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교회 망해도 숫자 타령하는 한국 교회
수정교회 망해도 숫자 타령하는 한국 교회
  • 김용민
  • 승인 2011.03.22 01:24
  • 댓글 4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사회적으로 실추된 기독교, 어떻게 살릴 것인가

국회의원을 지낸 이계진 전 KBS 아나운서가 쓴 <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딸꾹>(1991, 우석)에 소개된 내용이다. 어느 해인지 기록돼 있지 않으나 한 부처 장관이 점잖게 기념사를 하던 자리였다고 한다. 그 무렵은 일부 세력이 정부가 종교 탄압을 가한다며 길길이 반발하던 시기. 장관은 원 샷을 받으며 한 마디 했다고.

“국민 여러분, 우리나라는 엄연히 종교의 자유와 아울러 ‘성교’의 자유가 보장돼 있습니다!”

‘성교의 자유’라. 사람들의 은밀한 행위마저 마치 선심이나 쓰듯 자유를 베푼다고 공치사하는 것일까. 하긴 중앙아메리카 온두라스 같은 나라는 자기 집에서 담배 피우는 행위마저 근로자의 한 달 최저임금에 준하는 벌금으로 다스려 사생활마저 공적 관리 대상에 포함시켰다. 아니다. 그저 ‘선교(宣敎)의 자유’를 잘못 발음한 것이다.

한국 개신교계가 안팎으로 몸살이다. ‘이슬람채권법’을 힘을 저지하려다가 또 이명박 대통령 내외로 하여금 무릎 꿇게 했다가 거센 역풍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개신교단연합체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안에서는 그동안 누적돼 온 돈 선거 관행이 폭로돼 책임 소재를 둘러싼 극한 내홍에 휘말린 상태이다. 내부적으로 징계, 반발, 소송의 쓰나미에 뒤덮인 와중이다. 이뿐인가. 조용기 목사는 대통령 하야 운동 운운하다가 또 일본 지진 참사 때에 ‘하나님 안 믿어서 그랬다’는 실언 아닌 실언을 남기다 개신교 전체가 뭇매를 맞는 사태를 초래했다. 이런 가운데 교회 내 부당세습, 횡령, 재산다툼, 성추행 논란 등의 논란은 그치지 않는다. 타종교를 능멸하는 태도 역시 대표적 적폐이다. 이로써 한국 교회의 대사회적 권위는 실추 일로다.

결론부터 말한다. ‘성교의 자유’는 모르겠으나 ‘선교의 자유’ 향유를 자제하자. 여기서 선교란 교인 수 늘이는 것, 즉 전도를 말한다. 노방 전도, 축호 전도 혹은 학원, 직장 등에서의 일대일 전도 그리고 일부 대형교회가 자금력을 동원해 경차와 컬러 TV, 디지털 카메라와 세탁기 그리고 백화점 상품권 같은 경품을 내걸고 신자를 모집하는 이른바 경품 전도도 중단하는 것이다. 사실 선교의 자유는 헌법적 가치이니만큼 이걸 하위법과 각종 규제를 만들어 강제할 길은 없다. 그저 한국 개신교계가 스스로 규준화해야 된다.

선언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이참에 대형교회 지상주의를 탈피해야 한다. 흔히 교회 성장의 척도가 신자 수 아닌가. 이와 정비례하는 헌금, 교회 부동산 역시 성공 목회의 표징이다. 이 대한민국 땅에서는 등록교인수로 세계 1위인 여의도순복음교회(조용기 원로목사, 83만, 지교회 분립 이전)와 감리교회로만 한정할 경우 세계 1위인 금란교회(김홍도 원로목사, 12만)가 대표적이다.

물론 ‘큰 교회’의 정당성을 강조해 온 미국 캘리포니아 크리스털처치(수정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가 ‘성장 신화’의 원조이다. 김홍도 원로목사의 친형이며 ‘교회 세습’ 논란의 시발점이기도 했던 김선도 원로목사(광림교회)가 이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며 아들에게로의 교권 이양의 당위성을 설파했을 정도이다. 지금 그 교회는 어떻게 됐을까. 지난해 10월 17일 현지 법원에 파산 보호를 신청했다고 한다. 미국의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고 3년도 채 안 돼 붕괴된 것이다. 교회가 부도났다. 교회가 영적 기풍이 실종된 채 세속 조직화이 되면 발생할 수 있는 현상이다.

그래서일까. 성경은 이 모든 물량의 가치를  ‘썩어져가는 것’이라며 멀리할 것을 주문했다. 십 수 년 전부터 교회당을 짓지 않고 휴일 놀리는 학교 강당을 이용해 예배하는 교회가 늘고 있다. 주님의교회, 우리들교회 그리고 구 높은뜻숭의교회가 각각 그렇고 그랬다.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는 철학이다. 이런 사려에 100분의 1이라도 따라가려는 흐름이 절실히 요구된다.

그럴 필요가 있다. 교회에 대한 비판 정서는 비단 반개신교세력의 음모와 공작만으로 형성되지는 않는다. 교회에 과도한 잉여가 발생하고, 이에 고무된 목사들의 불필요한 권위 집중 또한 정치에의 욕망으로 번지는 것이다. 우선 급한 대로 더 이상의 세 확장을 않겠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선포해야 한다. 적당한 선은 없다. 극약처방이 답이다. 물론 세 확장에 눈이 어두워 자기 성숙 과정을 게을리 했다는 고백과 병행돼야 한다.

영화 ‘넘버3′에서 마동팔 검사(최민식 역)가 한 말이 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죄지은 새끼가 나쁘지, 죄가 무슨 죄야”라고 했다. 사실 선교가 잘못된 게 아니다. 원리로 따지자면 종교가 하는 공익적 사업은 전부 선교이다. ‘전도’의 목적을 앞세우지 않은 순수 사회봉사 또한 정치 개혁, 경제 정의 실천 요구, 환경, 평화, 통일운동 역시 같은 종류이다. 사실 오늘날 개신교가 직면한 존립의 위기는 선교의 의미를 세 불리기로 한정한데서 비롯됐다. 교인 수 배가에 대한 열망은 강한데 비해,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관념은 매우 부족하다. “주여, 일단 교인 수 불려 주시기만 하면…….” 이러며 신에게 백지수표를 요구하고 있는 형국이다.

사람 수 불리는 게 우선돼서는 안 될 중요한 이유가 있다. 몇 년 전 <주간동아>를 읽다가 스크랩한 내용이다.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일 전까지 이명박 대통령이 시무장로로 있는 소망교회의 주 단위 평균 새 신자 수는 35.8명이었다. 그러나 당선 직후인 2008년 1월 6일엔 101명, 13일엔 145명, 그리고 20일엔 68명으로 크게 늘었다.” 구차한  것이 지혜로운 것일 수 있다. 그 후로 소망교회 인사들이 다양한 요직에 발탁됐다. ‘고소영’ 인사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런 식의 교인 수 증가도 ‘선교의 열매’로 봐야할 것인가. 교회와 세속 사이에 있던 명징한 선이 날이 갈수록 흐려지고 있다. 이렇게 날이면 날마다 선교 선교 하는데 전체 개신교인 수는 갈수록 줄어든다. 1995년 876만여 명이던 것이 10년 동안 15만여 명이 증발돼 2005년에는 861만 명이다. 이 정도 규모도 대단하다. 따라서 무차별 세 불리기보다 관리 차원에서라도 내적 성숙을 기해야 한다.

해법은 ‘질적 선교를 하는 것’이다. 사 영리 쪽지를 보지 않아도, 성경책을 읽지 않아도 개신교가 하려는 ‘복음’은 이미 TV, 라디오, 인터넷, 신문을 통해 숱하게 전달 전파되고 있다. 굳이 옥외 소음 유발, 사생활 침해, 신념 강요 논란을 자초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역설적으로 질적 쇄신을 해야 한다. 선교하면 무조건 세 불리기로 규정되는 오늘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탐욕과 이기주의, 배타, 오만의 화신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욕심 없고, 이타적으로, 겸손한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그럴 때만이 내면은 물론, 예상치 못한 외면의 부흥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십 수 년 전 한 예비 목회자로부터 “직장 생활하는 성인 교인 30명만 모이면 대기업 부장급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면서 그들로부터 받을 것으로 추정되는 십일조, 일반헌금의 예상치를 시뮬레이션 했다. 꽤 그럴싸했다. 만남을 끝내며 이 사람에게 낮은 볼륨으로 한 말이 있다. “전도사님은 진정한 ‘삯군 목자’(돈에 집착한 거짓 목자)입니다”라고. 잘 안 들렸던 모양이다. 그는 “고맙습니다”라고 답했다. 지금 뭐하고 있을까?

김용민 / 시사평론가

* 이 글은 <한겨레신문>의 훅에 실린 글입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4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김철수 2011-03-24 01:00:51
각 교회가 멀리 해외만이 아니고 주위에 있는 어려운 어려운 분들을 위해서 "나누는 예산" "베푸는 예산" 을 세우는 균형잡힌 성숙함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건방진소리 죄송합니다. 좀 답답합니다.

김철수 2011-03-24 00:56:53
우리 이민 사회에 가정 학대, 우울증, 등등 심각한 어려움 속에서 치료도 못받는 분들을 위해서 열정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하며 사역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역들은 지교회들이 자체적으로 하기 힘든 사역입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십시일반 약간씩 지원해서 파트너가 되어주면 시너지를 발할수 있고 좋은 결과를 낼수 있는 사역들인데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김철수 2011-03-24 00:49:07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운 분들을 외면하면서 막대한 예산으로 숫적인 부흥을 위해서 무리한 건축하고, 해외 선교에는 무척 너그러우면서 우리 가까운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는것은 좀더 우리 교회들이 균형을 잡아야 할 부분이 아닐까요? 엄청난 교회 건물을 짓고 화려한 교회사를 경험하고 훌륭한 신학자들을 배출한 유럽 교회가 이제는 아프리카보다 더 힘든 선교지가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도 같은 길을 걷고 있을수 있습니다.

김철수 2011-03-24 00:43:06
저는 우리 한인 교회들이 이제는 좀 균형잡혔으면 좋겠습니다. 그동안 과도한 부흥을 제촉하면서 숫적인 부흥, 후세대 핑계 되면서 무리한 건축, 해외 선교 만능 사상 등등...그러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외면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 이라고 하셨고 고아와 과부등 어려운 사람을 교회가 돌보아야 한다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 주위에 어려운분들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