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임을 믿지 말게나...”
“후임을 믿지 말게나...”
  • 강만원
  • 승인 2015.01.05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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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 강만원 ⓒ <뉴스 M>

“순진한 목사님들! 후임을 너무 믿지 마십시오. ‘영적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후임을 너무 믿다가는 크게 상처 받습니다! 기대하지 말고 차라리 마음을 비우십시오. 애써 마음을 비워도, 후임이 담임목사로 전권을 가지고 시무하는 순간부터 분명히 실망스러운 상황들이 벌어지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상황들을 보면서 너무 당황하지 말고, 그게 이기적인 본성을 지닌 인간들의 당연한 모습이려니 생각하고 기꺼이 체념하십시오. 주께서 교회를 맡기신 동안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때가 되면 아무 미련도 남기지 말고 조용히 떠나십시오. 그러지 않고는 후임이 주는 모욕감을 절대로 견디지 못합니다...”

후임들의 연이은 배신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나이 지긋한 목사들에게 편지 아닌 편지를 써본다... 교인들로부터 인정받는 이른바 "영성이 깊은" 목사들에게서 보는 안타까운 공통점이 있다. 영성이 차고 넘쳐서 상대적으로 육체가 약하고 시력이 떨어지는 건지, 도대체 사람을 볼 줄 모른다! 아니, 사람을 볼 줄 모른다기 보다는 자신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과신한 나머지 인간의 탐욕스러운 본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물론 교회를 개척했던 초대 목사에게 해당되는 말이지만, 아들에게 세습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은퇴를 앞둔 목사가 후임을 결정하는 기준들 가운데 가장 우선적인 항목은 대부분의 경우에 사전에 미리 결정된다. 자신이 미처 지니지 못했던 부분을 채울 수 있고 자신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스펙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한국교회의 이름있는(?) 목사들이라면 하나 이상 소유한, 그야말로 흔해빠진 박사 학위가 없어서 남들보다 모양새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목사들은 후임을 선택할 때 일단 외국의 신학대학 박사학위소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신유나 예언, 환상이나 방언같은 특별한 은사나 체험이 자신에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목사들은 소위 ‘은사자’에게 눈길을 돌린다. 물론, 이같은 외적인 기준들에 앞서 절대적인 기준은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한결같은 충성심이다. ‘충성’은 후임을 결정짓는 기본이며 전제로서, 후임이 목회하는 내내 자신에게 복종하면서 ‘내 교회’를 보다 멋지게 이끌기를 기대한다.

이른바 중대형 교회의 목회 이양 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드러나는 공통된 현상인데, 도대체 왜 그럴까? 결국, 목사들의 내면에 가려진 열등감과 교회 성장을 향한 끝없는 욕망, 그리고 ‘내 교회’에 대한 끈질긴 집착 때문이다. 자신의 생명처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소중히 여기던 교회를 능력이 있고 충성스러운 후임에게 넘기면서 자신이 목회하는 동안에 느꼈던 약점을 보완하면, 자기 분신과도 같은 ‘내 교회’가 자신의 이름으로 영원히 지속되리라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인지상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왕이면 자신의 영적인 상속자가 목회를 후계하면 금상첨화일 수 있으니까...

따라서, 전임과 후임 사이에 암묵적인 ‘부자 관계’가 형성된다. 이른바 영적인 교회 상속이며 세습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여지없이 후임에게 배신당한다! 후임의 가장된 영성에 속고, 거짓된 인간성에 속은 것이다. 후임이 담임으로 자리를 잡으면, 아니 자리를 잡기 위해서 가장 먼저 손대는 일이 전임의 흔적을 차근차근 지우는 일이다. 예를들면, 전임과 가까운 교역자들을 서서히 사퇴시키거나, 교회 이름을 새로 바꾸거나, 새로운 건물을 지어서 자신이 새 성전(?)의 진정한 주인임을 은연중에 과시한다. 굳이 예를 들지 않아도 이런 모습들을 주변에서 숱하게 보지 않았는가?

굳이 실명을 나열할 필요도 없이, 한국교회의 전설적인(?) 목사들이 후임들에게 여지없이 배신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 마디 하고픈 말이 있다. 목사가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든 아니면 질병이나 다른 이유로 교회를 떠나든 이유와 상관없이 교인들은 머잖아 ‘전임 목사’를 잊고 슬그머니 새 목사에게 눈길을 돌린다는 사실이다. 굳이 후임을 원망할 것도 없이, 목사가 피붙이처럼 생각했던 교인들도 사실은 ‘남’이라는 사실을 교회를 떠나는 순간 금방 깨닫게 된다. 충고하건대, 교회는 주께 맡기고 편한 마음으로 남은 여생을 보내는게 영적인 건강뿐 아니라 육체적인 건강을 위해서도 한결 낫다.

자신에게 부족했던 부분을 후임이 채워주리라는 기대는 사실상 섣부른 욕망이며 어설픈 교만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새로운 후임을 통해서 어느정도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외국의 유수한 대학교의 박사학위 소지자를 후임으로 선택하면 어딘지 모르게 교회의 품격이 올라가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자신이 미처 교인들에게 보여주지 못했던 은사를 지닌 후임자를 선정하면 교인들에게 빚진 마음이 조금이나마 갚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후임이 그런 장점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외모에 가려져 미처 드러나지 않았던 치명적인 약점을 간파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화려한 스펙을 지니고 신학적인 지식이 풍부한 목사를 후임으로 세웠더니 그때부터 설교는 살아있는 감동의 말씀이 아니라 틀에 박힌 ‘신학 강의’로 치닫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기껏 유능한 은사자를 선택했더니 강단의 말씀은 사라지고 허구헌날 무대의 ‘은사쇼’나 펼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결국 외형을 바라보다가 본질을 훼손하는,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요컨대 완전한 인간이 없듯이 완전한 목사가 있을 수 없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완전한 자를 쓰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해서 주께 온전히 의지하는 자를 쓰신다는 사실이다. 바울이 누구인가? 기독교의 실제적인 창시자이며, 기독교 신학의 거두에, 죽은 사람도 살리는 불세출의 은사자가 아니던가? 그런 바울도 일생에 걸쳐서 끝내 제거하지 못한 육체의 가시가 있었으며, 말이 어눌하고 외모가 초라해서 초대교회의 교인들에게 가차없이 무시당했다. 그러나 바울은 “내가 약할 때에 강함 되시는 주”를 소리 높여 찬양하지 않았던가.

완전한 목회를 기대하지 말고, 순종하는 목회를 갈망하라. 동산에서 자라는 나무의 모든 실과를 먹을 수 있었음에도 아담은 하나님이 유일하게 금지하신 과실, 즉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탐내다가 결국 인류 최초의 죄로서 ‘원죄’를 저지르고 마침내 사망의 죄삯을 치르고 만다.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나약함을 오롯이 인정하는 겸손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미덕으로, 은혜와 순종의 조건이다.

목사들은 후임을 선택할 때 절대로 전면에 나서지 말아야 한다. 사사로운 욕망으로 후임을 선정하는 순간부터 교회는 불화의 불길에 휩싸인다. '내 교회'라는 그릇된 의식을 떨치고 후임의 선택은 교인들에게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자기 입맛에 맞는 후임을 결정한다는 욕망 자체가 이미 자신의 내면에 새겨진 그릇된 영성과 교만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다. 은연중에 ‘내 교회’라는 인식과 더불어 ‘완전한 교회’의 섣부른 욕망이 서려있기 때문에 은퇴하는 순간에도 ‘내 교회’의 영원한 소유권을 주장하며 자신의 ‘영적 아들’에게 상속하려는 것이 아닌가.

결국, 목회를 이양하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전임과 후임 사이에 가당찮은 ‘주인 의식’이 서로 상충한다. 전임은 개척자로서 교회의 영원한 주인이라는 의식을 끝내 숨기지 않고, 후임은 새 주인으로서 법적인 당연한(?) 권리를 주장한다. 단언컨대, 주인의식이 서로 상충하는 한, 전임과 후임 사이는 결코 좁힐 수 없는 괴리가 있다.

교회의 주인은 오직 교회의 머리이시며 생명을 바쳐서 ‘내 교회’를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전임은 그동안 목회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주께 감사하며 조용히 자리를 떠나야 하고, 후임은 새로 맡은 목회의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목사의 직분에 충실해야 한다. 덧붙여 후임은 주께 감사하는 마음과 더불어, 그동안 교회를 개척하고 힘겹게 목회를 하면서 수고했던 전임에게 기본적인 예의를 갖춰야 한다.

내가 대부분의 목사들에게 마음이 돌아선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영적인 문제 이전에 인간적인 모습에 대한 결정적인 실망 때문이다. 기본적인 의리도, 인품도, 윤리도 없는 인간들이 강단에서 도덕과 계명, 심지어 그리스도의 영성을 주절대는 모습을 보서 인간의 가증한 외식, 그 자체를 보는 고통을 느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깊은 영성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도리를 먼저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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