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임과 부목의 경쟁 관계, 바람직 한가?
담임과 부목의 경쟁 관계, 바람직 한가?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0.05.24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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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담임은 담임대로, 부목은 부목대로 서로 숨기는 경쟁의식...세속적 권력관계에서 비롯
다윗과 골리앗 그림 (사진=반디엔루니스)
다윗과 골리앗 그림 (사진=반디엔루니스)

[뉴스M=최태선 목사] 부목사는 설교를 적당히 잘 해야 한다. 설교를 너무 잘 해서 담임목사님보다 더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 그 사람은 그 교회에서 잘린다. 그렇다고 해서 설교를 또 너무 못하면 안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무능하기 때문에 잘린다. 그래서 부목사들이 늘 명심하는 말이 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그 이야기를 성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쳐 죽이고 군인들과 함께 돌아올 때에,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에서 여인들이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면서 사울 왕을 환영하였다. 이때에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불렀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다.’ 이 말에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사람들이 다윗에게는 수만 명을 돌리고, 나에게는 수천 명만을 돌렸으니, 이제 그에게 더 돌아갈 것은 이 왕의 자리밖에 없겠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 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울과 같이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이 기사를 읽는 사람들은 아무런 생각 없이 이렇게 행동한 사울을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물론 자신은 절대로 사울과 같이 행동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라. 

먼저 여인들이 참 주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 여인들은 그런 쓸데없는 노래를 불렀을까. 사울 왕을 환영하러 나와서 말이다. 그래도 그런 노래를 부르는 여인들을 감옥에 가두지도 않고 죽이지도 않은 사울이 대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말을 듣고 언짢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나였더라도 사울처럼,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을 것 같다. 그 다음 순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자신의 자리를 걱정하고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목사들이 하는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자조에는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사울을 폄훼하는 사고가 들어있다. 부목사들의 그러한 사고에는 자신이 다윗이라는 우월감이 자리하고 있다. 옳다는 것이다. 자신이 낫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울과 마찬가지의 사고가 아닌가. 결국 성서의 표현을 따르자면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에는 경쟁심이라는 매우 은밀한 악이 자리하고 있다. 

나는 경쟁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철저하게 버려야 할 이 세상의 풍조이며 그것은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경쟁하지 않는다. 경쟁은 이 세상의 풍조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윗을 시기하고 의심하는 사울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사울보다 더 경쟁을 당연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한다. 여기에서 교회의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경쟁은 반드시 계급구조를 만들어낸다. 신천지를 잘 보라. 그들이 잘못된 것은 그들의 조직이 계급구조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경쟁심을 유발하고 계급을 만들어 사람들의 경쟁심을 강화한다. 그들을 움직여나가는 동인이 경쟁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신천지의 경쟁이 신천지만의 것일까. 다른 정통교회들에는 이런 경쟁이 없을까. 그렇지 않다. 최근 기사에 보도된 진리와빛교회를 보라. 그들의 행태가 신천지와 똑같다. 그리고 그들이 형성한 구조를 보라. 그것은 철저한 계급구조이며 결국 그러한 계급구조는 최상층에 위치한 김명진목사를 위한 ‘희생의 체제’가 된다. 이 명백하고 분명한 사실을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를 주장하면서도 자신 역시 사울과 같은 사고를 가진 부목사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역시 신천지나 진리와빛교회를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그들과 같은 사고를 가지고 있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러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더 이상 경쟁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한 사람이 자신을 남과 비교하겠는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하고 싶은 분들이 많을 것 같아 바나바를 소개한다. 

“바나바는 사울을 찾으려고 다소로 가서, 그를 만나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두 사람은 일 년 동안 줄곧 거기에 머물면서, 교회에서 모임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 제자들은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었다.”

바나바는 사울(바울)을 찾으러 다소로 가서 그를 찾아 그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바나바는 능력이 있는 바울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바나바는 대표적인 자기를 부인한 예수의 제자였다. 그에게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바울을 찾으러 갔고, 바울을 데리고 와서 함께 일을 했다. 성공적이었다. 예수의 제자들은 그곳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예수의 제자들의 정체성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은 그들이 그리스도와 같다는 것이다. 그들을 보면 그리스도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프란치스코와 같이 작은 예수들이었고, 예수살이를 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이다. 

그러나 바나바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자리를 바울에게 내주게 된다. 바나바가 바울을 데려왔을 때 성서에 기록된 순서는 바나바와 사울(바울)이었다. 물론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러한 순서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 역할의 중요성 정도는 반영한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중요성이 역전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바나바와 사울은 바울과 바나바가 된다. 그리고 마침내 바나바의 이름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기에 이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바울이 바나바보다 더 커지고 중요해졌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바울에게 자리를 내주고 무명의 사람으로 돌아간 바나바야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참된 기독교 지도자,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다른 사람을 세우는 사람이다. 바나바가 바로 그 일을 한 것이다. 만일 바나바의 마음에 사울과 같은 경쟁심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었다면 바나바는 바울을 데려오는 그런 어리석은 일을 결코 하지 못했을 것이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었다.”

여기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과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같은 의미이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은 착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착한 사람의 의미는 경쟁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밀어내고 자신보다 더 큰 사람이 될 사람을 그는 데려와 함께 일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커지는 것이 대수가 아니라 작아지는 것이 대수이며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무명해지는 것이 대수다. 마침내 바나바는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경쟁이라는 이 세상의 풍조를 따른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가뭇해지고 복음은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맘몬의 위세에 눌려 더 이상 전해지지 못한다. 경쟁하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아니 교회일 수 없다. 오늘날의 교회들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나가시는 분들에게 그런 교회에서 탈출하시라고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안디옥교회에서 그토록 명예롭게 획득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에 담긴 의미를 이 시대에 되살려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나는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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