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국수집과 하나님 나라
민들레국수집과 하나님 나라
  • 최태선 목사
  • 승인 2024.04.06 05: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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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가지는 가장 잘못된 사고는 자신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 교회를 잘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생각을 해보라. 이렇게 하지 않는 교회가 과연 있는가?

하지만 그것이 잘못된 사고라는 생각을 하는 이들 역시 없다. 그래서 교회의 불행은 반복된다. 목사가 교회의 중심이라는 사고가 불식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질 기미도 없다.

나는 예배를 드리지 않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집안일을 하게 되었다. 내가 요리를 하고 아내는 그것을 먹은 후 뒷정리를 한다.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뒷정리가 더 힘들다는 생각을 한다. 비교의식에 절어 있는 것이다. 어느 것이 힘드냐를 비교하는 것은 경쟁에서 비롯되는 사고이며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개인주의적 사고의 발로다.

나는 오래 전부터 교회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도 다른 사람이 하기를 원하면 그 사람이 그 일을 나보다 잘 못하더라도 기꺼이 그 사람에게 그 일을 양보했다. 물론 공개적으로 양보한다는 말을 해서 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나는 말없이 그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 그 일을 하기 원하는 다른 사람이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했다. 가끔은 답답하거나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나는 그런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렇게 낮은 곳으로 내려가고,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것이 섬김의 기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단들의 행태를 살펴보면 교주가 모든 행동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정명석의 경우, 그는 축구를 즐겼다. 그는 매 경기 골을 넣었고, 골을 넣을 때마다 그곳 사람들은 할렐루야를 외쳤다.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그러나 그들에게는 즐거운 일이고, 아름다운 일이고, 대단한 일이었다. 비단 축구만이 아니다. 정명석은 지휘봉을 들고 지휘도 했다. 그는 마치 대단한 지휘자처럼 흰 양복을 입고 지휘봉을 휘둘러댔다. 이 역시 우스꽝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섹스 역시 그 중 하나였을 뿐이다. 정명석은 모든 일에 주인공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교회의 경우는 어떤가. 생각을 망설일 필요도 없다. 주인공은 성직자들이다. 목사들이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행사는 예배이고, 예배의 중심은 성체성사거나 설교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이는 목사다. 예배에서만 주인공이 되는 교회는 그나마 낫다. 성직자와 목사는 교회의 모든 행사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성직자와 목사는 교회의 주인공이 아니라 가장 천한 (이방인) 종이어야 한다. 교인들의 발을 씻기거나 교인들을 먹이는 사람이다. 그러나 성직자들과 목사들은 부자 교인들만 만난다. 아닌 사람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그런 경우라도 그 사람들이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경우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오래도록 요한복음 21장을 매우 의미 있는 기록으로 생각해왔다. 그 부분은 후대에 첨부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그런 경우라도 그것은 그 부분을 더욱 비중이 있게 만든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예수님은 세족식을 거행하셨다. 나는 그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근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부활 후에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부활 후 예수님은 첫 번째 제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숨을 내쉬며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셨다. 두 번째 만남은 첫 번째 자리에 없었던 도마를 위한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져보게 하셨다.

세 번째 만남은 디베랴에서 이루어졌다. 이상한 것은 두 번의 만남이 이미 있었는데도 제자들이 전혀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으며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그들이 땅에 올라와서 보니, 숯불을 피워 놓았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오너라."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가서, 그물을 땅으로 끌어내렸다. 그물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렇게 많았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

제자들 가운데서 아무도 감히 "선생님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주님이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빵을 집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와 같이 생선도 주셨다.

예수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뒤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신 것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예수님은 이 자리에서 잘못한 제자들을 꾸짖지도 않으시고, 다만 배고픈 그들에게 아침을 차려주셨다. 나는 예수님의 이 모습이 수건을 허리에 두르고 대야에 물을 떠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던 모습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 모습이야말로 목양의 가장 중요한 일이며 복음전파의 가장 기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직자나 목사의 핵심역할은 예수님처럼 밥을 준비해서 먹이는 일이다. 그것은 말씀을 먹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이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의 사고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는 이 일이 세족식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본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 일에서 예수님은 주인공이 아니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하신 종이셨다.

이 기사에서 내가 가장 감동하는 대목은 제자들이 잡아온 생선을 가져오라고 하셔서 그것을 구워주셨다는 사실이다. 주인공인 제자들 역시 종의 일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모든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자들의 노력이 거기에 더해질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될 것이다.

베드로에게 양들을 위탁하시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내 양 떼를 먹여라.”였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영적인 것으로 해석한다면서 일반적으로 말씀을 먹이는 것으로 해석해왔다. 이제 나는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양 떼를 먹이라는 것은 양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라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나 역시 그랬었다. 하지만 어린 양을 필두로 주님의 양들을 먹이는 것이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의 역할이다. 생각해보니 부엌일을 하던 로렌스 수사가 수도원에서 가장 영적인 사람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로렌스 수사야말로 성직자와 목사가 해야 하는 일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래도록 노숙인 선생님들을 먹이는 민들레국수집을 주목해왔다. 그들이 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교회답고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일이다. 그러나 막상 그 일을 하고 있는 그들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주님의 양떼를 먹이는 일이라는 사실과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는 못한다. 자신들이 교회이며,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 건설에 선봉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그리스도께서 주인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며 세상의 복음이 틀렸다는 지적과 동시에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하나님의 경제를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런 자신들이 교회라는 사실과 주님이 다 준비해 놓으신 음식에 자신들이 구해온 음식을 더할 수 있다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살짝 아쉽기는 하다.

나는 배고픈 자들을 먹이는 일이 단순히 자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삶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영적인 예배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주님의 은혜의 해가 선포되고 있다는 사실을 온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그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작금의 교회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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