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에서 봉길은 왜 글자 문신을 했나?
파묘에서 봉길은 왜 글자 문신을 했나?
  • 김기대
  • 승인 2024.04.03 04: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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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말뚝을 문제 삼는 이들이 놓치고 있는 것

‘파묘’(장재현 감독) 오컬트 영화의 문법을 따르지만 두려움만으로 쉽게 있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 초반 LA사는 한인 부자의 요청으로 무당 이화림(김고은 ) 법사 윤봉길(이도현분) 미국으로 향한다. 이화림과 윤봉길은 모두 독립운동가의 이름으로 역사 사람은 윤봉길의 훙커우 거사 당시 의심을 피하기 위해 위장 부부로 활동했었다. 영화에서도 둘은 부부는 아니지만 부부 이상의 끈끈한 관계를 보여준다.

선교사들이 세운 평양의 숭현학교에서 공부한 이화림은 중국으로 건나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조선 공산당에 가입한 것을 계기로 김구와 결별하며 조선민족 혁명당에서 본격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한다. 해방후에는 중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해 의사로 활동하다가 별세했다.

대단한 부를 소유한 LA 한인집안에 흐르는 저주의 탓을 화림은 묫바람(묘를 잘못 써서 일어나는 후환들)으로 분석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활동하던 풍수사 김상덕(최민식 ) 장례업자 고영근(유해진분) 함께 저주의 근원이 되는 묘를 파묘하기로 한다 김상덕은 초대 반민특위위원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의 이름이고 고영근은 조선말기 관리로 명성황후 민비의 시해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시해에 참여한 우범선을 척살한 사람이다. 그는 고종의 무덤(홍릉) 지키는 묘지기를 자처하며 일제의 억압으로 비문없는 비석이 되어버린 고종의 묘비에 글을 넣었다. 극중 고영근이 운영하는 장의사는 의열단을 연상케 하는 의열장의사다. 감독은 단순히 독립운동가의 이름만 차용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활동까지도 염두에 두고 작명했다.

이화림은 무당이지만 가문에 흐르는 저주를 끊고 저주를 초래한 자의 4대손, 결국 파묘하기로 배경이 되는 아기의 목숨을 건졌다는 점에서 실제 이화림이 의사였음을 고려한 작명이다.

영화는 친일의 배경을 가진 무덤에 갇힌 자와 그의 무덤을 이용한 일본의 한반도 재지배 전략과 쇠말뚝, 일본 귀신과 한국 무당의 싸움을 통해 현재 한국에도 여전히 작동하는 일본의 영향력을 다룬다. 특이하게 한국은 보수세력이 일본의 영향력을 끌어들이는 묘한 구조를 가진 사회이기 때문에 영화는 시사하는 바가 많다.

무당, 법사, 풍수사, 장의사 4명의 콤비가 거대한일본 귀신 싸우는 과정에서 생사를 넘나들지만 결국은 이겨낸다는 스토리다. 일본 정신과 싸우는 것은 단순히 반일하자는 의도가 아니다. 독일도 2 대전 당시 제국주의의 본진이었고 극중 박지용(무덤 주인의 3대손) 친일귀신에 빙의되어 나치식 경례를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김상덕은 독일인을 사위로 맞는다. 현재 나라와 백성이 문제가 아니라 전범국으로서의 과거가 문제라는 것을 감독은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일본 귀신은 무엇인가? 재무장화를 추진하는 일본에 적극 동조하는 행위, 징용과 종군 위안부가 자발적이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어릴 일본은 깨끗하고 아름다웠다는 누군가의 기억 등이 일본의 귀신이다. 퇴마(退魔)하기 가장 힘든 귀신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그래서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서일본의 지배를 받은 것은 축복이었다’, ‘이토 히로부미같은 인재를 키워야 한다 말들이 서슴지 않게 나오는 세상을 사람들은 보고 있다. 귀신에 홀린 일부의 사람들은 현혹되어 그들에게 투표한다.

쇠말뚝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조선의 맥을 끊어놓기 위해 곳곳에 박아 놓았다는 쇠말뚝 서사는 물론 사실이 아니다. 영화는 말뚝을 뽑으려고 했다는 독립운동 단체 철혈단(鐵血團) 소환한다. 철혈단이 존재했던 단체는 맞지만 실제로 일을 했는지는 기록이 없다. 그래서 일부 식자(識者)들은 쇠말뚝이 일본이 토지 측량을 위해 박아 놓은 것일 뿐이라는 사실(史實) 지적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분석에는 일관성이 상실되어 있다. 다른 부분에서는 영화적 장치를 인정하면서 굳이 쇠말뚝에 대해서는 그렇게 사실성을 강조하는가? 1000만을 훌쩍 뛰어넘은 관객들을 모두 쇠말뚝 서사에만 열광한 사람들로 보는 그들의 이중성이 역겹다. 측량을 위해 박아놓은 쇠말뚝은 식민지 조선에 죄가 없는 물건인가? 그것은 식민지 근대화론에 동조하는 일이다. 쇠말뚝이 근대식 토지 측량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일로 수탈이 일어났는데 그것을 외면하니 말이다. 영화 평론가들이 의견을 모으는 것처럼파묘 오컬트 영화로서도 수작(秀作)이어서 것이고 쇠말뚝 서사가 역사와 맞지 않더라도 오늘의 대한민국 현실에 비추어볼 반일서사가 흥미를 유발해서 뿐이다.

화림과 봉길은 이러한 귀신을 막기 위해 목숨을 건다. () 있는 귀신 보다야 혼과 () 가진 인간이 강하다고 화림은 이야기하지만 혼과의 대결은 목숨을 걸만큼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라캉은 모든 이데올로기(他者) 영향력을 벗어나는 실재계에 틈입(闖入)하는 일을 죽음 충동이라고 불렀다.

 

극중 봉길의 몸에는 글자가 문신되어 있다. 영화 말미에 힘겨운 싸움을 함께 하는 화림과 상덕도 급한대로 얼굴에 글을 그려 넣었다. 글이었을까? 글은 ‘태을보신경 일부다. 제목으로만 보자면 나를 지키는 일이지만 나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외부의 삿된 것들과 대적한다는 이야기다. 일본 귀신이 봉길을 공격할 귀신같이 글자가 없는 부분만 노렸다. 그래서 상덕과 화림도 귀신과 대적할 얼굴에 글을 넣었던 것이다.

조르조 아감벤은불과 ’(윤병언 옮김, 책세상)에서 글쓰기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여기서 불은 신비를 의미하는데 신비가 사라진 세상, (쓰기) 신비를 전승한다며 글쓰기에 대하여 언급한다. 봉길은 그리고 화림과 상덕은 퇴마와 굿의 신비 속에 글을 가져온다. 팔만대장경은 몽골의 침략을 막아야 하는 시기에 만들어졌다. 봉길의태음보신경문신은 외적의 침략을 막아야 한다는 이런 정신과 맥을 같이 한다.

그라마톨로지(문자학)’ 자크 데리다의 개념이다. 데리다에 따르면 문자언어는 음성언어의 2차적 개념이다. 다시말해 누군가가 말한 것을 글로 옮겼기 때문에 음성이 먼저다. 데리다는 구도를 깨뜨린다. 음성언어 이전에 문자언어(알파벳과 같이 기호가 있는 문자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가 있었다는 것이다. 음성언어 보다 먼저 사람의 표정을 읽고 자연의 변화와 하늘의 별자리를 독해하던 원시인류의 삶에서 문자언어의 1차성을 찾아낸다. 이런 작업을 통해 데리다는 로고스 중심주의를 해체했다. 쉽게 말하면 로고스(계몽, 이성, 합리)보다 신비와 행위가 먼저 있었다는 것이다. 쇠말뚝의 본래 용도가 측량용이라는 것이 음성언어의 2차 산물인 텍스트라면 그것을 가지고 분개했을 식민지 조선인의 몸에 새겨진 분노는 그라마톨로지다.

그러므로 봉길의 몸의 글자 문신은불과 함께 하는 행위이며 로고스 중심주의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창조적 또는 저항적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치다. 나는 장재현 감독이 아감벤의불과 개념이나 데리다의그라마톨로지개념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고 확신한다.

데리다는 요한복음 1 1절의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있었다는 말을 로고스 중심주의의 대표적인 문구로 말하지만 그는 말씀이 육신이 것은 간과했다. 봉길에게 있어서 말씀이 육신은 되지 못했지만 말씀이 몸에 기록되어 행위(굿)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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