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지향하나 공존 못하는 모순이 이민 교회의 가장 큰 문제"
"도시 지향하나 공존 못하는 모순이 이민 교회의 가장 큰 문제"
  • 김기대
  • 승인 2011.03.01 12:31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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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한인 교회의 현실과 전망', 미국 내 한인 교회의 자리 찾기

한인 이민자들은 도시형 삶을 지향해서 이민의 길을 떠났다. 처음부터 근대화의 상징인 북미를 택했던 이민자들과 달리 계약상 농업 이민으로 시작한 남미 이민자들이지만 그들 역시 계약 기간이 끝난 후 대부분 도시로  나왔다는 사실이 우리가 근대적 도시를 동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근 이민 사유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자녀 교육 문제를  보아도 농촌에서 서울로 유학을 보냈던 것의 변용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성서에서 도시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도시가 최초로 언급된 것은 창세기 4:17이다. 가인의 아들 에녹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따라 도시(iyr)를 만들었다. 가인은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하는 징벌을 하나님께 받았지만 그의 아들은 유랑을 그만두고 정착을 시작한다. 그러나 도시는 유랑이라는 징벌을 극복하지 못하고 또 다른 유랑이 시작하는 지점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창세기 바벨탑 사건이다. 여기서 도시는 정착을 위해 모였던 이들이 다시 떠나게 되는 유랑의 시발점이다. 도시의 부정적 이미지는 자신들이 떠돌이면서 그곳을 찾아온 낯선 이들을 폭력하는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 극대화된다.

신약에 와서도 이 이미지는 바뀌지 않는다. 야고보서에서 도시는 돈을 벌기 위하여 떠도는 이들이 모이는 곳이다. 성서에서 도시가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데는 다양성도 한 몫을 한다. 구약의 세계관에서 보면 도시는 통일성보다는 다양성이 강조된다는 점에서 비신앙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특히 바벨론 포로기에 도시의 거대함과 편리함을 경험한 유대인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서라도 율법의 편집자들은 도시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해야만 했다. 신약의 도시관도 마찬가지다. 사도바울이 선교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의 모순은 구약의 도시관과 중첩되어 계시록의 부정적 도시관으로 나타났다.

한인 교회의 어울리지 않는 정착 시도

굳이 성서의 세계관이 아니어도 오늘날 도시는 문제다. 온갖 계몽과 첨단, 다양성이 혼재하는 곳이 도시지만 이 다양성은 갈등의 근원이 된다. 게다가 미국이라는 다문화의 공간에서 도시는 인종의 혼재라는 또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것 때문에 온갖 부조리와 죄악이 발생한다. 

성서적 세계관에 기초했을 때 우리는 이 도시 저도시를 떠돌아다니는 떠돌이 유랑자들이다. 그러나 버림받은 유랑자가 아니라 새로운 약속의 순례자가 되기 위해 다양성의 공간인 도시에서 공동체를 찾아야 하는 것이 한인 이민 교회의 과제라고 보고 싶다. 낯선 공간에 와서 얻은 안정을 잃기 싫어 또 다른 낯설음을 배격하는 문화가 있는 한 한인 기독교인은 순례자가 아니라 ‘벌 받은 자’로서의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인 교회는 도시의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는 형태로의 정착이 아니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정착을 시도해왔다. 한인들의 회귀 지향성은 건전한 정착을 가로막는다. 사탕 수수밭 노동자들인 초기 이민자들에게 미국은 영원히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고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그들은 독립자금 모금과 같은 행동으로 회귀 욕망을 위무했다. 그러나 해방은 너무 늦게 찾아왔고, 대부분은 이 땅에 정착해야만 했다.

건전한 이민 교회 정착 가로막는 회귀성과 동질성

안타깝게도 60년대 초반부터 다시 시작한 한인 이민과 초기 한인 이민자 사이에 맥이 연결되지 않았다. 60년대 이후 이민자들은 노동자 신분이 아니라 서양 교육의 혜택을 받은 1세대들이었기에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 심했다. 그런데 이들도 초기 이민자들이 가진 회귀욕망과는 내용만 다를 뿐 고국에 대해 우월성을 가진 회귀 욕망으로 고국을 그리워했다.

이들의 회귀 욕망은 한인 교회의 증가를 가져왔다. 이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또 하나의 한국을 만들어 내었다. 결국 한인 교회는 미국도 한국도 아닌 형태로 자리 잡아 갔다. 또한 이들은 고학력자들답게 동문회들을 중심으로 70년대 이후 미주 한인 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그러나 평준화 세대가 중년에 접어들면서, 즉 동문의식이 약화되면서 이민 사회 각종 동문회의 참여 숫자가 급격히 감소한다. 바로 이때부터 미주 이민 교회에서도 초대형 교회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회귀성과 동질성은 건전한 이민 문화의 정착을 가로막는다. 도시를 지향해서 왔으면서 도시성과는 공존하지 못하는 그 모순을 이민 교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보고 싶다. 이러한 현상들을 분석하기 위해 이민신학이라는 이름의 접근들이 있었으나 대부분 교회들의 선언적 고민에 그칠 뿐 깊은 성찰은 제공하지 못했다. 이제 한인 이민 교회는 문화에 대한 고민과 도시에서 참여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해야 한다. 여기서 주체의식도 생겨나고 건강한 한인 교회의 문화도 형성된다.

쓰레기들끼리 모여 새로운 흐름 만들어내는, 치마타

최근 철학계에서 다시 유명세를 타고 있는 독일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19세기 세계의 중심도시였던 파리를 관찰해서 서구 근대의 문제점을 찾아내었다. 파리 시내를 상징하는 아케이드(상가)에서 자본주의의 모순을 발견하고자 했던 베냐민은 파리의 수많은 다문화들(multi –culture) 즉 패션, 박람회, 카탈로그, 매춘, 도박, 등등을 통해 파리를 분석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전통적인 진보 보수의 역사관과 경제적 결정론으로 모든 것을 분석하려는 관점을 동시에 극복하려고 애쓴다. 그는 오히려 역사로부터 배제되고 폐기 처분된 또 다른 아래 것들인 ‘쓰레기’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특징이 드러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파리를 배회하는 우울한 관찰자의 시선으로 자본주의 너머의 새로운 세계를 꿈꾸었다. 유대인으로서 종교적 입장을 근저에 가지고 있었던 베냐민은 파리에서 또 다른 이상을 기대했지만 그 결실은 보지 못했다.

19세기 세계의 중심이 파리였다면 20세기 자본주의의 중심은 뉴욕이다. 일본 작가 이와사부로 고소는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뉴욕열전에서 치마타라는 일본식 거리의 개념을 통해 뉴욕을 바라본다. 치마타는 행정적으로 구획된 어떤 공간이 아니라 그냥 모이는 공간이다. 어떤 치마타에는 동성애자들이, 어떤 치마타에는 저항음악을 하는 이들이, 어떤 치마타에는 일감을 찾는 일용직 근로자들이 모여든다. 그들의 영토는 없지만 자기들만의 치마타에 모여 거대한 흐름을 엮어낸다. 911사태 이후 급격히 보수화되고 있는 저편의 치마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미자립적 흐름, 소규모 흐름이 개발의 논리를 극복하고 뉴욕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주류에 편입되려는 안쓰러운 한인들

소수자 미주 한인 교회는 화려한 엘에이 다운타운을 우울한 시선이 아니라 동경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모인 공간이다. 주류의 눈에는 한낱 잔여물로 보일 한인들은 끊임없이 주류에 편입하기 위하여 추파를 보낸다. 베냐민이 파리에서 바라보았던 고급문화와 견주어지는 고급차, 백인 중심의 주거 지역으로 끊임없이 들어가려고 하는 그들의 노력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러는 순간 계급의 구조에서 아래에 속한 자신들의 위상을 망각하게 되고 그것이 가져다 줄 동력 또한 상실하면서 영원히 바라만 보다가 끝나버린다. 또한 한인들은 주거지나 그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는 교회에서는 다문화에 속하기를 두려워한다. 단순히 언어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라 문화의 핵심을 공유하는 데 아직 낯설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19세기~20세기 초엽의 파리의 역할을 대신하는 뉴욕 또는 엘에이에서 자본주의의 겉모양에만 천착하고 그 문제점과 극복에 대해서는 외면한다. 결국 비주류(젊은이, 진보적 정치관, 비주류 특정 지역, 가난한 이들, 저소득층에 집중되어 있는 특정 인종 이민자들, 성적 소수자)에 대한 가혹한 비판을 가한다.

교회 공간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다시 추레한 잔여물이 되지만 적어도 교회 공간에서 경험한 주류의 짜릿함을 잊지 못한다. 풍요의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을 뿐 그 풍요의 열매는 여전히 먼 데 있는 이민자들이지만 실제로 그 풍요가 자기에게도 곧 다가올 것이라는 헛된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을 상대로 해야 하는 것이 이민 목회이다. 바로 이 때문에 다문화 목회가 어려운 이유이다. 베냐민은 자본주의가 재구성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지만 오늘 기독교인들은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 더 들어가려는 꿈을 꾼다.

주류 편입 포기하고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라

한인 교회는 도시에 정착하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확보하기에 바빴다. 땅을 사고 교회를 건축하는 것은 개신교가 주류인 나라에서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이민자들은 확보된 공간 안에서 더 이상 떠돌이가 되고 싶지 않았다. 문화적 떠돌이인 것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욕망의 떠돌이가 아니라 순례형 떠돌이가 되어야 함에도 그들은 떠돌이 신분을 빨리 벗어나고만 싶었다. 이제 한인 교회는 이러한 영토 개념에서 벗어나, 다시 말해 유형의 공간적 안정성에서 벗어나 마치 치마타처럼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비주류로 살아남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단언하건데 이 땅에 우리는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 그럴 바에야 비주류의 특성으로 살아남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주류 편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빨리 선포해야 한다.

안토니오 네그리가 그의 저서 제국에서 말한 다중은 다문화 목회에 필요한 키워드다. 현대 교인들에게 다중을 인식시켜주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의 몫이다. 다중이란 각자의 정체성을 가지며 개별적으로 행동하되, 특정한 사안을 동의할 때 개별성을 유지하면서 공동으로 활동하는 21세기 계급이다.

물질적 계급에 따른 분류인 민중과도 구분되며 단순한 대중과도 구별된다. 하나님나라는 다중의 나라이다. 이것은 스스로가 비주류임을 각성하되 결코 그것으로 주눅 들지 않는데서 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새로운 공동체가 시작된다.

우린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약한 자들과 연대하고 낯선 것들을 환영하라

이 새로운 공동체가 추구할 목표는 낯선 이들에 대한 환영이다. 어느새 주류가 주는 편안함이 자기 옷처럼 편안해진 한인 이민 교회는 낯선 것들을 낯설어 한다. 본래 도시와 다문화는 낯선 것을 전제한다. 끊임없는 주류로의 편입 욕구를 성서적으로 중지시키고 다중이라는 계급적 자각을 인식시킬 필요가 있다. 

다문화 목회와 다인종 목회를 동의어로 보는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 중 하나이다. 다문화 목회의 현장에 서 있는 우리들은 다중들이 함께할 수 있는 더 거대한 담론을 찾는 데 실패하고 인종적 만남에 초점을 두었던 실패의 경험들을 가지고 있다. 그 내부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실패는 예견되어 있던 것이었다.

이제 각종 낯선 것들에 대한 열림이 없으면 이민 교회의 미래는 우울하다. 낯선 이들을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는 차후의 문제다. 낯선 것에 대한 환영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도시는 다시 유랑의 징벌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도시를 더 이상 벌 받은 자들의 유랑의 공간이 아니라 끊임없이 낯선 것들을 받아들이는 재영토의 공간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주류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그 약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강한 것이 된다. 오늘날 비주류들에게 던져진 신학적 과제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주류를 껴안고 가야하는 사명 속에 던져져 있다. 약한 자들과 연대를 가르치고, 낯선 것들에 대한 환영을 가르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다문화 목회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고 이민 교회는 그것을 지향해야 한다.

분명 쉬운 과제는 아니다. 당신은 그래서 이민 목회를 잘 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리고 당신이 주장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다만 아도르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위로가 될지 모르겠다.

“나로서는’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라는 말만이 진실한 답변일 경우가 매우 많다. 나는 있는 것을 엄격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사람들은 나를 책망한다. 당신이 비판을 하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더 낫게 만들지 말해줄 의무도 있는 것 아니냐. 내 생각에 이것은 논란의 여지없는 부르주아적 편견이다. 역사에서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목표만을 추구한 작업이 의식을 바꾸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현실까지 바꾼 사례가 아주 많다.” (떼오도르 아도르노)

김기대 / 엘에이 평화의교회 담임목사

* 이 글은 'KOREAN UCC INTRODUCTION CLASS 2011'에서 김기대 목사가 발제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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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이민자 2011-03-06 10:53:05
우리의 자화상을 정확히 진단하셨습니다.2000년대 화두로 떠오른 2세들의 신앙계승 구호도 1세들의 아지트 유지를 위한 마지막 몸부림. 왜냐하면 2세들은 그들만의 신앙색깔이 있으며 우리보다는 월등하게 주류사회와 건강히 융합중.오히려 2세들이 우리의 치우쳐진 교회관을 염려하는 호소를 신중히 받아들여야함.이제라도 약한자들과 낯선것들에 대한 거룩한 표용력을 발휘해야 함.

25년이민자 2011-03-06 10:41:27
우리들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셨습니다.우리가 2세들의 신앙계승을 들먹이는것도 1세들의 아지트확장을 위한 몸부림. 왜냐하면 2세들은 주류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을뿐 아니라 정작 그들은 신앙계승에 대한 걱정이 없음.

smokybear 2011-03-04 09:41:43
낯선것들을 환영할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주류라고 볼 수 있죠. 그 낯선것들 모두가 자신의 영역안에 있으니 완전 주류가 아닐수 없죠. ㅎㅎ

멋진 행동입니다만, 실행하기에는 많이 어려운 일인듯 합니다. 노력해봐야죠~

벨라 스완 2011-03-03 12:51:54
저는 10여년을 한 대형 한국이민교회에서 살다싶이 했는데, 저도 그곳에서 피부로 느꼈던 점들이었습니다. 거기에다가, 근교에 인기있는 한 미국대형교회에 한인들이 몰려도, 그 교회안에서도 한인들은 따로 모임을 가지기 원한답니다.

sk 2011-03-02 11:12:15
뉴스앤조이에서 언제쯤 좋은 소식을 전할까!
더 이상 이공간이 도움이 되지를 않는다. 기자들의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 그냥 써내려가는 것이 글이 아니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