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좋다고 남용 말고, 성경 모르고 오용 말자"
"성경 좋다고 남용 말고, 성경 모르고 오용 말자"
  • 양승훈
  • 승인 2012.09.25 16:4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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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칼럼] 양승훈 교수, 문자적 성경 해석의 함정

전 세계적으로 많은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성경해석학의 가장 탁월한 교재로 사랑 받고 있는 <성경 해석학 총론>(Introduction to Biblical Interpretation)(W. Klein, C. Blomberg, R. Hubbard) 앞부분에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한 신학교에서 성경해석학 교수가 성경 해석의 원리들에 관한 세미나를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는데 한 학생이 갑자기 울기 시작했습니다. 교수는 당황해서 강의를 중단하고 그 학생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은 흐느끼면서 "제가 우는 이유는 교수님이 너무 안쓰러워서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교수가 "왜 내가 안쓰러워 보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생이 대답하기를 "왜냐하면 교수님께는 성경을 이해하는 것이 너무도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냥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이 그 뜻을 보여주시는데요"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 해석학 총론> 저자들은 단호하게 이 학생이 보여주는 성경 해석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기 때문에 칭찬할 만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조명과 성경의 자명성에 대한 단순화된, 그리고 위험천만한 태도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해하는데 성령의 역할은 필수적이지만 "성령의 도우심이 언어 소통의 원리에 따라 성경 본문을 해석해야 할 필요를 대치하지는 않는다"고 잘라 말합니다.

비슷한 얘기를 지구나 우주의 창조연대 논쟁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근래 미국 복음주의 과학자 단체인 <미국과학자협회>(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에서 출간하는 계간 학술지 <PSCF>(p.35, March 2008)에는 미국 창조과학연구소(ICR)에서 진행하는 RATE(Radioisotopes and the Age of the Earth) 프로젝트의 대표인 바디만(Larry Vardiman)의 글이 실렸습니다.

6천년/대홍수론자들로 이루어진 RATE 팀은 우주나 지구의 오랜 연대를 보여주는 방사능 연대측정법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6천년 우주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구팀입니다. 바디만은 글에서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 "기존의 과학과 성경이 선언하는(declare) 6천년 연대 사이의 충돌이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 RATE 팀은 우주나 지구의 오랜 연대를 보여주는 방사능 연대측정법을 부정하고 어떻게든 6천년 우주 역사를 증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연구팀입니다. 바디만은 자신들의 연구를 통해 "기존의 과학과 성경이 선언하는(declare) 6천년 연대 사이의 충돌이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인터넷 블로그 갈무리)

과연 성경은 우주와 지구가 6천년 되었다고 '선언'할까요? 바디만이나 RATE 팀이 어떤 번역의 성경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성경은 어디에서도 우주와 지구가 6천년 되었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우주가 137억년, 지구가 46억년이라고 '선언'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성경은 어디에서도 우주와 지구의 연대를 6천년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그렇게 선언하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는다는 것이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문자적으로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는 극단적인 성경해석의 하나일 뿐입니다.

성경에서 우리의 구원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닌, 과학적,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것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을 때 얼마나 심각한 문제가 야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고전적인 예는 1633년에 일어난 갈릴레오 재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정치적, 사회적 이유가 있기는 하지만 갈릴레오의 지동설 재판은 적어도 겉으로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사건입니다.

당시 천동설을 지지한 사람들은 성경 어디에도 지구가 움직인다는 말이 없는데 어떻게 지동설을 주장하느냐며 갈릴레오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성경 곳곳에 '해가 뜬다', 혹은 '해가 진다'는 표현이 있는 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천동설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또한 천동설을 지지하는 가장 유명한 성경구절로 이스라엘 민족이 아모리 족속과 전쟁할 때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 그리할찌어다(수 10:12).”라고 한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그리고 여러 차례 해가 움직인다고 하는데 어떻게 지동설을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말을 들으면 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그리고 여러 차례 엿새 만에 천지가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우주의 연대를 6천년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겸손과 절제는 사라지고 과도한 확신만이 남게 되면 지금도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소수이기는 하지만 지금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 천동설을 신봉하면서 책도 출간하고,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 우리는 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무대뽀'를 담대함으로, 무식을 순수로, 무례를 용기로 착각하게 되면 재난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종교의 이름으로 일어난 수많은 폭력들이 바로 이런 착각으로 인해 일어났음을 보았습니다. 근래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번역, 출간한 <성경과 폭력>(The Sins of Scripture)(2007)은 바로 기독교의 독선과 폭력성의 중요 원천인 성경 문자주의와 우상화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말씀에 대한 진지한 연구와 자신의 해석에 대한 반성의 여지가 사라지고 오로지 종교적 확신만으로 충만한 곳에는 곧 폭력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자신의 생각은 성경의 '선언'이기 때문에 그것과 맞지 않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으며, 나아가 이 땅 위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여성 억압과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와 학살, 십자군 전쟁과 마녀 사냥, 수많은 종교 전쟁과 흑인 노예제도, 유색인종에 대한 정복과 착취는 모두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야만적 폭력이었습니다.

이것은 과거에만 일어난 일이 아니며, 21세기 개명천지(開明天地)에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전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와 그의 전쟁 정책을 지지했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 역시 비슷한 오류를 범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폭력과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명분들이 모두 거짓이었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지만 그래도 그들은 지금까지 종교적 확신을 꺾지 않습니다. 그래도 전도의 문은 열렸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읽는 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말자”는 제약회사 표어처럼 "성경 좋다고 남용 말고, 성경 모르고 오용말자"는 캠페인이라도 벌려야 할 판입니다.

양승훈 / 벤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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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2012-09-29 08:17:50
개신교와 분열



16세기 종교개혁으로 나타나게 된 개신교는 분명 옳은 것을 향한 비장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이 내세운 기치 가운데 하나인 '만인제사장'의 원칙은 분명 옳은 것이었습니다. 모든 신자들에게 성경을 읽을 권리와 성경해석의 자유를 허락한 이 선언은 의심할 여지없이 기독교 역사의 새로운 물꼬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개신교의 끝없는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루터와 쯔빙글리히의 성찬에 관한 토론으로부터 시작해 오늘날까지 개신교의 역사는 어느 것이 옳은가를 따지며 갈라지는 분열의 역사였습니다. 끝도 없이 분열을 거듭한 개신교는 오늘날 그 정확한 숫자를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수많은 교단과 종파와 이단들을 양산해 왔고 오늘날도 그렇게 갈라짐의 역사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성경해석의 자유는 모든 신자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지만 그 성경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가진 모든 것을 부인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분열을 야기하게 된 것입니다.



문제점이 드러났지만 종교개혁의 근본 취지를 부인하지 않는 한, 그리고 가톨릭처럼 교황제도와 교리를 최종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단 하나의 '교리성청'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합니다. 개신교 전체가 하나로 모여 개신교 교황을 만들어낼 수도 없습니다. 교리를 최종 확정할 '기구'나 '제도'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계속해서 분열을 거듭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고는 비단 신학자들과 목사들과 종파와 교단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개신교 모든 신자들이 공통으로 경험하게 되는 마치 숙명과도 같은 필연입니다. 오늘날도 권위 없는 성경해석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으며 개신교 신자들은 의심의 눈길을 번뜩이는 심판자들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무언가 자신이 아는 교리 이해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야기를 들으면 혹시 그것이 '이단'이 아닐까 먼저 의심부터 하는 모습은 모든 개신교 신자들의 전형적인 특성이 되었습니다. 특히 관용을 모르는 우리 민족의 특성상 한국교회는 본래부터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이러한 문제점이 극대화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십자가 수만큼 한국의 교회는 갈라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같은 교단 교회라 하여도 그 교회 성도들이 한 형제요 자매라는 생각을 아무도 하지 않는 치명적인 영적 바이러스에 걸려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는 기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기껏 교황제도를 박차고 나온 '만인제사장'들이 깊은 신앙 생활로 들어가기는 커녕 교회수만큼 교황의(개교회 목사) 수만 늘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교황이 아니라 목사마저 부인하는 '목사무용론'이 성경을 조금 알게 된 신자들을 중심으로 암암리에 퍼져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사라지면 과연 바른 교회, 바른 신앙생활이 이루어질까요? 그나마 그 정도의 교육을 받은 목사마저 사라진다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요? 정말 목사가 없어지면 제대로 된 성경 해석이 이루어지고 바른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평신도들로 이루어진 교회들은 온갖 비리와 부조리에서 벗어나 일치와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 흐름의 끝은 지금처럼 교회 수만큼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신자 수만큼 갈라지는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기 교회가 다른 교회보다 낫고 옳고 바른 교회라는 주장을 내세웁니다. 약간의 가책을 느끼는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의 교회가 건강한 교회라고 말합니다. 성도의 수와 업적으로 진리와 하나님의 은혜를 저울질해 대며 인간의 욕망과 탐욕을 합리화하는 길을 잘도 달려갑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은 갈가리 찢어지고 복음이 말하는 일치와 조화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한 형제와 자매라는 가장 특권적인 고유의 정체성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개신교는 개신교 고유의 특성상 이러한 비극을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 자체가 없습니다. 영원한 '프로테스탄트'들로 "그 소견에 옳은 대로"(삿21:25) 각자의 길을 달려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며 또 그것을 믿으며 말입니다.



이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은 '만인제사장'의 원리가 가지는 한계를 직시하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할 일이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옳아도 틀릴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갈라지는 이유가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이 성경공부를 하고 성경을 읽고 무언가를 알게 되었기 때문에 또 알면 알수록 더 깊은 신앙생활로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거만한 심판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는 현실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판단을 하고 있는 자신의 지식과 지혜가 하나님의 높고 깊은 경륜과 지혜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볼 수 있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거기에 담겨 있는 내용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랑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옳아도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이 필요합니다. 상대에 대한 사랑을 잃은 판단은 폭력이 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페마 최된 스님의 <실험처럼 살아라>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형수인 자비스 메스터스는 불교도이며 나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의 저서 <자유를 찾아서>에 보면 말의 신 - 자기 생각과 판단이 옳다는 자기 확신에 빠진 경우 -의 유혹을 받았을 때의 인간의 모습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밤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자비스에게 옆방 수감자 오마르가 소리쳤다.

"이봐 자비스, 7번 채널로 돌려봐."

자비스가 TV를 켜자 그림은 보이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화면에는 수많은 분노한 사람들이 허공에 팔을 젓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이봐 오마르 "지금 왜들 그러는 거지?"

오마르가 말했다.

"KKK단이야. 세상에 잘못된 건 다 흑인과 유태인 잘못이라고 고함을 질러대는 거야."

면 분 후 오마르가 또 외쳤다.

"지금 화면을 잘 봐."

자비스는 책에서 눈을 떼어 화면을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플랭카드를 들고 행진하다 체포되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화면만 보아도 이 사람들이 분노하는 것을 알겠다. 왜 그러는 거야?"

오마르가 말했다.

"환경운동가들이 데모하는 거야. 나무를 그만 베고 물개도 그만 죽이라고 요구하고 있는 거야. 마이크에 대고 분노하여 외치는 여자 보여? 다른 사람들도 고함을 목청껏 지르고 있어."

10분 후 오마르가 또 말했다.

"자비스, TV 보고 있어? 지금 무슨 일이 생겼는지 보여?"

자비스는 화면에서 양복을 잘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분노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사람들은 왜 그래?"

오마르가 대답했다.

"그건 미국 대통령과 상원의원들이야. 공중파 방송에서 저렇게 다투고 싸우고들 있어. 당면한 경제난이 다 상대방 탓이라고 서로 떠넘기고 있는 거지."

자비스는 말했다.

"오마르, 나는 오늘 밤 정말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어. KKK단 옷을 입었든 환경운동가 옷을 입었든 최고급 양복을 입었든 상관없이 그 사람들 얼굴은 다 분노에 차 있다는 거야."



말의 신에 얽매이는 것은 내가 진실이라고 믿는 합당한 신념 같은 평범한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분노하여 내것이 정당하다고 옹호할 때 그것이 바로 내가 이미 지나치다는 증거이며, 상황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나의 힘에 장애가 왔다는 신호이다. 나의 신념과 이상이 내 주변에 벽을 둘러치는 또 다른 수단이 된 것이다.




물론 자비스의 통찰은 관찰에 대한 그 나름의 수행과 관심이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감옥이라는 현실사회와 동떨어진 공간에서 현실의 음성을 차단한 채 바라보니 선이든 악이든 분노라는 면에서 동일했다는 것이다. 생각과 느낌을 분리하지 못해 대개 일치시키는 탓에 우리는 옳은 생각도 분노로 표출하게 된다. 하지만 분노는 100% 대립과 폭력을 낳고 화해를 낳는 경우가 없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확신(생각)이 내면의 근본적 평안과 사랑을 거둔다면 행동을 멈추는 지혜도 가져야 한다. 간디가 전 인도의 파업을 이끌면서 영국을 압박하다가 폭력사태가 발생하고 사망자가 발생하자 눈 앞에 보이는 승리를 포기하고 파업을 중단한 것도 바로 이러한 것들에 대한 통찰 때문이었다.



옳은 것이 때론 틀릴 수도 있다. 우리 모두가 형제이며 하나라는 사랑을 잃는다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온유한 자라는 말과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는 말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 개신교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땅에 존재했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온유한 사람이 모세라고 증언합니다.(민12:3)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된 이유는 그가 가장 온유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그의 행적을 따라가보면 그는 정말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온유함을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은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 사건일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고 있을 때, 모세가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자 백성들은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자신들을 위하여 만들자며 금을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금송아지를 향해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먹고 마시며 뛰놀았습니다. 그들의 방식대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셨습니다. 범죄한 이스라엘을 멸하시고 모세를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는 그렇게 하여도 아무런 항변도 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였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제안은 지극히 당연하고 옳은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모세는 옳은 것이 다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 하나님께서 하셨던 약속을 상기시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죄사함을 위해 모세 자신의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거룩한 책"에서 지워버려 달라는 비장한 말씀까지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돌이켜 이스라엘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그는 하나님의 처분이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용서를 끌어냅니다. 온유함의 승리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모세의 그 온유함에 힘입어 마침내 새로운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이 기사에 실린 의미를 오늘날의 개신교의 처한 딜레마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개신교 신자로서 성경해석의 자유를 가지고 각자 보다 깊은 신앙의 삶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성경의 지식으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오류로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옳다는 생각이 변하지 않을지라도 다른 이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인내할 줄 아는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온유함은 단순히 줏대없는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저하는 머뭇거림도 아닙니다. 무엇이 옳은지 분명히 알지만 그 옳음이 바른 결과로 드러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참고 기다릴 수 있는 응축된 사랑의 힘입니다.



기독교는 말의 종교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말없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온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는 바를 삶으로 실천하며 자신이 아는 것을 말로 가르치려 하지 않을 때 개신교는 참 종교로 새롭게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 형제와 자매들이 그리고 모든 교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임을 아는 개신교는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힘들고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온유함으로 그날을 꿈꾸며 기다립니다.

Man 2012-09-26 12:41:01
그럼 성경의 어느 부분이 문자적인 기술이고 어느 부분이 은유적이며 또 어느 부분이 상징적인 기술인지를 구분할 수 있나요? 문자적으로만 보는 것은 물론 위험하지만 그렇다고 뚜렷한 기준도 없지 않나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도 그리고 출애굽 이야기도 또 노아의 홍수나 예수의 기적 이야기도 모두 어떻게 읽어야 하지요? 문자적이 아니라면 어떤 기준을 제시해야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