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시’의 예언, 교회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밴시’의 예언, 교회라도 해야 되는 것 아닌가?
  • 김기대
  • 승인 2023.03.23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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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vs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vs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영화의 장르를 누가 구분하는지 모르겠지만이니셰린의 밴시’(감독 마틴 맥도나, 2022) 장르는 코미디다. 우스운 곳이라고는 한군데도 없는데도 말이다. 비극으로 분류되어도 부족하지 않을만큼이니셰린의 밴시 아프도록 슬픈 영화다.

아일랜드의 외딴 작은 섬인 이니셰린의 1920년대가 소재다. 멀리 본토, 그들의 나라인 아일랜드도 섬나라지만 이니셰린의 사람들은 아일랜드를 본토라고 부른다에서 들려오는 전쟁 포화 소리에 아랑곳 않고 섬은 평온하다. 그런 점에서 섬에 가고 싶다(감독 박광수, 1993)’ 보다는 비극적이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을 흔드는 사건이 발생했다.

섬에서 둘도 없는 절친으로 매일 정해진 시간에 마을 펍에 가서 맥주와 수다를 즐기던 파우릭과 콜름의 사이가 틀어진 사건의 파장이 마을 전체를 휘감았다. 그랬듯이 젊은 파우릭이 나이 콜름의 집을 방문해서 펍에 가자고 권하고 둘은 걸어가면서, 펍에서, 돌아오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을 , 하지만 영화는 그들의 좋았던 시절을 장면도 보여 주지 않는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

난데 없는 콜름의 절교선언에 당황한 파우릭의 안절부절과 사이를 바라보는 주변 사람들의 우려 섞인 시선이 그들이 얼마나 가까운 사이였는지를 보여줄뿐이다. 어른들의 원인을 알수 없는 절교, 그에 따른 콜름의 비장함과 파우릭의 안절부절 상황이 웃겼나? 장르를 코미디로 분류한 사람의 수준에 다시 한번 절망한다.

파우릭은 자신이 술을 마시고 헛소리를 것은 없는지 자책하며 콜름에게 다가 가지만 콜름은 냉정하게 철벽 방어를 한다. 오히려 파우릭에게 네가 술을 마시고 주정을 들을 이야기가 많았다면서 삐침과 오해가 절교의 계기가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콜름에게 갑자기 우울증이 찾아온 것도 아니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그는 펍에 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파우릭만 멀리하니 파우릭도 미칠 노릇이다. 다만 콜름은 자신이 다룰 아는 악기 바이얼린을 이용해 작곡을 해야하기에 파우릭과 노닥거릴 시간이 없다는 생각은 밝혔었다.

끊임없이 다가가려는 파우릭을 향해 콜름은 네가 나를 귀찮게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자르겠다고 선포하지만 파우릭이 설마하자 스스로 자른 손가락 하나를 건넨다. 콜름은 바이얼리니스트에게는 치명적인 손가락 하나를 진짜로 잘라 버린 것이다. 작은 섬마을에서 어쩔 없이 마추치면서 콜름의 작은 행동을 우정이라고 착각한 파우릭은 콜름을 찾아가 모두 이해할 있다며 일장 연설을 늘어 놓는다. 젊은 사람을 향한 나이 사람의 훈계도 역겹지만 나이든 사람을 향한 젊은 사람의 훈계는 같잖다. 이틑날 개의 손가락이 파우릭 앞에 던져진다. 누구에게나 이유없이 외로울 권리는 있다. 권리를 무시한 사건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고 믿는 파우릭의 오지랖이 콜름을 손가락 없는 바이얼리니스트로 만들었다.

마틴 맥도나 감독은 끝내 절교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지만 본토에서 들려오는 전쟁 소리를 아이셰린의 남자 사이의 절연이라는 우화를 통해 풀어낸다. ‘아이셰린의 밴시 나오는 전쟁 소리는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감독 로치, 2006년)'에 나오는 전쟁 소리다.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네가 싸우는 적이 누군지는 알기 쉽지만, 네가 싸우는지는 알기 어렵다(무엇에 반대하는 것은 알기 쉽지만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는 어렵다)"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명대사다. 싸움이 아이셰린 남자의 싸움을 설명한다. 콜름은 이제 파우릭과 친구하기 싫지만 인지는 자신도 모를 것이다. 음악 연주를 위해서라는 절교 원인은 그럴듯 하지 조차 못한 거짓 명분이다.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아일랜드 내전을 다룬 영화다. 1918 아일랜드 선거에서 다수 의석을 확보한 신페인(‘우리 자신’이라는 )당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영국의 수탈과 핍박은 심해졌고 그에 따라 아일랜드인의 저항도 과격해 졌다. 아일랜드 독립군에서 활동하던 형제 테디와 다미안은 지주의 고리대금 재판에서 의견이 갈린다. 테디는 독립 자금 조달을 위해서는 자본가의 도움을 필요로 해야 한다는 입장이고 다미안은 지주 자본가는 모두 인민의 적이라는 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조국 해방을 위해 싸우던 형제 사이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른 뒤 영국과 아일랜드는 전쟁을 끝내는 것에 서명하면서 얼스터(지금의 북아일랜드) 영국령으로 그대로 남겨두고, 아일랜드는 완전 독립국이 아니라 자치령으로 두는 조건에 합의했다여기서 그 동안 함께 싸우던 아일랜드 독립군의 의견이 나뉜다. 테디는 부분적인 성취지만 일단은 받아들이자는 조약 찬성파에 섰고, 다미안은 친영세력들을 척결하자는 반대파에 몸을 담았다.   

조약찬성파(아일랜드 자유국 국방군) 반대파(IRA) 1922년에서 1923년까지 벌인 전쟁이 아일랜드 내전이다. 오랜 독립군 생활을 하던 테디는 온건파가 되어 조약에 찬성하고, 시끄러운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에서 의사로 성공하고 싶었던 동생 다미안은 방향을 바꿔 강경 반대파의 리더가 되었다가 결국 형에 의해 동생은 사형당한다.

아이셰린 섬에 멀리서 들려오던 전쟁 소리는 소리다. 콜름은 젊은 시절 본토에서 오직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싸우던 독립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국군에 체포되었다가 동료의 이름을 팔았을 수도 있다. 과거는 없지만 아무튼 무슨 사연을 안고 섬에 들어 왔을 수도 있고, 섬밖으로는 나간 적도 없는 토박이지만 영국군과 싸우는 전쟁이 아니라 아일랜드인끼리 싸우는 전쟁에 크게 실망했는지도 모른다.

형제끼리 사형선고를 내리거나 받아야 하고(보리밭은 흔드는 바람), 동족이 상잔하는 전쟁을 멀리서나마 지켜 밖에 없는 현실에서 맥주나 마시고 수다 떠는 콜름 자신이 어느날 갑자기 초라해 보였을 것이다. 젊은 시절 농민가나 혁명가를 연주했을 법한 바이얼린으로 이제는 다 잊고 서정적인 노래를 연주하고 싶다.

하지만 다시 시작한 연주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콜름 파우릭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손가락을 자른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 것이다. 잘려진 손가락은 파우릭이 아끼던 나귀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다. 이것 역시 전쟁의 우화다. 자기 희생이 고작 가져온 결과는 다른 이가 아끼던 존재의 죽음이었다. 콜름 연주할 없게 손으로 바이얼린을 허공에 흔들면서 만족해 한다. 일종의 자위행위다. 그래도 전쟁을 하자고 부추기는 소리보다는 자위와 단지(斷指) 낫다.

밴시는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의 민화속에 나오는 요정으로, 가족의 죽음을 울음으로 예고하는 존재다. 무녀같은 마을의 노파는 밴시의 우는 소리가 들리므로 아이셰린에서 개의 죽음이 있을 것이라고 예고한다. 하나가 파우릭이 아끼던 나귀의 죽음이다.

2023 한반도의 밴시는 누구인가? 휴전한지 70년이나 되는 전쟁을 종전하지 말고 다시 싸우자고 권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미일한'(최근 대한민국은 스스로 위상을 제일 뒤에 두는 결정을 했다) '북중러'가 서로 형제를 죽여야 우리가 산다고 백성들을 유혹할 그러면 죽어!’ 외치는 밴시의 울음 소리는 누가 것인가? 설마 우리가 아는 무녀는 아닐거고, 그러면 교회라도 내야 되는데 교회는울음없는 죽음만 예고하는 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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