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에 가까운 종교적 책임, 누가 던져준 짐인가?
자학에 가까운 종교적 책임, 누가 던져준 짐인가?
  • 정용섭
  • 승인 2011.09.04 20:06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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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정용섭 목사의 신학단상(17) '교회와 종말'

예수는 이스라엘의 민중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는 두 가지 사태가 중첩되어 있다. 무거움과 가벼움이 그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예수가 말씀한 무거운 짐이라는 건 인생살이의 짐이 아니라 그 당시 유대교의 짐이었다는 사실이다.

예수 당시의 유대교는 왜 무거운 짐이었을까? 이 문제는 내가 여기서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이 분명하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를 막기 위해서, 또는 그의 긍휼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만 했다. 처음에야 기쁨과 환희로 그런 일을 감당했겠지만 그것이 규범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다음에는 두려움과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기 마련이다.

더 근본적으로, 인간은 그 어떤 노력으로도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다. 바리새인 같은 종교 전문가들이나 약간씩 흉내를 낼 수 있을만한 율법이 모든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민중들은 그야말로 종교적 짐에 휘둘린 것이다.

내 생각에 오늘의 한국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런 짐에 짓눌려 있다. 그들은 기쁨으로 그런 일을 감당한다고 하겠지만, 인간은 자학적인 방식으로도 나름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에 오늘의 종교적 책임들은 거의 자학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옛날 우리나라의 여자들이 시집의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나름으로 사명감으로 자기 삶을 희생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런 삶의 태도를 오늘날 가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을는지.

예수는 이스라엘 민중의 종교적 짐을 편하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제 더 이상 율법이 무의미한 새로운 신앙의 세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충분한 그런 은총의 세계를 말씀하셨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은총의 세계를 인정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해야 하고, 몸을 불사를 정도로 헌신적으로 살아야 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경지를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무거움과 가벼움의 문제는 비단 종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직결된다. 우리의 일상은 대개 지나치게 무거운 짐으로 눌려 있다. 어떤 업적을 이루기 위한 욕망이 우리의 존재를 짓누르고 있다. 예수가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일상도 근본적으로 가벼워져야만 절대적인 세계, 또는 구원의 세계에 가까워질 것이다.

다시 질문하자. 삶이 가벼워진다는 건 무슨 뜻일까? 자기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책임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말하는가? 아버지로서, 어머니로서, 선생으로서, 직장인으로서 맡은 일들을 내팽개치는 것을 말하는가? 궁극적으로는 그런 것까지 포함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경지는 죽음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삶이 가벼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으로부터 가볍게 하는 것으로 삶의 중심을 옮긴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회심이야말로 이런 삶의 지름길이다. 우리의 삶을 무겁게 하는 것들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자기가 성취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들이며, 거꾸로 가볍게 하는 것들이란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삶의 태도에서 나온 일들이다.

결국 우리의 삶이 가벼워지는 길은 하나님을 온전하게 인식하고 그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찾는 데에 있다. 어거스틴이 말한 대로 인간의 참된 안식은 하나님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가벼운 삶은 결국 가장 무거운 것과 연결된다. 하나님만큼 무거운 존재가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통치, 존재, 그의 계시, 그의 미래와 그의 생명이라는 주제보다 더 심각한 것들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주제를 상실했다. 세상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고, 교회마저도 사실은 이런 주제를 잃어버렸다. 수많은 예배와 찬송과 성서공부가 있지만,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식으로 온 세계에 선교활동을 펼치고 있지만 거기에 정작 필요한 무거운 주제에 관한 진지한 태도가 전혀 없다. 다만 인간의 열정만 난무할 뿐이지 진정한 영성이 사라졌다. 인간의 감수성과 감성은 우리를 감동시키지만 하나님의 통치와 그의 미래에 관한 치열한 고민은 없다.

이는 흡사 젊은 연인들이 사랑의 리얼리티에 들어가는 경험 없이 단지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공연히 애를 쓰는 것과 같다. 서로 보고 싶다는 그 감정만 자극하기 위해서 온갖 이벤트를 만드는 데만 마음을 쏟고,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심층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성 위주의 사랑이나 감성 위주의 신앙생활을 통해서는 인간의 참된 만족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런 데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그런 패턴을 반복하고 강화하는 일에 몰두한다. 결국 그런 젊은 연인들은 사랑이라는 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기독교 신앙은 종교적 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오늘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2000년 전 이스라엘과 똑같이 종교적인 무거운 짐으로 휘청거리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 무거움을 짐짓 감추기 위해서 우리는 그렇지 않은 척 자기 자신과 이웃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삶의 가벼움을 위해서, 이것이 곧 구원의 상태인데, 우리는 무거운 주제를 붙들고 씨름하는 수밖에 없다.

정용섭 목사 / 샘터교회 담임·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

* 대구성서아카데미에 실린 글을 필자의 허락을 받고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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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 2011-09-06 00:09:29
이 글을 읽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기독교인이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아톰 2011-09-06 00:52:33
정 목사님 글은 언제 읽어도 마음 속에 공명을 불러일으키는 거 같습니다. 개인 '실존'만을 텃치하는 거 같으면서도 늘 관계적 실존을 터치하는 면에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번글의 비유 가운데

"...이는 흡사 젊은 연인들이 사랑의 리얼리티에 들어가는 경험 없이 단지 서로에게 사랑을 확인하려고 공연히 애를 쓰는 것과 같다. 서로 보고 싶다는 그 감정만 자극하기 위해서 온갖 이벤트를 만드는 데만 마음을 쏟고, 상대방의 인격과 삶의 심층으로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는 귀절...

하하 스캇 팩의 '사랑의 심리학'에 대한 유명한 저서 Roadless Travelled가 딱 떠오르게 하는 귀절로... 한국교회의 영성이 이에 비견될 수 있다는게 놀랍군요.

상대편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 들어가는데 필수적인 '리얼리티'를 바로 인지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진정한 사람(Real Love)'과 이들을 인식하지 못한채 감성에만 의존하는 유아적 '사랑에의 함몰(Fall-in-love)'... 뭐 한국교회의 영성이란 것이 바로 이 'Fall-in-love'에 불과하다는 걸 정 목사님이 말하려는 거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면에서 '외도'에 푹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어느날 'Fall-in-love'에서 깨어나는 순간 갖게될 허탈감이여...^^

Watch Dog 2011-09-08 05:42:52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요한복음 8:32

진리를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믿어라...

그리하면 '인생살이의 짐' 위에 '종교적 짐'도 함께 지게 될 것이다.
...........................

진리, 자유... 이 말들의 의미를 더욱 온전히 깨달아 가는 그리스도인이기를 소망하며....

Man 2011-09-08 21:54:36
Watch Dog 님께

진리란 인간이 다가가 깨닫는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스스로 인간에게 스며들 때에 진리의 가치가 드러난다고 봅니다. 진리를 정의하고 그것에게 다가서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종교적 행위이죠. 이렇게 진리가 스며들 때에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것이지 그것의 의미를 깨달으려는 것 또한 의미를 규정하고 그것을 이해하라고 가르치는 종교적 강요입니다.

현대에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기독교에서는 부정적으로 바라보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지니고 있는 진리에 대한 이해를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진리라는 것을 근대까지는 절대적이고 이성적인 산물이라고 보았지만 이 시대에는 역사적 산물이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입니다. 그 이유는 진리라고 여기던 것이 보여준 것이 결국 진리적인 결과를 나타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 진리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면서 진리를 하나의 실재적 존재로만 보는 편협성에 머물렀고 기독교에서는 이 편협성에 종교적 율법성을 더했죠. 그 결과 예수가 말하는 자유라는 개념 또한 단지 추상적으로 좋은 것으로만 규정했을뿐 실제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종교든 학문이든 어떤 이념을 세운 본인은 정작 그 이념이나 사상을 공식화해서 그 틀에 매이는 것을 주장하지는 않지요. 다만 그 이념이나 사상을 하나의 거울삼아 세상을 보라고 인간에게 가르칩니다. 즉, 이념이나 사상은 세상을 보는 도구일뿐 세상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정작 그런 가르침을 따르는 그들의 추종자나 제자들이 그 이념이나 사상을 공식화해서 그 공식에 모든 것을 끼워맞추려는 어리석음을 보입니다.

예수의 사후에 나타난 초기 기독교 정통주의자들이 그랬고,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따르던 사회주의자들이 그랬고 베자와 같은 칼빈의 제자들이 그랬죠.

공식화된 이념이 정치적 이념이든 아니면 종교적 사상이든 그것은 단지 인간이 던져진 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법일 뿐 그 방법 자체가 완전한 진리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다는 말입니다.

진리는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데 절대적이라고 못을 박고 그것을 정의하는 순간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죠.

진리가 고정되었는데 어떻게 그 진리가 자유를 줄 수 있겠습니까?

자유는 누리고 즐길 대상이지 이해할 대상은 아니죠.

자유란 내 마음이 원하는 그 어떤 행동을 하여도 나에게 거침이 없는 상태인데 이미 진리라는 틀 안에 나를 고정시키면 자유는 사라진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자유란 내가 원하고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법에 거침이 없는 상태에 있기 때문에 내 마으대로 살아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자우를 말할 때에 방종과 구분하면서 절제가 있는 지유를 말하죠. 이것 자체가 자유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니 당연히 자유도 꺠닫지 못하는 것이죠. 그러니 누리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구요.

진리라는 것, 즉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안에 나를 맡기면 그 이치안에 있는 나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이치에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별짓을 다 해도 그 이치의 순리에 거스름이 없기 때문에 나는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죠. 이것이 진리가 주는 자유입니다.

구약의 율법이 주어진 것도 결국 율법의 내면적 목적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야 하는데 이것을 종교적인 강요로 못을 박았기 때문에 유대민족은 창조주를 이방잡신과 동일한 신으로 만들어버린 죄를 저지른 것이죠.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어느 시대나 이런 어리석음은 계속됩니다. 예수가 그것을 지적하면서 예수 없이 모으는 자는 오히려 헤치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예수의 가르침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없이 종교적으로 교리화하여 그것을 지키는 것은 결국 예수의 복음의 정신을 깨뜨리는 일이라는 말이죠.

그래서 진리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도록 기다려야 하는 것이고 그 진리가 찾아오면 점점 자유를 즐기는 삶이 나타나는 것이죠. 그것이 완전히 나의 삶의 향태를 갖출 때에 십자가는 더 이상 짐이 아니기에 나의 어깨에서 내려오는 것이고 그런 상태를 구약에서는 안식이라고 말합니다. 죽어서 두 발 뻗고 누우는게 안식이 아니죠.

천국은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것처럼 안식도 이 땅에서부터 누리는 것이죠.

Watch Dog 2011-09-09 05:05:24
기존의 질서와 권위, 결국 대중들에게 까지 거부되고 외면 당하여,
드디어 신성모독죄로 정죄받고 처형 당한, 2000 년전 팔레스타인 촌동내의 가난하고 볼품없는 청년 예수의 초청..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편히 쉬게 하리라”
이 초청을 받아들인 者....한 마디로 Crazy 이고, 좀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지극히 '비이성적'인 者입니다.


그러므로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은, 사람의 판단과 의지에 의한 선택일 수 없다는 것...다른 '어떤 것'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믿음의 선배들이 주로 '은혜'라고 칭하더군요..
혹 '진리 자체가 스스로 인간에게 스며들음" 으로 표현될 수도 있겠다고도 생각합니다.


나는 이런 지극히 '비이성적'인 者 중의 하나입니다.


시작이 그렇하니, 그 후의 모든 과정 (주인되신 예수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가 하신 말씀들을 조금씩 깨달아 가는..) 또한, 이성에 의한 이해로가 아니라, 깨달음을 주시는 은혜를 믿음으로(끊임없이,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라 함이 적절한 표현이라 하겠읍니다.
..................

수없이 넘어지고, 낙심하고, 분(忿)해하며, 큰 소리로 말하기도 하며, 아무 말 안하기도 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며, 때때로 기뻐하며 감사하며

.... 한 28년 쯤 지났는가...?

문득, 어떤 작은 편안함이 마음 저 한구석에 있는 듯하여,
영광 중에 계신 주님을 얼굴로 뵐 때까지,
더욱,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자유와 안식(쉼)을 주시는 은혜를 구하며 기다리는 삶을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