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의 소유의 실종
공동의 소유의 실종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2.02.04 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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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기교회의 기사를 읽을 때마다 마치 독립운동을 보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낀다. 그들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성장했다. 기사에 등장하는 한 내용, 한 내용이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가장 인상적인 것은 역시 ‘공동의 소유’의 실천이었다. 공동의 소유를 통해 초기교회는 그들의 형제애를 확인했고, 공동의 소유를 통해 그들은 아무도 가난한 사람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내었다. 인류 역사상 세상에 없는 새로운 나라가 역사 속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 초기교회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의 등장이었다. 그것은 가히 경천동지라 할 수 있는 놀라운 일이었다. 초기교회는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나라를 보고 매료되었다. 초기교회 성장의 비밀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등장이었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모든 사람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사도들을 통하여 놀라운 일과 표징이 많이 일어났던 것이다.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은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날마다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 주님께서는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

로마 시대의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매료되었던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경제적 행위가 세상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교도들은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무엇을 보고 확인했을까. 바로 경제적 행위이다. 수많은 종교들로 마치 종교 시장 같았던 로마에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경제적 행위로 특징지어지는 독특한 종교였다. 오늘날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공동의 소유’를 기치로 내세웠던 다른 종교들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어서 가난한(핍절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사회를 이루어내지는 못했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이루어내었고 그것을 세상에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초기 그리스도교의 성장의 비밀이었던 공동의 소유가 왜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단시 되고 있는 것인가. 공동의 소유를 말하면 공산주의자로 매도되는 곳이 되었는가.

나는 오늘날도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공동의 소유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내가 굳이 목사가 되어야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였고 나는 그것의 실천을 위해 내 재산을 교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했다. 목사인 내가 가장 먼저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람했다. 결국 그것 때문에 내 개인의 파산은 물론 교회마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와 우리 교회의 실패가 무의미했다거나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나처럼 그런 시도를 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실패가 없는 나라다. 실패는 오히려 성공보다 의미 있다. 나는 나의 실패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만일 내가 성공했다면 우리 교회는 오늘날 성공한 다른 교회들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실패로 이어졌을 것이다.

나는 나의 실패를 통해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아니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가 되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사실 참 곤란한 일이다. 알아서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어제 나는 한 목사님으로부터 문자를 받았다. 날마다 내 글을 읽으시는 분이다. 그분이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내용의 설교를 하셨다. 그 설교를 듣고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목사가 어떻게 그런 설교를 할 수 있느냐고 화를 내며 나갔다는 것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그래도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이 없다는 것은 나 말고는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어찌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가. 그래서 그분과 긴 통화를 했다.

내가 제도권을 떠났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누구건 담임목사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오늘날 교회의 패턴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더 이상 복음이 아니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과 빨갱이들과 주사파들의 나라일 뿐이다. 그것을 어제 그 목사님을 통해 다시 확인했던 것이다.

‘공동의 소유’는 형제애(사랑)와 섬김과 샬롬(평화)과 평형을 구현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실천의 도구이다. 이것이 사라지면 하나님 나라도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에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개인의 소유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이렇게 절대적인 공동의 소유를 허무는 일 역시 콘스탄티누스로부터 시작되었다.

“황제로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와 연계했다. 그는 주교들을 자신의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그는 라테란 바실리카를 건립했다. 그는 성직자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고 시민의 의무를 면제시켜 주었다. 그는 일요일을 휴일로 제정했다.”(p.413)

콘스탄티누스는 성직자들에게 보조금을 제공하고 시민의 의무를 면제시켜 주었다. 그는 교회 안에 성직자라는 특수한 계층을 만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주었던 교회의 전통이 성직자라는 특수한 사람들로 인해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를 보라. 성직자들에게는 사례비를 준다. 물론 사찰집사와 같이 유급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교인들 가운데 아무리 핍절한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람을 책임져주지는 않는다. 그것은 책임을 져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소유를 실천하는 일일 뿐이다.

우리 교회에서는 실직한 가정에게 목사들이 받던 사례비에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그 가정에 지급했다. 지금은 그것이 몹시 후회가 된다. 그때 우리는 목사들의 사례비와 같은 금액을 그 가정에 지급해야 했다. 그래야 우리 교회가 공동의 소유를 실천하는 교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우리처럼 일부라도 실직한 교인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교회를 본 적이 없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성직자라는 특수한 계층이 교회 안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은 돈과 특권을 지닌 특수한 계층이 되었다. 이 사실에 분노하고 슬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공동의 소유를 실천하지 않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인 교회가 될 수 없다. 공동의 소유를 모르는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교가 아니다. 그런 그리스도교, 그런 교회에서는 맘몬이 우상이 될 수밖에 없다. 각자도생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방식이다. 그런 세상의 방식을 넘어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게 된 오늘날의 교회는 얼마나 허무한가.

콘스탄티누스가 성직자들에게 보조금을 주고 시민의 의무를 면제해준 것은 하나님 나라의 평등을 허무는 일이었고, 형제애와 섬김을 무력화하는 첩경이 되었다. 주교와 같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계급이 아니라 은사에 따른 구분이어야 했고, 주교는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는, 주님의 교회의 반석이었던 베드로와 같이 가장 천한 종이 되어야 했다. 그것이 이상이 된 것이다. 아니 그것이 이상인 것조차 모르는 그리스도교가 된 것이다. 이것을 나는 그리스도교의 종말로 간주한다.

사탄은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교묘한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경제의 근간이었던 ‘공동의 소유’를 무력화시켰다. 이후로 공동의 소유는 수도원 안에서만 작동하는 특별한 삶의 방식이 되었다. 수도원이 없는 개신교에서는 이단들의 삶의 방식이 되었다. 콘스탄티누스로 인해 그리스도교 안에서 ‘공동의 소유’라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실종된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긴 말을 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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