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막이 된 교회
초막이 된 교회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4.04.05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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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갑자기 목사님 한 분을 만났다.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전화기가 울렸다. 갑작스런 만남이었다. 대화 중 우리가 함께 알고 있는 목사가 천 명 정도 모이는 교회의 목사로 청빙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목사는 유학을 마친 후 모진 고생을 했다. 소식을 듣는 순간 그 목사의 고생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잘 된 일이다. 그러나 또 한 사람이 일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러움이 아니다.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청빙을 받을 때가 지났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주님은 내가 그렇게 청빙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막아주셨다. 그것은 내가 주님의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나를 인도하신 것이다. 주님의 친구가 된다는 것은 주님이 하신 일과 하시려는 일의 의미를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게 나는 별 볼일 없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친구가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내가 받은 은총 가운데 가장 감사한 일이라는 사실을 나는 안다.

나는 그동안 여러 사람이 교회의 목사가 되어 신앙인이 아니라 교회의 일꾼이 되는 것을 보아왔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었다. 모든 목사에게 교회는 우상이 되고, 그런 목사들에게 교회의 일은 하나님의 일로 여겨진다. 그들은 교회를 위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자신의 삶을 칠십까지 바치고 은퇴한 이후에는 안식을 누리거나 사람들의 칭송을 듣기 원한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의 일이라 여겼던 교회를 위해 하는 일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정확히 헤롯의 누룩이 된다. 나는 헤롯의 누룩에 대한 여러 해석에 대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해하는 헤롯의 누룩은 ‘일 중독’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내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그 일에 매료되어 만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은 정확하게 ‘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란 데리다가 말하는 것처럼 “불가능성에의 열정”이다. 가능한 것에 도전하고 가시적인 무언가를 함으로써 자신의 업적을 쌓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가인의 일일 뿐이다.

구조적으로 오늘날의 그리스도교는 헤롯의 누룩을 조장하고 있다. 물론 바리새인의 누룩 역시 헤롯의 누룩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을 지옥의 자식들로 만든다. 헤롯의 누룩과 바리새인의 누룩은 서로 다른 하나를 이룬다. 목사가 되어 교회를 맡는 순간 목사가 헤롯의 누룩에 빠지고 마는 구조적인 함정은 교회가 조직이 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조직의 장상으로서 목사는 누구라도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누룩에 감염될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더 잘 생각해보라. 나는 모진 고생을 하던 청빙을 받은 목사가 안정을 찾고 잘 살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모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인의 성을 하나 차지하는 것이다. 가인의 성에서 목사는 성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만 그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일 뿐이다.

나는 예배를 멈추고 지금 내가 진정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청빙이 아니더라도 내가 주도하는 교회는 결과적으로 조직이 되어 가인의 성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스스로 개척한 교회는 더욱더 그러한 사실이 두드러진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제자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시면서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 감사한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다. 그러나 그 일에 인간의 노력이 더해질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전지전능하심과 스스로 충족하실 수 있는 능력을 인간을 위해 포기하신다. 예수님에게는 제자들이 잡은 생선이 사실상 필요 없다. 이미 생선은 구워져 있었고, 생선이 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생선을 만드실 수 있다. 하지만 주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라고 말씀하심으로 제자들에게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다.

나는 이 장면이 참으로 감격스러운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이 잡은 생선 153마리를 다 가져오라고 하지 않으신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인간이 하나님의 일에 조금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과 다른 하나는 남은 생선들을 다른 사람을 먹이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에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인 하나님 사랑과 첫째 계명과 똑같이 중요한 둘째 계명으로 이웃사랑에 대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언제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똑같이 이루어진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로서의 아침에 제자들의 생선을 사용하심으로써 제자들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신다. 그리고 남은 생선을 가지고 제자들로 하여금 이웃 사랑을 행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셨다.

오늘날 교회는 교회의 존재 의미가 사회를 섬기는 것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을 하는 경우에도 교회가 사회를 섬기는 일은 미약하기 이를 데 없다. 교회는 스스로의 존립을 위해 거의 모든 자원을 사용하고 사회를 섬기는 일에는 그야말로 조족지혈인 자원만을 사용한다. 또 그렇게 하는 경우에도 그것은 섬김이 아니라 자선이나 시혜를 베푸는 통치 내지는 선전의 차원이다.

실제로 교회가 사회를 섬기려면 그들 자체가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한다.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는 유기체로서 하나님 나라인 공동체다. 그곳에서 나눔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돕는 자와 도움을 받는 자가 구분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매와 형제들로서 다만 서로 사랑할 뿐이다.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사랑할 때 그들은 그들이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던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이런 일은 교회를 벗어나야 가능하다. 교회는 우상이 되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드린다. 아무리 많은 것을 빨아드려도 그것이 다시 나오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오게 되는 경우도 그 모든 것이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이 될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이런 말이 교회의 목사가 된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는 다만 쇠귀에 경 읽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일이 내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일 뿐이지만 이 소리는 선포되어야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목표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산에서 변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베드로가 짓자고 하던 초막을 짓는 것이 되었다. 소유를 나누는 사랑의 공동체인 교회가 되려면 먼저 초막이 된 교회를 허물어야 하는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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