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성도는 '호갱'이 아니다
가나안 성도는 '호갱'이 아니다
  • 강만원
  • 승인 2015.01.29 07: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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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 강만원 © <뉴스 M>

‘100만 가나안 성도 시대’가 도래했다. 흔히들 한국교회의 변천사를 말하면서, 70~80년대의 부흥기를 거쳐서 90년대부터 한국 교회의 성장이 멈추고,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인들의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교인들이 줄어든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예수를 믿는 교인들의 수가 아니라, ‘한국교회의 교인들’의 수가 현저하게 줄었을 뿐이다. 끝없이 터지는 목사들의 비리와 교인들의 위선적인 삶, 그리고 한국교회의 총체적인 불의에 환멸을 느낀 그리스도인들이 ‘한국교회의 안락한 예배당’을 버리고 기꺼이 거친 광야로 뛰쳐나간 것이다.

물론,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통칭해서 가나안 성도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실족’한 사람들로, 교회를 떠나는 동시에 믿음을 버리고 예수를 떠난 불신자도 있고, 일부는 개인적인 사정이나 허물로 인해서 부득불 교회를 떠난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모두 가나안 성도라고 부를 수는 없지만, 상당수는 여전히 성도로서 변함없이 예수를 믿고 있으며, ‘새 둥지’를 틀기 위해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회’를 갈망하고 있다.

아마, 세계를 통틀어서 한국만큼 전도에 열정적인 나라가 없을 것이다. 교회마다 ‘전도폭발훈련’은 기본이고, 전도대는 교회의 핵심 부서다. 노방 전도나 축호 전도는 이미 오랜 전통이며, 진돗개 전도에 고구마 전도, 번개 전도에 관계 전도처럼 새롭고 다양한 방법들을 줄기차게 선 보이며 교회마다 한결같이 전도에 혈안이다. 예외없이 전도왕은 교회에서 최고의 칙사 대접을 받으며,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받은 우수한 교인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전도의 목적이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새로이 전하면서 불신자를 교회로 인도하는 것이라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전도는 엄밀히 말해서 성경적인 의미의 전도가 아니다. 교회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했다면서 ‘새가족’으로 정성스럽게 모시지만,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다른 교회에서 ‘수평 이동’한, 기존 교인들이기 때문이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수치대로 굳이 비율을 말하자면, 기존 교인이 거의 100%다. 예를들어, 한 주에 평균 10명의 새가족을 소개한다고 가정할 때 대략 10 주에, 다시말해 100명의 새가족들 중에서 기껏해야 한두 명 정도가 교회에 처음 발을 딛은 새신자다.

도대체 왜 그럴까? 한국의 개신교인 비율이 전체 국민의 20%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상 ‘추수할 곡식’이 곳곳에 널렸는데 도무지 추수가 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예수께서 “너희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새기면 답은 금방 떠오른다. 이유인즉, 타락하고 부패한 한국교회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의 철저한 반감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일망정 한국 교회에 대해서 최소한의 호감이 있어야 그나마 전도가 이뤄지지 않겠는가. 그런데, ‘종교가 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기윤실’에서 여론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한국교회의 앞날이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가톨릭의 신뢰도가 34%, 불교가 27%인데 반해 개신교의 신뢰도는..... 8%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최신 기법(?)을 동원해서 전도에 매달린다고 해도 결과는 뻔하다. 기껏해야 다른 교회의 교인들을 빼내서 제 배 채우기에 급급할 뿐이며, 한국교회 전체로 볼 때 전도의 결실은 결국 제로인 셈이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교회에 열심히 다니던 교인들조차 한국교회의 불의와 목사들의 비리에 절망감을 떨치지 못하면서 점점 교회에 등을 돌리고, 서서히 교회에서 이탈해서 ‘가나안 성도’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아예 한국교회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교인들의 수평이동은 암만해도 ‘제 살 깎아 먹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요즘 한국교회는 전도의 새로운 대안으로 가나안 성도를 다시 교회로 불러들이는 ‘소환 작업’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미 가나안 성도의 수가 100만에 이르고, 지금 추세라면 불과 수 년후에 200만을 웃돌 전망이기 때문에 가나안 성도를 향한 한국교회의 구애는 더욱 뜨거워질 수 밖에 없다. 이쯤되면 가나안 성도는 이른바 ‘블루 오션’이 아닌가. 전도는 사람 낚는 사역이라는데, 이보다 좋은 어장이 어디 있는가.

 

교회의 양적 성장에 골몰하는 ‘보수적인 교회’를 빗대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을 - 정확히 말하면 교회가 아니라 한국교회를 떠난 성도를 - 다시 교회로 부르기 위해서 이른바 ‘개혁 목사들’도 나름대로 무진 애를 쓴다. 목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면서 교회를 떠난 성도를 유인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지만, 가나안 성도에 대한 그들의 접근 방식이나 인식을 보면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가나안 성도는 단순히 한국교회의 부정적인 ‘현상들’ 때문에 순간적으로 실망해서 교회를 떠난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일으킨 근본적인 요인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이 형식적인 개혁으로 결코 치유되지 않는다는 것을 익히 깨달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교회를 떠난 것이다.

새로운 교회상을 제시하며 열심히 개혁을 부르짖는 목사들을 보면서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제도를 비롯한 지엽적인 문제에는 민감하지만 정작 본질적인 문제에는 매우 둔감하다는 사실이다. 가톨릭을 결정적으로 타락시킨 중대한 요인이 ‘사제 성직주의’였던 것처럼, 오늘날 한국교회를 패망의 길로 이끄는 절대 요인은 반성경적인 ‘목사 성직주의’다. 엄밀히 말해서, 소수 특권층이 누리는 ‘성직 주의’는 결국 성직자 독재주의이며, 소수를 위한 성직주의는 거룩한 성도의 보편적 직분인 성직과는 엄연히 다르다.

마치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과 유대 종교권력자들의 탐욕과 외식의 도구인 율법주의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처럼, 성직과 성직주의는 근본부터 다르다. 성직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본성에서 파생하는 영적 개념인 반면에 성직 주의는 인간의 종교의식에서 비롯되는 육적인 가치관이며 종교 우월주의의 배설물이기 때문이다.

개혁을 외치는 목사들이 나름대로 애쓰지만 그들에게 그닥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정작 그들은 한국교회의 진정한 개혁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핵심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설령 깨달았다 해도 실천의 의지나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근래에 가나안 성도들과 깊이 있는 대화를 하면서 느낀 것은, 그들은 더 이상 목사를 영적으로 우월한 존재로서 이른바 특별한 소명을 받은 ‘성직자’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목사는 ‘우월한 영적 존재’가 아니라 같은 성도일 뿐이다. ‘같은 성도일 뿐...’이라는 말은 성도의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적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당연한 진리를 그들은 이미 깨달았다는 뜻이다.

개혁을 내세우는 목사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목사의 우월한 권위의식’을 버리지 않는 한 한국교회에 진정한 개혁은 있을 수 없다. 본질상 교회는 차별적 서열과 계급이 없이, 형제로서 '하나의 몸을 이루는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진정한 개혁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로 교회가 근본부터 다시 세워지지 않는다면 가나안 성도는 결코 지금의 한국 교회로 돌아오지 않는다.

분명한 의식이 있어서 제도권 교회를 떠난 가나안 성도들에게는 교회에서 왕처럼 군림하는 제왕 목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같은 성도로서, 그리고 주 안에서 수평적 관계로서 ‘형제’가 있을 뿐이다.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이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아닌가.

그러나, 개혁을 주장하는 목사들 가운데 진정 ‘목사의 특권 의식’을 버린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강만원 /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자. 작가.
성균관 대학교와 프랑스 아미엥 대학에서 공부했다. "당신의 성경을 버려라"의 저자이며 종교, 철학 부문의 전문번역가로 활동한다. 단순한 열정,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신이 된 예수, 루나의 예언, 자연법의 신학적 의미, 예수의 역사와 신성 외 다수의 작품들을 번역했으며, '아르케 처치'에서 성경강의 및 번역, 출판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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