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수박의 역사
민주당 수박의 역사
  • 김기대
  • 승인 2022.06.29 0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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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에서 민주당까지, 그 사이에 신사임당

국민의 힘 고문 직함을 가진 이재오 고문은 인기 팟캐스트 ‘매불쇼’에서 자신들 세대가 한창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 중앙정보부(현재 국정원)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면서 “너희들은 수박같은 XX들이야!”라는 욕설을 들었다고 회상했다. 겉은 파랗지만 속은 새빨간 빨갱이라는 의미로 그들을 수박이라고 불렀다는 말이었다.

민주당 계열의 정당이 붉은 색을 택했어야 했는데 항상 그렇듯이 빨갱이라는 일부 손가락질을 두려워한 그들은 ‘빨강’을 외면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 한완상 교육부총리가 첫 출근을 할 때 붉은색 넥타이를 메고 왔다고 조선일보가 시비를 걸 때였으니 붉은 색을 외면한 그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는 대목이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우유부단한 태도가 보안법 철폐나 혐오방지법 통과를 주저하는 그들의 한계와 일맥상통한다.

조선일보도 이런 기사를 실은 과거가 부끄러웠는지 조선일보 기사로는 검색이 안된다. 오히려 그런 조선일보의 시각을 비판한 오마이뉴스 2001년 2월 17일 ‘만물상에 나타난 조선일보의 착각’이라는 기사에서 인용된 내용만 검색된다.

벼슬이 좋기는 좋은 모양이다. 엊그제 부총리가 된 한 분은 빙모상중이었던 모양인데 붉은 넥타이를 매고 청사에 등장했다. 얼마나 벼슬이 좋았으면 상중에 매었을 검은 넥타이를 금방 바꿨을까. 더욱이 그가 맡은 자리는격상된 지위이나 처신 하나하나 모범을 보여야 할 자리였는데…(조선일보 1월31일)

빨간 색에 대한 포비아(두려움)가 친근하게 바뀌게 된 데는 한국 국가대표 축구팀의 응원단이 ‘붉은 악마’라는 명칭을 가지면서부터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붉은 색이 남한 전체를 물들이면서 거기에 힘을 얻은 현재 국민의힘 전신 정당들(이름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일일이 거론은 못하겠다)이 붉은 색을 상징색으로 택했다.

2022년 한국 정치 현장에서 붉은 색은 좌파의 상징색이 아니라 우파의 색으로 자리잡았고 수박은 파란 색(민주당 로고색) 속에 숨은 국민의 힘(붉은 색) 성향의 정치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드러난 이재명 후보와 이낙연 후보의 갈등은 첨예했고 그 과정에서 이재명지지자들은 이낙연 지지자들을 수박이라고 조롱했다. 조롱의 개연성은 충분했다. 이낙연이 후보로 선출될 경우 본선에서 그를 찍겠다는 이재명 지지자들의 비율이 그 반대의 경우 즉 이재명을 찍겠다는 이낙연 지지자의 비율을 훨씬 상회했다.

대선에서 근소한 차로 패배한 이재명 지지자들이 패배의 원인을 ‘수박’에서 찾았고 비방의 수위가 높아지자 우상호 비대위원장은 ‘수박’을 언급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수박논쟁은 우리 나라에만 있었을까?

에릭 M. 콘웨이와 나오미 오레스케스가 지은 ‘의혹을 팝니다(미지북스)’는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이라는 부제처럼 어용이 된 과학자들이 환경론자들을 좌파로 몰고 간 역사를 담은 책이다. 저자들은 오늘날 지구 온난화 논쟁에서 쓰이는 수법이 과거 담배 논쟁에서 쓰였던 것과 동일했고, 기업의 용병 역할을 하는 과학자들 역시 동일한 인물이었다고 주장한다. 프레더릭 사이츠와 프레드 싱어는 2차 세계 대전 중 물리학자로 과학적 명성을 날렸으며, 냉전 시기에는 정부에서 주요한 국방 관련 업무를 수행하면서 담배는 무해하며 지구 온난화는 허구라는 주장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재스트로와 니런버그, 사이츠는 과학계의 스타워스 찬성로비단을 구성하여 보수 강경파 정치 진영에서 대단한 신뢰를 얻었다. 냉전이 끝나자 이 사람들은 새로운 커다란 위협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환경론에서 그런 위협을 발견했다. 그들은 환경론자들은 ‘수박’이라고 주장했다. 겉은 초록이지만 속은 빨갛다는 것이었다. (‘의혹을 팝니다’, 461~462쪽)

중앙정보부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을 수박이라 호칭했고, 미국의 우파 과학자들은 환경주의자들을 수박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공산주의자가 아닌 것은 확실했지만 권력자들은 빨간색을 덧씌우면서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옳은 일을 하다가 억압받던 이들을 상징하는 수박의 이미지를 편법과 술수의 이미지로 바꾸어 놓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수박 논쟁은 그런 점에서 서글프다. 그러면 성서는 수박을 어떻게 서술할까?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섞여 살던 무리들이 먹을 것 때문에 탐욕을 품으니, 이스라엘 자손들도 또다시 울며 불평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 줄까? 이집트에서 생선을 공짜로 먹던 것이 기억에 생생한데, 그 밖에도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눈에 선한데, 이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이 만나밖에 없으니, 입맛마저 떨어졌다." (민수기 11:4-6, 새번역)

굳이 따지자면 성서의 수박은 서글픈 이미지쪽이 강하다. 광야에서 탐욕에 사로잡힌 히브리 민중들이 그리워하던 과일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과거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하던 치욕의 역사를 영화의 시절로 기억하는 이미지로서 수박을 설명하면 지나친 것일까? 그런데 2022년 대한민국의 정치현장에서 수박으로 호명되는 세력들이 모두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돌리고 싶은 사람들로 보이는 것은 -나의 편협한 시각이라고 비난해도 좋은데-나름 개연성이 있다.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병풍 중 제 2폭
신사임당의 초충도 8폭 병풍 중 제 2폭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 보물 제 595호)'라는 수를 놓은(자수) 8폭 병풍이 있다. 그 중 제 2폭의 제목은 수박과 들쥐다. 여기서 들쥐 두 마리가 수박을 파먹고 있는데 다남(多男)의 상징인 수박을 들쥐가 파먹는 그림으로 신사임당은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을까? 

신사임당의 남편 즉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20살이나 어린 주막집 여자 권씨를 첩으로 삼았다. 신사임당은 첩으로는 삼을지언정 자신의 사후에 절대로 집에 들이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신사임당이 심장병으로 사망한 후 권씨를 서모(庶母)로 들였다. 권씨는 율곡의 형 이선과 나이가 비슷했다. 들쥐같은게 남편의 다산의 상징(신사임당과 이원수 사이에는 8명의 자녀가 있었다)을 갉아 먹는다는 의중이 그림에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보수 우익 정부 하에서는 민주화 운동 인사들과 환경주의자들이 공산주의로부터 자양분을 얻는 들쥐로 보였을 터이고, 현재 민주당의 친이재명 세력들에게는 수박껍질을 파낸 다음 상대진영과 내통하는 세력들이 들쥐로 보일 것이다. 어느 게 맞는지는 독자들이 판단할 몫이지만 내 입장은 이 글에서 주장하는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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