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없앤다고 달라지나?” 영화 속 물음 현실에도 유효하다
“독재자 없앤다고 달라지나?” 영화 속 물음 현실에도 유효하다
  • 지유석
  • 승인 2023.01.04 0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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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980년대 배경 첩보액션극 이정재 감독 데뷔작 ‘헌트’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헌트>를 뒤늦게 봤다. <오징어게임>으로 월드스타 반열에 오른 배우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으로 지난해 8월 개봉 당시 많은 화제를 모았다. 

영화 속 총격신은 초보 감독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멋지다. 도심 속 총격전의 장인 마이클 만 감독에 비추어도 손색없다고 본다. 다만 첩보물 특유의 긴장감이 떨어지고 설정이 다소 어색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지금 보니 영화 속 메시지는 지금 시국과 묘하게 맥이 통한다. 

이미 개봉 후 4개월이 지난 시점이라 웹이나 소셜미디어 상에 줄거리가 대부분 노출된 상태라 스포일러를 대방출해 본다. 

영화는 학생운동과 간첩조작이 횡행했던 1980년대. 이 영화의 시대적 설정은 배우 이정재의 출세작 <모래시계>와 묘하게 겹친다. 

국가안전기획부(아래 안기부) 국외파트 총책임자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파트 총책임자 김정도(정우성)은 대통령 암살을 기도한다. 하지만 처음에 이들은 서로의 의도를 몰랐다. 그러다 내부첩자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목적이 일치함을 발견한 것이다. 

영화 속 김정도는 특전사 장교로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광주를 짓밟고 권력을 찬탈한 대통령을 증오하기 시작하고, 동료 장교와 함께 대통령 암살작전을 모의한다. 

그런데 김정도가 안기부에서 맡은 임무는 간첩조작이다. 간첩조작을 지휘하던 인물이 광주 학살을 이유로 대통령을 증오하다니, 설정이 어딘가 어색하다. 

김정도가 어떻게 국내파트 총책임자로 영전할 수 있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인물 설정은, 김정도가 최고 권력자의 신임을 얻기 위해 내키지는 않지만 간첩조작을 지휘한 것으로 유추할 뿐이다. 

반면 박평호는 북한과 줄을 댄 이중첩자다. 안기부 국외파트 총책임자라면 영국으로 치면 MI6 부장이다. (국내 방첩업무는 MI5가 맡는다) 이런 지위에 있는 인물이 북한 이중첩자라니, 인물 설정은 김정도만큼 파격적이다. 

더욱 파격적인 건, 김정도와 박평호가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다는 설정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 박평호는 마음을 바꾼다. 박평호가 이중첩자란 위험천만한 임무를 수행하는 건, 남한 독재자를 제거하면 북한 쪽 온건파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하지만 북한 쪽 상황이 심상찮다. 북한 쪽에선 남한 대통령 암살과 동시에 대규모 군사작전을 획책하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박평호는 김정도와 대립하게 되고, 이내 두 사람은 적으로 만난다. 

김정도 vs 박평호 대립구도, 파격 또 파격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 ‘헌트’ 스틸컷 Ⓒ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김정도는 숨이 끊어지는 순간 박평호에게 절규하듯 묻는다. ‘왜 그랬어’라며. 박평호는 그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다만 김정도를 살리기 위해 온 힘을 쏟는다. 

김정도의 분노도, 박평호의 절제도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박평호에게 더 힘을 실어주고 싶다. 

김정도의 의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박평호는 옳은 선택을 했다. 남북 화해를 목표로 이중첩자 노릇을 했지만 대통령 암살이 오히려 전쟁위기를 불러 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평호는 김정도에게 이렇게 묻는다. 

“독재자 한 명 없앤다고 달라지나?”

이 대사는 묘하게 2022년을 지나 2023년을 맞는 한국 정치전반에 깊은 울림을 던져준다. 지난해 5월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법을 무기 삼아 국민 위에 군림하는 행태를 일삼고 있다. 이에 맞서 거리에선 윤석열 퇴진을 외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모양새다. 

이 정부의 행태를 볼 때, 조속한 퇴진이 더 바람직하지 않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러나 삿된 권력자를 끌어내린다고 절로 다른 세상이 오지 않는다는 걸 2017년 3월 탄핵과 대통령 보궐선거에 뒤이은 5년의 시간을 통해 체험했다. 

또 설혹 현 정부 퇴진에 성공한다 한들 더 큰 파국이 올 여지도 고려해야 한다. 현 한국정치 상황의 문제는 삿된 권력자를 대신할 선하고 능력을 갖춘 정치세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의 메시지를 과도하게 왜곡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독재자 한 명 없앤다고 달라지나?”고 묻는 박평호의 질문은 지금 현실정치에서 분명 곱씹을 가치가 충분하다. 

한편, 극중 김정도와 대통령 암살을 모의하던 장교들이 박평호의 실체를 알자 술렁인다. 한 장교는 이게 혁명이냐고 김정도에게 따져 묻는다. 이러자 김정도는 이렇게 답한다.

“이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총칼로 국민을 짓밟고 유린한 폭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검사 출신 대통령이 집권한 지금 시절을 생각하면 김정도의 대사를 이렇게 바꿔도 좋을 듯하다.

“이것은 혁명이 아닙니다. 법으로 국민을 짓밟고 유린하는 폭력을 멈추는 것입니다 !”

영화 <헌트>가 던지는 문제의식, 놓쳐선 안 될 일이다. 데뷔작부터 묵직한 물음을 던져준 이정재 감독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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