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벼락도 벼락맞을 일이다
돈벼락도 벼락맞을 일이다
  • 최태선
  • 승인 2015.03.26 09: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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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참된 신앙인은 돈을 경계해야

벼락을 맞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벼락 맞아 죽을 놈'이란 말은 크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 천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벼락을 맞고 싶은 사람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맞고 싶다고 말하는 벼락이 있습니다. 예, 돈벼락입니다. 사람들은 죽어도 좋으니 돈벼락이나 한 번 실컷 맞아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그렇게 돈벼락을 맞은 사람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습니다. 엽총 총기 사건의 주인공들이 바로 돈벼락을 맞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남양뉴타운'이라는 도시 개발로 한 노인이 70억 원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남양에서 가장 현금을 많이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그토록 맞고 싶어 하는 돈벼락을 맞았습니다. 어머니가 남긴 농토가 도시 개발로 수용되며 큰돈을 받게 된 것입니다. 불행은 그 노인에게 동생이 하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74세의 동생은 86세의 형을 찾아와 돈을 좀 나누어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순순히 돈을 나누어주는 경우란 없습니다. 결국 동생은 그런 형에게 불만을 품게 되었고, 그 불만은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납니다. 그리고 마침내 형은 더 이상 형이 아니라 죽여 없애야 할 원수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 사냥을 위해 사용하던 엽총을 들고 형을 찾아가 형과 형수를 죽입니다. 그리고 형의 자녀들도 죽이려 합니다. 조카는 숨을 죽이고 숨어서 경찰에 신고를 하였습니다. 경찰이 출동하였지만 이미 형 내외는 사살된 이후입니다. 평소 안면이 있던 범인을 진정시켜 체포하려는 파출소장은 사람을 죽이고 분노의 화신이 된 동생의 총에 또 다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세 명의 생명을 죽인 범인은 자신에게도 총을 쏘아 사건은 일단락이 지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매우 전형적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도시개발→거액보상→가족갈등→총기 살인극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의 의미를 잘 파악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런 결과를 보고도 그 사건이 주는 교훈을 받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거나 본 사람에게 그래도 돈벼락을 맞고 싶으냐고 질문하면 대부분은 그래도 돈벼락이나 한 번 맞고 죽으면 여한이 없을 것이라고 대답을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동생의 총에 맞아 죽은 86세의 그 노인이 돈벼락을 맞아보았으니 나는 행복하게 죽었다고 말할까요? 물론 우리는 그분의 말을 직접 들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분이 차라리 돈벼락을 안 맞은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런 불행을 보고도 여전히 돈벼락을 맞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돈이 가지는 위대한 힘이며 영향력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은 돈에 지배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됩니다. 돈이 가지는 위대한 힘은 이와 같이 은밀하게 사람을 장악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실상이 드러나고, 아무리 비참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도 여전히 돈에 대한 인간의 기대는 꺾이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과 견줄 수 있을만한 위력을 돈은 지니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이제 죽은 형과 동생의 장례가 진행될 것입니다. 형의 가족들은 동생을 원망할 것이고, 동생의 가족들은 형을 원망할 것입니다. 그리고 피를 나눈 두 형제들과 그 가족들은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원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은 그 발단과 원인이 돈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돈 때문에 일어나는 불행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너무도 상식적인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냐 돈이냐를 선택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에 따르면 하나님의 반대는 마귀가 아니라 돈입니다. 그것은 다만 경제가 우상이 된 우리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인류가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화폐라는 것이 기능하기 시작한 이후의 모든 문화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란 돈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여기서 중간지대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중간지대가 있다고 믿고 거기에 머물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하게 돈을 선택한 것입니다. 거기서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지 않냐고 묻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난을 위해 기도했고, 앞날에 대한 안정성이 전혀 보장되어 있지 않은 현재의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하나님만을 붙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선택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면 돈으로 향하는 자신의 마음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돈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돈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이 돈벼락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이기를 바랍니다. 돈을 벌면 오히려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교만해지지는 않는지, 사치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이웃들의 필요를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지고 있는 돈 때문에 불행해진 형제는 없는지, 인간관계의 담을 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가진 돈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내가 하나님보다 돈을 더 신뢰하는 것이 아닌지를 늘 돌아보면서 돈의 영향력을 최소화하기 위해 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덧붙이면, 돈은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듭니다. 폭력적으로 변한 인간에게서는 공감과 배려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돈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원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늘 돌아보아야 합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 범죄와 폭력이 넘치고 사랑과 우정과 환대와 친절함이 사라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더 끔찍한 현상은 인간에게 그토록 소중한 것들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섹스로 치환되고, 우정은 이익을 위한 이합집산이 되고, 환대는 적선이 되고, 친절함은 가식으로 변합니다. 그런 사회에서 부자건 가난한 자건 소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돈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모든 불행의 씨앗이라는 이 엄연한 사실을 외면하지 말고, 돈으로 무엇인가를 이루려하는 어리석은 생각들을 모두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돈벼락 맞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돈때문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돈'자만 들어도 긴장하고 경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최태선 목사 / 어지니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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