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시나이 반도에는 시내산이 없다?
[연재] 시나이 반도에는 시내산이 없다?
  • 성기문
  • 승인 2007.12.01 01: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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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4) 내 백성을 내어보내라!

들어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3회에 걸쳐서 시내산과 미디안의 위치에 대한 고대의 증거와 성경상의 증거, 그리고 이집트의 국경과 시나이 반도에 대한 간략한 논의를 하였다. 이제부터는 출애굽 여정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논의를 시작하고자 한다. 베이스연구소의 연구 결과들과 전통적인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대한 반론 등은 이번 출애굽 여정에 대한 논의가 끝난 후에 간단하게 다룰 것이다. 이제 우리의 논의는 이집트->광야(시나이 반도)->바다로의 도피->광야(미디안 광야)의 순서로 진행될 것이다.

1. ‘출애굽’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우리가 자주 출애굽(out of Egypt)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만, 기술적인 측면에서 출애굽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할까? 지리적인 측면일까? 소위 수에즈 라인(정도)를 벗어난다는 의미일까? 바로와 이집트의 정치-군사적 영향력을 벗어난다는 의미일까? 전통적인 입장이라면 수에즈 라인 정도를 벗어난 것이 바로 출애굽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후자일까? 아니면 복잡한 함의를 갖고 있는 표현일까?

출 12:51(참조. 다른 유사 구절)은 유월절 식사가 있었던 바로 그날이 출애굽한 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 16:6에 따르면, 유월절과 관련하여 “네가 출애굽하던 시각, 곧 초저녁 해질 때에”라고 말하고 있다. 출 13:3, 8-9에 따르면 무교병을 먹는 첫날이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완전히 출애굽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는 이스라엘이 숙곳과 에담으로 여행하는 것과 맞물리기 때문에 이때도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영토 내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보면 라암셋에서 숙곳(아마도 이곳은 나일 삼각주 외부로 소위 광야[아래에서 논의될 것이다]라고 불리는 지역의 가장자리였을 것이다)까지를, 심지어는 광야 생활 자체(출 12:39, 14:11, 수 24:6)도 출애굽의 한 과정으로도 묘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 바로와 이집트의 지배(종살이)에서 벗어난 때부터가 출애굽이라고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다가 그것이 점차적으로 확장되어 진정한 출애굽(신학적 의미)에서 홍해를 건널 때까지의 지리적 이동(참조. 수 2:10; 삼상 10:18)을 출애굽이라는 범주에 넣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수에즈 라인(전통적인 입장)은 일차적인 의미(유월절-무교절 기간)로 보거나 확장적인 의미(홍해를 건널 때까지)로 보거나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에는 몇 가지 구별이 필요하다. 이집트 바로의 노예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신분 변환이 출애굽의 첫 번째 국면이다. 이 출애굽은 즉각적으로 발생하였다(신 16:1, 6). 그러나 이러한 신분의 변환은 홍해로 이르는 광야 길을 통과해서 점차적으로 강화되었다(신 16:3, 출 14:11).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홍해를 건너는 일로 완성된다는 점에서 출애굽의 마지막 국면은 홍해를 건너는 일도 출애굽에 포함되어야 한다(시 78:12-13, 수 2:10, 시 106:7-8). 물론 우리의 논의는 결국 다시 홍해가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가게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논의와 필자의 평가로 볼 때, 전통적인 홍해의 위치를 고수하기는 어렵다.

2. 제사의 길과 섬김은 다르다?

우선적으로 모세는 이집트의 바로에게 야웨를 제사하기 위하여 이집트에서 광야로의 사흘 길을 요청하였다(출 3:18, 5:3, 8:27). 이 광야는 소위 출애굽한 후에 홍해를 건널 때까지의 지역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는 ‘홍해의 광야’다(출 13:18). 하나님은 가나안으로 이르는 길들 가운데 가장 북쪽의 길인 (그리고 가장 가깝고 수월한) ‘블레셋으로 향하는 길’을 택하지 않게 하셨다(출 13:17). 아마도 모세는 3일(숙곳까지 1-2일, 에담까지 2-3일 소요) 만에 출애굽을 하고 광야에 진입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에 있다고 말했다(출 14:11. 비교 수 24:6). 물론 앞서 언급한 대로 이들의 출애굽 행로는 이들이 홍해를 건너기까지는 완결된 것이 아니다. 즉 이미 그들은 출애굽을 하였지만, 사실 아직 그들은 출애굽을 한 것이 아니다. 이 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재미있는 사실인데, 우리의 마음속에 영화 ‘십계’(Ten Commandments)에 대한 잔상(殘像)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나시는 분들은 십계와 이집트 왕자를 필자의 글과 함께 자세하게 살펴보시기 바란다. 출애굽의 시작과 과정과 끝의 진실, 성경이냐 영화냐, 고민이 될 것이다. 십계는 ‘일개의’ 영화지만, 성경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예수의 일생에 대한 영화도, 그림도, 조각도 마찬가지다.

다시 십계로 돌아가자. 십계가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최근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제작한 ‘이집트의 왕자’(prince of Egypt)는 어떤가? 십계는 사실 오류가 많은 영화다. 그 단적인 예가 홍해를 건너는 장면이다. 정말 십계의 모세처럼 금세 홍해가 두 쪽으로 갈렸던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자마자 바로의 군대들이 추격해왔던가?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보로 광야 길을 걸었던가? 이게 모두 우리가 진리로 받아들이는 내용들이 아닌가? 성경이 이 모든 가정들을 사실이라고 반증해주는가? 아닌가?

필자가 신대원을 다닐 때 들은 이야기로는, 십계 영화를 찍을 때 감수해주었던 신학자들의 신학적 성향이 ‘잘’ 반영되었다고 한다. 국내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도 마찬가지다. 감독의 신학적 성향과 이해가 많이 반영된 일개 영화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역사적 실체와 신학에 대한 잘못된 인상과 정보를 준다는 점에 대해서 심각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3. 무교병-출애굽의 여정에 대한 고통의 떡?

출애굽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또한 유월절 이후의 무교병의 기간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어째서 이스라엘은 유월절 이후에 무교병을 일주일간 먹어야 했던가? 아마도 이스라엘에게는 총체적 출애굽을 위해서 7일이 주어졌던 것 같다. 무교병이 ‘효모가 없어서 부풀지 않아서 딱딱하고 맛이 없어서’ 고통의 떡이라고 불린 것이 아니라, 이들이 쉴 새 없이 밤낮으로 강행군하여 출애굽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통의 떡이라고 불린 것이다(신 16:3). 모세는 “[7일 동안에] 너희가 서둘러 이집트 땅을 나왔기 때문에” 7일간 너희는 그것과 함께 무교병, 즉 고난의 떡을 먹으라고 말한다. ‘서둘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빠른 행동에 대한 정서적 측면이 고려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스라엘에게 7일간 고난의 떡을 먹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출애굽의 행군의 고통이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3일간의 행보(얄라크)와 바로의 추방(샬라크) 자체는 다른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열 가지 재앙과 관련하여 모세가 처음으로 바로에게 요구할 때는 자신들을 추방해(샬라크)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바로는 이 첫 요구를 거절한다(출 5:1). 그러자 모세는 광야로의 3일간의 행보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도 거절되었다. 그러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세에게 바로가 결국 이스라엘을 추방할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요구는 시내산의 위치와 거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좀 더 약화된 이집트의 바로의 영향권 내에서의 자유로운 야웨의 예배를 요구하는 것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세 번째 것은 바로와 이집트와의 완전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3일간의 행보의 영역 속에는 엄밀하게 출애굽 자체나 시내산까지의 거리나 위치에 대한 그 어떤 증거나 실마리도 있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우리는 이러한 동사들의 사용에서 표현상의 말장난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출애굽루트를 찾는 일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중대한 개념상의 차이가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을 상기시키면서 오늘의 논의는 마치고자 한다.

“우리가 광야로 사흘 길을 가서(얄라크), 주 우리의 하나님께 제사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출 5:3, 새번역 수정).
“그들이 나를 섬길 수 있도록 나의 백성을 내어 보내라(샬라크).”(출 8:1, 새번역 수정).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각 문장에서 사용되는 동사들의 차이와 함께 하나님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일시적인 허용을 요구하는 것과 바로와 이집트와의 ‘주-종’ 관계를 청산하고 야웨를 섬기는 자들이 되는 완전한 자유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우리가 살펴본 바대로 그러한 차이점은 시내산이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후에 3일 만에 도착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결론

지금까지 출애굽의 의미, 제사를 위한 3일 길과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한 방출(?)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정립해보았다. 다음에 몇 차례 행해진 출애굽 과정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즉, 여러분은 300만 명의 사람들이 출애굽하여 ‘그렇게나 빨리’ 광야를 지나 홍해를 건널 수 있었을까를 의심해본 적이 없는가? 정말 이것이 논리적으로 가능했을까?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이었을까? 다음 시간에는 그러한 질문들을 가지고 출애굽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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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왕 2007-12-07 14:25:12
게시판에 답변을 드렸습니다.

젊은언니 2007-12-06 04:17:00
기사비평에 있는 저의 "떨기나무"와 관련된 저의 제의에 간단히라도 답변해 주실 수 있는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