 주인공은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동경이 마침내 폭발하여 타이티로 떠납니다. 그곳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살아갑니다.

갑자가 사라진 그가 현실과 동떨어진 무책임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평생 동경하던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인간의 실존을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옮겨 다니는 달 모양의 6펜스짜리 동전에서 하늘에 떠 있는 영원한 존재로서의 달로 자신의 인생을 승화시킵니다. 비교할 수 없는 그것을 작가는 달과 6펜스라는 제목 속에 담아 놓았습니다. 아마도 생텍쥐베리가 말하는 것도 동일한 내용일 것입니다.

동경은 기쁨이나 슬픔 혹은 두려움처럼 인간의 내면에서 솟구치는 원초적인 정서입니다. 동경은 한 인생을 매 순간 흐르는 강물처럼 이어주면서 전 생애를 관통해 잔잔히 흐릅니다. 동경을 간직하고 있는 한 인간은 살아있습니다. 동경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서도 방향을 열어줍니다. 이 세상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자기 인생에 던져진 질문에 충분하고 완전한 해답을 줄 수 없지만 지나간 과거의 기억은 그리움을 남기며 미래로 방향을 열어줍니다.

그것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동경입니다. 동경은 늘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만듭니다. 동경하던 것이 이루어졌다고 생각되는 순간 그것은 과거가 되어 흘러가고 또 다시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해 앞을 보고 나아가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동경을 간직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그의 삶은 과거에 매여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삶은 자신에 대해 매료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동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닥친 말할 수 없는 모진 고통들조차 그에게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다만 '영광의 중한 것'으로 표현된 그의 동경을 이루는 도구들이었습니다.
 
동경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의 삶은 달라집니다. 사막의 고통을 불평하며 오히려 자신들이 떠났던 애굽의 노예생활을 동경하는 이스라엘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만나를 먹고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을 마시면서도 그들은 여전히 배가 고팠고 목이 말랐습니다. 그들이 동경하는 것이 엉뚱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어려움이 찾아오고 고통이 느껴질 때마다 자신들이 노예였을 때 먹고 마시던 빵과 물을 동경했습니다. 먹을수록 배고프고 마실수록 갈증이 나는 그런 빵과 물을 그들은 오히려 동경하였습니다. 먹으면 먹을수록 마시면 마실수록 자신들을 노예로 만드는 그런 빵과 물임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생명과 희망을 주는 빵과 물의 맛을 날마다 먹고 마시면서도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여전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사실 만나와 바위에서 솟는 물은 자극적이고 강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린왕자가 말한 것처럼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 가마에서 구워먹던 고기맛과 갖은 양념이 다 들어간 음식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시시하게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 맛을 달리 느끼게 해주는 것은, 단순함 속에 숨어 있는 영원한 것을 보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동경입니다. 그 동경이 과연 내 안에 있으며 내 인생을 관통해 흐르고 있을까요?

방구들장 신부님이라는 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이 언제 자신을 믿으라고 하셨나, 따르라고 하셨지! 오늘 신부인 제게도 하느님 성령께서 임하시어 깨우침을 주신 것 같습니다. 따르고 실천하는 이는 별로 없고, 그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면서, 무임승차하여 구원받겠다는 도둑놈 심보만 갖고 사는 이가 99% 이상이니, 장로 대통령부터 목사와 신부에 이르기까지 다 그 모양인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자(信者)'란 말 그만 씁시다. 신자란 말은 너무 흔해서 그만큼 신용가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신자란 말 그만 쓰고 좇을 준(遵)자를 가져다가 '준자(遵者)'라는 말을 씁시다. 준자란 '따르는 자'라는 뜻입니다. '준주성범(遵主聖範)'이란 말 아시죠? 그 준주성범의 준자입니다. 어떻습니까? 준자, 준자. 미인 이름 같기도 하고, 왠지 아름다운 느낌을 주는 것 같지 않습니까? 앞으로는 우리 다함께 신자라는 말 대신 준자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 '준자'라는 말의 뜻을 깨닫고 실행한다는 뜻으로 이제부터는 준자라는 말을 사용합시다."

신부님 말대로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하는 이들의 99%가 함량미달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의 마음속의 동경이 이스라엘처럼 세상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굽을 동경하면서 가나안을 동경하고 있다고 사람들을 속이고 그 거짓말에 자신까지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의 성공과 돈에 목말라 하면서 진리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명예와 권력과 사람들의 인정으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욕망과 죄의 노예로 사로잡히고 마는 우리를 해방시켜 자유롭게 합니다. 그 자유의 물은 자신을 내어주는 사람에게서 흐르는 물입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착한 사람을 위해 몸을 내어놓는 것은 어쩌면 누구라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운 사람을 위해서도, 미움을 지나 증오를 지나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원수를 위해서도 내 몸을 내어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유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 물을 마시는 자에게서만 모두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물이 흐르며 사람들을 목마름과 갈증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목말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동경하며 살고 있을까요? 내 동경은 과연 무엇일까요? 혹 자신의 동경을 착각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인생을 관통해 흐르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본다면 자신의 진정한 동경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지 않을까요? 과연 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내 몸을 내어놓는 삶을 살고 있는가? 부족하더라도 그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가를 살피기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동경이 내 인생을 꿰뚫어 지금까지 내게 흘러와 지금 내 안을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또 미래를 향해 흘러갈 것입니다. 동경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동경이 나를 이끌어 갑니다. 동경은 늘 인간을 원초적인 고향을 향하여 살게 합니다.

그분이 그리워 목이 타는 사람은 진실을 마시며 소망 가운데 살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오롯한 동경의 삶을 살다가 돌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우리도 동경의 노래를 부르다가 우리의 모든 것의 원천이신 그분께로 돌아갈 수 있다면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돌아가리라)"고(시23:6) 노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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