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의 실종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의 실종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1.31 03: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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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동부지방법원 민사14부는 1월 26일 '대표자 지위 부존재 확인소송'에서 교단법을 어기고 부자 세습을 강행한 명성교회 김하나 목사에게 교회 대표자 자격이 없다고 판결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식을 기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정말 기쁜 소식입니까. 저는 조금도 기쁘지 않습니다. 기쁘기는커녕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여러분이 서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부터가 벌써 여러분의 실패를 뜻합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당해 주지 못합니까? 왜 차라리 속아 주지 못합니까?”

초기교회는 이 말씀을 철저히 준수하여 세상의 법정으로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를 들고 가는 일이 없었습니다. 물론 법정으로 이 문제를 끌고 갈 수밖에 없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법정으로 끌고 갈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모든 것이 썩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불의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라도 그리스도인답다면 세상의 판단에 교회 일을 맡기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해야 했습니다. 차라리 속아 주어야 했습니다. 말없이 명성교회를 떠나는 것이 그렇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법원의 판결로 김하나 목사님이 명성교회를 떠나겠습니까.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백의종군의 자세로 김삼환 목사님을 따르는 무리들을 이끌고 나와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습니까.

망상입니다.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김삼환 목사님과 김하나 목사님은 자신들이 불의하다는 생각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이런 수모를 겪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면 왜 김삼환 목사님과 김하나 목사님은 세상도 다 아는 불의를 왜 부인할까요. 왜 자신이 당하는 당연한 일을 수모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는 연단이라고 생각할까요.

그것은 그분들이 대단하신 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이루어낸 업적에 도취되어 스스로를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은 ‘가장 선한 악’처럼 모순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위대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그야말로 종이 됩니다. 종이 무엇입니까. 노예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어떤 일을 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

만일 김삼환 목사님과 김하나 목사님께서 하나님이 명령하신대로 일을 했다면 그분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며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분들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종의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의 신분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으로부터의 자유일까요. 안타깝지만 그것을 자유로 인식하게 만드는 다른 주인인 맘몬의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분들에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그리스도교가 아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물론 그 시작은 신앙의 자유를 허락한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과장법이 아닙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려면 낙타가 바이러스처럼 작아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바늘귀 아니라 더 작은 구멍이라도 자유롭게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작아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버려야 합니다. 인식하지 못하지만 부는 자아를 부풀립니다. 자아가 부푼 사람들은 결코 작아질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먼저 가난뱅이가 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 일은 인간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작아진 후에야 인간은 복음대로 살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과장법이 아니라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말씀입니다.

큰스탄티누스가 한 일이 바로 그것을 어긴 것입니다. 그가 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습니다. 초기교회가 실패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초기교회는 황제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그리스도교를 바꾸었습니다. 이후로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그리스도교가 되었기 때문에 송사도 일어나는 것이고 김삼환 목사님과 김하나 목사님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자연스러운 교회가 된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콘스탄티누스가 한 일은 단지 멸망으로 이끄는 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멸망으로 들어가는 문은 말 그대로 넓게 열려 있습니다. 그가 그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의 자유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넓은 문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폐쇄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구라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먼저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를 떠나 사막으로 들어간 것은 좁은 문을 찾아 그리로 들어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이후의 그리스도교 안의 좁은 문으로 가는 길이 폐쇄되었음을 감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후의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누구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쫓겨나거나 이단 판정을 받거나 파문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발도처럼, 얀 후스처럼, 이반 일리치처럼, 변선환 목사님처럼 말입니다.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다.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폐쇄되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을 폐쇄한 이후 그리스도교는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대로를 달리는 사람들의 종교가 되었습니다. 김삼환 목사님의 교회가 대형교회가 된 것도 김하나 목사님이 그 길을 이어달리는 것도 다 넓은 길을 달리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누구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사막의 교부들처럼 사막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좁은 문으로 이어지는 길이 폐쇄되었습니다. 이것을 알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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