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에 성인은 없다
성서에 성인은 없다
  • 박철
  • 승인 2014.08.1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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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이 시대, 의인(義人)은 누구인가?

누구나 그들이 남겨 놓은 건축물의 규모에 압도되고 말 것이다. 10여 년 전 배낭여행을 하면서 로마 유적지를 둘러보았다. 그들이 이루어 놓은 문명은 한 마디로 '불가사의의 문명'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마어마한 불가사의를 낳게 한 힘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온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여행이 끝나는 날까지 줄곧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갈 무렵 그 힘이 '인간의 끝없는 지배욕'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었다. 현세와 내세에 걸쳐 영원히 군림하고 싶은 지배자들의 꿈이 엄청난 문화를 이룩했다는 것을 그들이 남긴 흔적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인류 최초의 산업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농경 생활 이후 인류 문명은 지배자와 피지배자라는 힘의 논리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러한 지배구조의 역사는 모든 세대, 모든 문화권에서 예외가 없었다고 본다. 오늘날 소위 '제3세계'라 불리는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선진국 사이에서도 이 힘과 권력에 의한 부당한 억압구조 아래, 더욱 은밀히 조작된 속임수로 인하여 온 세상 모든 피조물은 신음하고 탄식하고 진통을 겪고 있다(롬 8:22)고 해야 할 것이다. 탄압과 억압으로 일관된 인류의 역사는 한 마디로 '인권 탄압의 역사'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 관심은 '사회 정의'

그러므로 신구약성서에서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야훼 하나님의 관심은 '사회 정의'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사회 정의와 관련 있기 때문이다. 기원전 7세기, 유배중의 예언자 예레미야는 주변 3대 강국 각축전의 희생물이 된 유대 왕국의 항복과 예루살렘의 함락, 그리고 멸망이라는 처참한 광경을 예언하였다. 그는 당시의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항하여 그들이 민중을 우롱하고 분열을 조작하는 범죄를 다음과 같이 고발하고 있다.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려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 백성을 칠 목자들에게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서 말한다.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매게 하니, 너희의 그 괘씸한 소행을 어찌 벌하지 않고 두겠느냐! 똑똑히 들어라."(렘 23:1-2) 그들의 멸망을 예고한다.

▲ 콜로세움. 여행이 끝나갈 무렵 나는 그 힘이 '인간의 끝없는 지배욕'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있었다. (사진 제공 박철)

 

"새장에 새를 가득히 채우듯이 남을 속여 약탈해 온 재산을 제 집에 채워 벼락부자가 되고 세력을 휘두른다. 피둥피둥 개기름이 도는 것들, 못하는 짓이 없구나. 남의 권리 같은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 고아의 인권을 짓밟고 빈민들의 송사를 공정하게 재판해 주지도 않는다"(렘 5:27-28)고 예레미야는 그들을 공박하고 있다. '사기'에 의해 부당 이익을 취하고 '눈을 감아 줌'으로써 악한 짓의 한계를 모른다(암 7:8)는 표현으로써 당시의 사회의 타락상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아울러 종교 지도자들을 탄핵 고발하기를 "이방 잡신들에 의지하여 거짓 점이나 치며, 제 힘을 법으로 삼아 백성을 지배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을 따라간 백성들은 "훔치고 죽이고 간음하고 위증하고 온갖 잡신을 섬기고 따라다니다가" 성전에 들어와 "우리는 무사하옵니다" 하고 복을 비는 꼴이 마치 강도들이 추적을 피하여 엎드려 있다가 또 새삼 강도질을 하러 나가는 경우와 같다고 했다.(렘 7:5-11 참조)

자신이 몸담고 있는 사회를 악한 짓의 한계를 모르는 사회로 규정지었던 예언자 예레미야는 야훼를 섬기는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규정지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의 종말을 내다보면서 무죄한 피를 흘리게 하며, 불의한 이득을 취하고 폭력과 압박을 가하는 자들은, 그들의 당나귀가 묻히듯 질질 끌려가 성문 밖으로 멀리 내던져질 것이고(렘 22:13-19 참조) 하나님은 메시아를 보내시어 당신 백성들을 구해 내실 것이라고 한다.(렘 23:1)

 

예수 복음 선포 핵심은 불의한 억압구조 거부

나사렛 예수의 복음 선포는 바로 이러한 인류의 죄라고 할 수 있는 '불의한 억압구조'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 '억압당하는 자'가 함께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지를 인류의 양심에 호소한 '해방 운동'이었다. "이제 더 이상 힘없는 자를 학대하고 이용하고 억누르기를 그만두고, 이들을 너희의 형제로 맞이하라"는 것이 그분의 계명이요, 바로 이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예레미야 예언자 시대와 같이 우리 시대 남북한 정치인들이 민족 공동체의 철천지한(恨)이 된 민족 분단을 그들의 정치 권력의 볼모로 삼아 이를 이용하려 한다든가, 지역감정을 부추겨 세워 자기 정치적 집단의 이익을 도모하려 든다면, 민족의 분단과 분열을 조장하는 그들 역시 예레미야 시대의 그 지배자들과 똑같은 운명에 처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아직도 수많은 양심수들이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이 시대, 이 땅의 교회 지도자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정의가 배제된 화려한 사랑' 이야기로써 그들의 종교적 심성을 충족시키고, 교회가 강도들의 잠시 위안과 위로와 복을 비는 데만 급급하다면 이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적어도 나사렛 예수가 선포하신 '인간을 해방시키시는 사랑의 하나님'은 아닐 것이다.

성서의 시인은 '의인(義人)'이란 시냇가에 심어지 나무와 같다(시 1:3)고 노래했다. 그는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않고, 죄인의 길을 걷지 않으며, 비웃음을 일삼는 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야훼의 법을 기쁨으로 삼아 밤낮으로 그 법을 되새기는 사람, 그래서 의인은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아 그 잎사귀가 무성하고 철따라 열매를 맺는다고 덧붙여 노래하고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의인이란 누구인가? 그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자비에 믿음의 뿌리를 내린 사람, 세계와 역사와 인생을 하나님에 근거하여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폭력과 억압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인간을 '들이마시고 삼키는 자들', 그리하여 공동 사회에 치명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자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전적으로 배신하고 대적하는 악하고 불경스러운 자들'에 대하여 의분을 느끼는 사람, 그야말로 그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마 5:6)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그 모습 그대로, 그분이 원하시는 그 손상 받지 아니한 모습으로 자신과 이웃을 환원시키기에 애타는 마음을 지닌 사람, 그를 가리켜 성서는 '의인'이라고 했다. 그러기에 아우구스티노는 '정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는 것을 가리켜, 무상한 세상 사물에 대한 죽음의 쾌락에서 빠져 나와 영원불변하신 하나님 사랑에로 되돌아가려는 '회심'이라고 했으며, 이 회심이야말로 자기 자신을 탈피해서 하나님 안에 들어가 살고자 하는 원의(原意)로서, 인간의 가장 깊고 은밀한 내면성에 자리하고 있다고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는 말한다.

그러므로 의로움이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려는 강렬한 원의와 의지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의인이란 아직도 죄의 사슬, 악의 굴레에서 괴로워하면서도 의로움으로 분노하고, 그로 인하여 고통과 수난과 죽음의 길을 불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말로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헌신적인 실천, 구체적 나눔과 봉사로써 이웃과 세상 만물에 의로운 관계를 건설하는 사람이며, 인간의 고질적 이기주의와 거짓 평화와 안정으로부터 사람을 해방시켜 화해와 해방의 길을 모색하는 사람이며, 언젠가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 하나님의 창조적 동반자가 되려는 사람이다.

성서에는 성인은 없고 의인만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을 가리켜 의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서에는 성인이란 없고 의인만 있다는 말의 속뜻을 알아차리기엔 그리 어렵지 않다. 이집트 폭정에 시달리고 괴로워하는 이스라엘을 건져 내시던 그 순간부터 민중의 해방시키는 구원의 역사 속에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고 계신다.

당신의 외아들을 주시어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내신 하나님은 이 시대 우리 가운데서도 의인을 부르고 계신다. 전쟁과 자연 파괴(생태계 파괴)와 성폭력과 사회구조적 폭력으로 대별되는 이 세상의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가난한 자들을 편들어 그들을 해방시킬 의인을 하나님은 찾고 계신다.

그러나 우리 중 그 누가 의인으로 불리움을 받고 있는가? 정의를 위해 분노하는 정치·경제·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부정한 인간의 삶의 모든 자리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투신하는 사람들, 생애의 안락함과 재산과 명예와 생명을 던져 놓고 투쟁하는 이 시대의 투사들, 오로지 그들만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부르고 계시는가? 아니면 그 누구를 우리 시대 의인으로 부르고 계시는가?

'정의'라는 말만 나오면 눈살부터 찌푸리는 그리스도인들, 그들을 과연 하나님의 자비를 믿는 그리스도인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을 안다면서 정의를 모르는 사람,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사람,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려는 사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우상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오늘, 이 시대 나사렛 예수를 가리켜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고 불리움을 받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속이 다 썩은 아름다운 과일과 같고, 사랑이 빠져 나간 정의는 물이 말라 버린 호수와 같아서 생명과 구원으로 우리를 해방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정의가 꽃피는 곳에서만 사랑과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박철 / 좋은나무교회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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