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성탄절은 어땠을까?
아우슈비츠의 성탄절은 어땠을까?
  • 김기대
  • 승인 2022.12.24 0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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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야만에 동원될 때

2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는 유대인 음악가들이 수용되는 감옥 ‘블록15’가 있었다. 학력이 높았던 아우슈비츠의 나치 장교들은 클라식 음악을 좋아해 이들이 연주하는 수준높은 음악을 즐겼다. 가스실로 끌려가는 길목에서 음악을 연주해주는 것도 들의 몫이었다.

죽음의 길목에서 주로 연주되던 음악은 폭스 트롯(Fox Trot)이었다. 폭스 트롯은 단순한 멜로디의 4박자 춤곡으로 1914년 미국의 해리 폭스(Harry Fox)가 만든 형식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구슬픈 곡조의 기존 트롯과 비교하자면 송대관의 '네박자 인생', 설운도의 '다함께 차차차'처럼 가벼운 춤이 가능한 곡이다. 죽음의 순간에 이런 음악을 연주하게 만든 나치의 잔인성에 또 한번 경악한다. 음악가들은 얼마나 괴로웠을까?  그들도  언젠가는 가스실로 끌려갔고 살아남은 사람은 얼마되지 않았다.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시몬 락스(1901~1983) 있었다.

시몬 락스의 증언에 따르면 어느날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나치의 명령에 따라 여성 병동의 환자들에게 그는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 주었다. 처음에는 여성들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고 울음 소리에 연주가 묻힐 정도였다. 그러나 번째 연주가 시작되자 눈물은 비명으로 이어졌다. “그만! 그만! 여기서 나가! 꺼져! 조용히 죽게 내버려둬! 음악으로도 위로될 없는 현실을 자각했던 것이다.

독일과 폴란드에 여러 개의 유대인 절멸 수용소가 있었지만 가장 규모가 것이 아우슈비츠여서 절멸 수용소의 대명사처럼 쓰이기도 한다. 글에서도 절멸 수용소를 통칭해 아우슈비츠로 부르려고 한다.

성탄절과 아우슈비츠, 극단의 개념이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땅에 예수를 기념하는 것과 가장 야만적인 방법으로 대량학살을 자행하는 짓은 나치로서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발상지로 루터교의 입김에 강하고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도 여전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유대인 예수와 반유대주의도 맞지 않았다. 유럽인의 의식 저변에는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생각이 중세 이후로 자리잡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는 것에 대한 반응도 궁금했다.  때문에 나치는 한 때 성탄절과 며칠 차이나지 않는 동지(Winter Solstice)에 대규모 축제를 계획하고 산타 클로스를 게르만 신 '보탄'으로 바꾸려고 했었다. 

그러나 나치의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나치의 국가주의(나치라는 말이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 였으니까) 교회건 일반 대중이건 쉽게 포획되어 갔고 유대인 절멸 기획에 별다른 국민적 저항이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는 모두 5번의 크리스마스가 있었다. 성탄절에서 별 의미를 찾지 못하는 유대인을 제외하고 폴란드인을  비롯한 소련군 포로들, 연합군 포로들은 어떤 방법으로든 성탄절을 기념하려 했지만 나치는 성탄절 조차 공포의 도구로 사용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Janina Tollik 의 그림 '크리스마스 이브'(1946).- 출처 Auschwitz Memorial 트위터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Janina Tollik 의 그림 '크리스마스 이브'(1946).- 출처 Auschwitz Memorial 트위터. 시체 소각로는 성탄절에도 검은 연기를 뿜어내고 있다. 

 

1940 12 24 수용소의 번째 크리스마스 이브, 광장에 설치된 전등이 달린 성탄절 트리 밑에는 작업 사망하거나 얼어 죽은 수감자들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나치는 시신을선물이라고 불렀다.

1941 크리스 마스 이브에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수용소 건설을 위해 노예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소련군 포로 300명을 사살했다. 그날 저녁에는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장에 모인 수감자들은 독일어로 낭독되는 교황 비오 12세의 크리스마스 이브 선언문을 들어야 했다. 42명의 수감자가 추위에 쓰러졌다. 자신들의 구역으로 돌아간 폴란드 수감자들은 수용소에서 독일 캐롤을 틀어주자 자기들끼리하나님이 태어났고 그의 권능이 진동한다 시작하는 폴란드 캐롤을 부르며 서로 부둥켜 안고 울었다.

 

1942년에도 성탄절 트리 밑에 시신을 두는 만행을 저질렀다. 더군다나 시신은 트리를 세우기 위해 코트에 흙을 담아 나르던 수감자들이었다. 나치는 흙의 양이 적은 수감자들을 즉석에서 사살하고 시신을 트리 밑에 두었던 것이다. 예수 탄생에 의미를 두지 않는 유대인들을 일종의 제물로 바친 것이다.

반면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 수감자들이 수용된 블록 18a에서는 수감자로 있던 가톨릭 사제가 성찬식을 거행했다.

1943 11월에 수용소에 새로운 사령관(Arthur Liebehenchel) 부임한 조금 상황이 개선되었다. 시신을 성탄절선물 받는 일은 없어졌고 일부는 가족으로부터 소포로 받은 성찬용 빵을 유대인을 포함한 다른 수감자들과 나누었다

1944 성탄절 전야에는 수감자 신부( Władysław Grohs de Rosenburg) 인도로 자정 미사를 거행했는데 수용소측은 묵인해 주었다. 여성 수감자들은 200개의 장난감을 바느질하여 병원 어린이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 뒤 여성 명이 산타 클로스 복장을 하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나누어 주었다. 유대인을 제외한 인종에게는 '비교적' 너그러웠던 나치였다.

마침내 1945 1 26 아우슈비츠는 소련군에 의해 폐쇄되고 수감자들은 자유를 얻었다.

로고테라피로 유명한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은 그의 아우슈비츠 경험을 담은죽음의 수용소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수용소 주치의에 말에 의하면, 1944 성탄절부터 1945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의 사망률이 일찍이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기간 동안 사망률이 증가한 원인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조건이나 식량사정의 악화, 기후의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떄문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수감자들에게도 독일의 패전이 가까워졌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전달되었을 , 성탄절이 지나면 집에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소식이 없자 스스로 무너져 내린 것이다. 1 16일에 나치가 아우슈비츠를 폐쇄했고 26일에 소련군이 모든 수감자를 석방했다. 며칠만 견뎠어도 그들은 집에 있었는데 말이다.

아우슈비츠 성탄절이 만든 다른 형태의 비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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