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사랑'
'이웃 사랑'
  • 정지석
  • 승인 2015.02.19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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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고통 받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교회 되길
이 기사는 새길교회 정지석 형제가 2009년 1월 25일 평신도 열린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길교회에서 설교한 내용 전문입니다. 새길교회는 담임목사가 설교하지 않고, 평신도가 한주씩 돌아가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설날 명절 주일에 하늘의 복을 많이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설날을 신일(愼日)이라고 합니다. 몸과 마음을 새로이 신중히 하고, 이웃과의 인간관계를 좋게 회복하는 의미가 있는 날입니다. 자손은 부모와 친지 어른에게 세배하며 사람 사는 도리를 배우고, 어른은 자녀에게 좋은 말로 삶의 길을 가르치는 날입니다. 이웃 간에는 덕담으로 서로 잘되기를 기원합니다. 사람살이가 본래 이렇게 좋은 길로 이끌어주고 서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 기본 바탕이 있습니다. 이 선한 기본 바탕의 마음이 곧 종교의 마음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통해 함께 생각해보려는 이웃 사랑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곧 이런 마음과 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신년절을 지킵니다. 이들은 오랜 포로 생활에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는 날을 신년절로 지키므로 우리네 달력과는 다릅니다만, 속죄하며 마음과 생활을 새롭게 한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명절날 율법(토라)을 읽으면서 개인 차원의 삶을 갱신할 뿐만 아니라 민족 차원에서 도덕적 각성을 추구하는 전통을 지금까지 유지하는 도덕적으로 매우 높은 종교 생활을 해 온 민족입니다. 제가 미국 필라델피아에 있을 때 유대인 공동체의 명절에 초대받아 참석한 적이 있는데, 큰 두루마리로 된 토라를 품에 안고 방 안을 빙빙 돌면서 춤을 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믿는 토라를 가슴에 안고 찬양하며 뛰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종교적 삶, 율법 정신을 체화시키고자 하는 유대인들의 체화된 신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유일신 하나님을 삶의 근간으로 삼는 신앙은 유대인들의 역사적 존속의 근본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신앙은 다른 신앙 혹은 이웃 이방 민족들에 대해서는 완고한 배타성의 근원으로 작동했습니다. 유대교의 하나님 신앙 절대주의는 이웃 사랑의 윤리보다 상위 계명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웃 사랑의 계명을 중시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사랑이 우선되는 상황에서는 이웃은 희생될 수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에서 읽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관한 계명이 구약 토라(신명기와 레위기 법전)에 근거한 것이지만, 예수께서 이를 새로이 갱신합니다. 하나님 신앙과 이웃 사랑의 실천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신앙)과 이웃 사랑(실천)은 우리가 한해를 시작하면서 새로이 마음에 새길 신앙과 삶의 기본이 되는 근본 원리요 토대입니다. 지난번 신년 주일에 하나님 사랑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이번 주일에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춘 것은 좀 더 이를 강조하고자 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 둘을 결코 따로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사랑(신앙)'이나 '하나님 신앙(사랑)없는 이웃 사랑' 모두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이웃 사랑에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보기로 합니다.

이웃 사랑은 참된 교회요 기독교인이 되는 길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 예수 따르미가 되는 절대 조건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진은 빈곤층에게 급식을 하는 모습. (사진 출처 대한적십자사)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기독교인이 되는 길, 예수 따르미가 되는 절대 조건을 보여줍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는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웃 사랑의 계명을 잘 지키는 기독교인은 적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다 잘 알고 있는 계명이면서도 지키기는 어려운 계명입니다. 또 이웃 사랑을 나름대로 한다 해도 예수께서 가르친 대로 하는 것인지도 잘 생각해 봐야할 것입니다. 자기와 친한 이웃이나 동족 이웃을 사랑하면서 이웃 사랑을 실천했다 말할 수 있는 것인지 깊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예를 들면 친구나 동족의 일자리가 부족하다고 외국인 노동자들을 박해하고 비인간적으로 몰아내는 행위는 예수의 이웃 사랑의 가르침과 합치되는 것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인간 세계에서 예수의 이웃 사랑의 계명은 우리 삶과 신앙에 큰 도전이 되는 말씀인 것입니다. 말은 많이 하지만 실제 삶과 행동에서는 빈곤하고 또 선입견이나 기존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행하는, 그래서 기독교인으로서 걸려 넘어지는 것이 이웃 사랑의 계명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웃 사랑은 교회가 참된 교회됨의 길인데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서 많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것만으로 온전한 기독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의 핵심 요지라고 저는 봅니다. 이웃 사랑 없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매우 의심스런 믿음이지만 잘 믿는다 해도 이웃 사랑이 없는 믿음은 예수님과 관계없는 믿음입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보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이웃 사랑은 가능할 수 있습니다. 현대 많은 사람들, 휴머니스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오늘 심각한 문제는 이웃 사랑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봉하는 3대 종교,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너무 잘 믿기에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일에 적극적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21세기 벽두부터 세계를 전쟁으로 몰고 간 참극들은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신앙이 빚어낸 것들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도 많습니다. 요즘 교회 안에는 다툼과 분열이 크게 증가하여 사회의 비난과 걱정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내 믿음이 제일이라는 오만에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자신들만 구원받았다는 신념아래 타 종교인들을 악마처럼 생각하고, 심지어는 같은 기독교회이면서도 '복음이 없다', '정치적이다', '구원이 없다'면서 비난하며 싸우는 모습들이 모두 이웃 사랑은 빠진 채 신앙생활 하는데서 오는 모습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곳일수록 이런 현상이 심합니다. 교회 건물이 높게 올라가는 곳일수록 이웃 사랑, 사회적 책임 의식은 적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쟁하고, 이웃을 정죄하고, 세상보다 더 물질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이웃 사랑 없는 하나님 신앙'의 무리들을 보면서 현대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 살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의 책 'The God Delusion, 만들어진 신'이 외치는 바가 그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일수록 문제가 많고 골치 아프게 하니 차라리 하나님 없이 사는 게 낫지 않느냐는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무신론자들이 더 하나님을 염려하고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웃 사랑으로 하나님 신앙을 증거하라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히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증언합니다. 그 상황과 맥락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 혹은 인정으로 나옵니다. 지난번 읽은 누가복음은 영생의 길과 아는데 그치지 말고 실천할 것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은 율법과 예언서를 통합시키는 것으로서 증거 합니다. 마가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법,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님 나라를 사는 길임을 증언합니다. 세 복음서의 증언은 각각 강조하는 바에 있어 차이가 있지만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이 유대교와 다른 점입니다. 유대교와 예수의 차이입니다. 사실 유대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구별합니다. 율법은 하나님 사랑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이웃 사랑의 계명은 하나님 사랑에 비해 부차적인 것입니다. 절대적인 것은 하나님 사랑입니다. 구약성서에 이웃 민족에 대한 무자비한 살육 전쟁이 야훼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번 새해에 이스라엘이 이웃하여 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무차별 폭격하여 많은 희생자를 내고 폐허로 만든 일은 단지 정치적인 이유뿐 아니라 종교적 신앙으로도 설명되는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혹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위협적인 이웃에 대한 공격과 살육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분리하는 유대교 신앙에서 가능한 일이 됩니다.

예수의 가르침은 율법주의적 유대교 신앙을 갱신합니다.

마태는 이를 예언자 정신과 율법의 통합으로 증언한 것인데 저는 예수의 이 갱신이 단순한 수정 보완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으로 봅니다. 예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동일시합니다.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면서 동시에 두 사랑은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것 입니다. 율법주의적 유대교 신앙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수의 삶과 복음이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의미는 이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를 성육신이라 했고, 마가복음은 이 땅에 실현된 하나님 나라라고 선언했습니다. 성과 속의 종교적 용어로 말하자면 세속의 삶에서 성스러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요한은 한발자국 더 나아갑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한 일서 4: 20-21). 세속의 삶에서 이웃 형제를 사랑하는 삶을 살 때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바로 믿을 수 있다는 증언입니다. 이웃 사랑의 삶이 하나님 신앙의 바로미터가 됩니다. 예수의 성육신의 삶이 보여준 바가 그것이었다는 것이 예수의 공생애를 같이 했던 사도들의 깨달음이었고 증언인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인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의 편에 서서 사랑을 실천함에 있습니다.

이웃 사랑은 빠지고 하나님도 잃어버린 채 믿는 신앙이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이웃 사랑을 상실한 율법주의 신앙은 하나님을 절대화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오히려 삶에서 분리시켜 멀리하게 하며, 하나님 신앙을 역사적 삶과는 무관한 것처럼 만들었습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 없는 신앙입니다. 성서와는 무관한 하나님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에서 나오는 삶은 하나님을 빙자한 자기 욕망과 이념을 따르는 삶이며 신앙일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에 율법주의 신앙이 넘쳐납니다. 율법주의 신앙은 가난한 이웃을 자선과 시혜의 대상으로 봅니다. 자선과 시혜는 결국 '나'를 위한 것이고 공적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신앙에서 우러나오는 이웃 사랑은 이웃을 주체로 삼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목표로 합니다. 자선과 시혜는 '내'가 어려워지고 공적이 안보이면 중단됩니다. 그러나 사랑의 봉사는 가난하고 곤경에 빠진 이웃이 있는 한 계속됩니다.

이번 설을 며칠 앞두고 용산 철거민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공권력은 사지로 몰려있던 철거민을 공격했습니다. 약하고 가난한 자를 보호하는 것이 공권력의 존재 이유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지로 쫓겨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수십 명이 죽고 다치도록 한 공권력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한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불타죽은 이 비극 앞에서 먼저 통치자가 책임을 느끼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정치를 말하던 사람입니다. 적극적 의미에서 신앙의 정치란 현실화되기가 참 힘든 것입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사람들의 기본 상식에 버금가는, 혹은 더 수준 높은 도덕의 정치를 보고 싶은 기대가 있었습니다. 같은 기독교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그에게 예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예수 따르미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이번 용산 철거민 참사는 너무 충격적인 일입니다. 이런 참극에 직면하여 자칭 타칭 기독교 신앙인임을 자부하는 대통령에게서 아무런 기대와 희망의 징조를 보지 못하는 것은 그동안 한국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이었나를 반성하게 합니다. 이는 한마디로 한국 교회가 '이웃 사랑 없는 율법주의 하나님 신앙'에 매몰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살아보려고 애쓴 것 밖에 아무 죄도 없다'고 울부짖는 희생자 가족의 얼굴이 우리의 양심을 아프게 합니다.

사랑은 삶의 축제

어거스틴은 이웃 사랑이 기독교인으로서, 교회로서 마땅한 책임이고 사명이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다 같이 곤궁하고 연약한 존재들이기에 서로 사랑하고 이웃의 어려움을 돌보며 나눠야 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을 권력자들의 손에서 구해야 하며 불의 재판에 희생된 자들의 은신처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 되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 되는 것은 가난한 사람, 억울한 사람의 편에 서서 사랑을 실천함에 있습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있을 것이나, 언제나 있다는 이 현실 인식이 우리들의 이웃 사랑을 허무주의로 빠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언제나 가난한 사람들은 있다는 생각이 자칫 우리의 무관심과 외면의 이유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사랑은 궁극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가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하여 우리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하나님 없이 이웃 사랑하는 이들과의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우리 사랑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 사랑의 원동력입니다.

예수는 우리로 하여금 오늘 이 시대 속에서 이웃 사랑의 계명을 단순히 의무로서가 아니라 은총의 증거로서, 삶의 축제로서 하기를 권고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새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2절에는 예수께서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Love one another as I have loved you)'고 새 계명을 줍니다. 저는 예수가 준 이 새 계명에서 사랑은 우리 삶의 축제가 된다는 복음을 봅니다. 사랑하는 일이 의무로 해야 하는 일이 된다면 얼마나 힘들고 비참한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함은 우리가 먼저 예수의 사랑 체험을 함으로 시작됩니다. 사랑받은 이로서 우리는 사랑의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 사랑받은 기쁨의 몸과 마음에서 서로 사랑합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은 자연스레 또 타인을 사랑합니다. 사랑받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우리 예수 따르미들의 공동체입니다. 사랑받음으로 자연스레 사랑하게 되며 이웃사랑도 이런 사랑의 선순환 속에서 이뤄집니다. 그럼으로써 이웃 사랑은 우리에게 - 사랑을 하는 이나 받는 이 모두에게 삶의 축제가 됩니다. 마가복음에서 오늘 읽은 하나님 나라에 가까웠다는 예수의 말씀은 이런 삶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 봅니다. 미켈란젤로는 '사랑하는 사람은 날개 없이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는 신앙 공동체

이 시대 우리 교회와 기독교인은 이웃 사랑의 능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것은 고난의 민감성을 회복하고 키우는 데서 시작합니다. 퀘이커는 '고난위원회(Suffering Committee)'를 두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일합니다. 지구상에서 고난은 한도 없이 많이 일어납니다. 작은 신앙 집단이지만 이들은 고난위원회를 통해 세상 고난 받는 곳에 안테나를 걸어두고 고난 받는 사람들을 돕는 긴급구조 같은 일을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전쟁이나 재난 등 고난이 있는 곳에 크던 작던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이들의 손길이 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새길 신앙 공동체에도 이런 고난위원회가 있어서 가까운 우리 주변에서부터 세계에 이르기까지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향한 예수의 사랑을 전하고 증거 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정지석 / <미주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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