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 농담 속에 안식하소서
밀란 쿤데라, 농담 속에 안식하소서
  • 김기대
  • 승인 2023.07.14 01: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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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선배 얀 후스와 경건한 단순함을 나누시기를

1989 영화프라하의 보기 전까지 부끄럽게도 당신을 몰랐습니다. 영화의 원작인 당신의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 통해 당신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방대한 분량의 책도 읽지 않은 상태 였습니다. ‘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는 번역이 맛갈지다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지요.

당시 한국의 시대 분위기는 넬슨 만델라를 먼저 기억해야만 했던 탓에 당신 이름은 항상 만델라와 중첩되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을 보낸 지금 당신의정체성 제가 재미있게 읽은 목록에 남아 있으니 너무 탓하지는 마십시오.

한국에서 영화 제목을 붙였나요? 68년도에 겪은 프라하의 실패를 다룬 정치 영화인 알고관람 당위성(재미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의 다른 표현)’ 듬뿍 담아 갔었는데 영화 내용에 놀랐습니다.

당신이 1995 시사저널과 인터뷰도 했으니 한국을 안다고 전제하고 그냥 하고 싶은 넋두리를 펼쳐 보겠습니다. 1989 대한민국은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애매한 해였습니다. 1987 6 항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이뤄냈지만 결과물은 노태우였습니다. 1987 체제의 뭔가싸다 느낌 간직한 현실에 안주한 사람들, 이만하면 됐다라던 성취주의자들, 이제 본격적으로민족 문제를 풀어보자며 무거움을 계속 안고 가려던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세상은 애매함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1987 체제의 애매함을 가장 담은 결과물은한겨레 신문입니다. 민족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신문 제호로 삼은 패착은 아직까지 이어져 민족도 없고 계급도 없이 길을 잃고 오직 무거움만 지닌 시국도 양비론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나에게 즐겁고 가벼운 혁명을 보여 줬습니다. 위대한 프랑스 대혁명보다 프랑스 68혁명을 좋아하는 취향의 시원이 되는 영화이기도 했습니다. 시대가 참을 없이 가벼워졌는데 혁명은 항상 무거워야 하나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는 아직도 당신이 옛날 던진 화두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정체성 타자, 대타자의 개념을 재밌게 풀어낸 소설입니다. 여성의 타자가 되지 못하는 남성이 대타자가 되어 여성에게 기쁨을 주는 설정, 그러나 여성이 대타자에 지나치게 몰입하자 자신이 설정한 대타자에 질투를 보내는 초라한 타자가 되어 버리는 기괴함에 놀랐습니다. 라캉의 개념을 지젝이 철학과 문화의 영역까지 끌어와 대중화시키기끼지 당신에게 빚진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말한 '정체성 읽다보면 지젝의 어느 책에선가 읽은 농담이 생각납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여배우와듣보잡남성이 함께 밤을 보낸 남성이 여배우에게 자기 친구 모습으로 분장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여배우는 별난 부탁도 있다 생각했지만 무인도에서 다른 오락도 없던 터라 남성이 요구한 모습대로 분장해 줍니다. 남성은 자신의 친구로 변장한 여배우의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 여배우 아무개랑 잤잖아!”. 남성에게는 여배우랑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 이들(타자)에게 알려지는 좋았던 겁니다. 나아가서여배우 아무개랑 대단한 일반인이라는 사회(대타자) 평가가 그를 만드는 겁니다.

그래서 지젝은성관계는 없다라는 책을 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지젝이 구사하는 가벼운 농담의 메시지들은 결코 가볍지 않아 그것 역시 당신의 농담 개념에서 빌려온 합니다.

정체성 대타자의 이름시라노 한국 영화시라노, 연애 조작단’(감독 김현성, 2010) 통해서도 알려졌으니 한국 사회에서 이래 저래 당신은 많은 족적을 남겼습니다.

마틴 루터보다 100여년 앞서 종교개혁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후스(1369-1415) 당신의 고향(체코의 모라비아 지역) 선배더군요. 당신이 싫어하는 민족과 종교라는 개념의 결합으로 후스와 당신을 엮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후스도 그렇게 무겁기만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프라하에서 화형을 당할 농부가 후스 묶인 화형틀을 향해 열심히 장작 더미를 나르고 있었습니다. 이단자를 처형하는데 일조하겠다는 그런 마음보다는 그냥 일을 하는 것었겠지요.

후스는 그를 향해 거룩한 단순함이여! (O sancta simplicitas)”라고 외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가톨릭에 매몰된 무지한 중생을 향한 안타까움이라고 해석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순함, 얼마나 좋습니까? C.S 루이스도 단순한(순전한) 기독교를 좋아하지 않습니까?

얀후스의 외침은 이렇게 단순한 믿음을 가톨릭 교회는 그렇게 어렵게 설명하느냐는 비아냥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루터는 가톨릭의 복잡한 교리체계를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버리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도 죽음의 현장에서도 농담을 했던 후스와 당신은 통할 같습니다.

이제 그곳에서 분이서 만나 서로 농담도 나누고 동물 이야기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후스는 화형틀 위에서 거위(후스라는 이름의 ) 죽지만 100 뒤에 백조(사람들은 마틴 루터라고 생각함) 나타나서 개혁을 완수할 것이라는 은유도 남겼습니다. 당신은참을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반려견카레린 등장시킵니다. 카레린은 톨스토이의 소설안나 카레리나에서 안나의 남편이름인데 여기서는 만들어 버렸습니다. 역시 당신입니다.

아무튼 존재의 가벼움도 무거움도 느끼지 못하는 그곳에서 후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시면서 시간과 공간과 중력을 유영하며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1929년생이시군요. 같은 태어난 어머니도 지난 4 별세했습니다. 혹시 마주치시면 안부 전해 주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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