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이 불여일혁(百信而不如一革) 교회개혁의 중요성
백신이 불여일혁(百信而不如一革) 교회개혁의 중요성
  • 최종운
  • 승인 2008.03.12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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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경을 백 번 믿어도 한 번 개혁하는 것보다 못하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 백견(百見)이 불여일각(不如一覺), 백각(百覺)이 불여일행(百覺而不如一行), 백행(百行)이 불여일성(不如一成)시리즈 글에 뒤이어 마지막으로 시리즈 글을 총 결산하고 우리의 잘못된 믿음을 개혁하자는 의미에서 백신(百信)이 불여일혁(不如一革)이란 제목으로 교회 개혁의 당위성을 설명 해 볼까 합니다. 이미 필자의 글에서 교회 개혁에 대한 말을 수없이 했습니다만 한 번 더 교회 개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시리즈 마지막으로 새로운 성어를 창조하여 말을 해볼까 합니다.

이 말은 성경을 백 번 믿고 설교를 수천 번 들어도 한 번 개혁하는 것보다 못하다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목사가 성경을 왜곡하고 당의정 같은 달콤한 복음만 외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의 생명은 세포가 주기적으로 교체되는 데 있습니다. 즉 세포가 유전자의 정보와 일치하여 개혁하여야만 우리 몸의 생명이 유지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개혁도 주기적으로 개혁의 유전자 정보와 일치하게 개혁하지 않으면 교회는 병들게 됩니다. 세포가 복제될 때 정보가 일치하지 않으면 암세포로 변이되듯이 교회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는 개혁 교회의 유전자 정보와 일치 하지 않은 성경의 해석과 약장사 같은 설교로 성도들의 영이 죽어가게 하는 귀족 목사들의 암세포 유발인자를 차단하여야 합니다. 거기에 교회 개혁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역사가 없었다면

예수님께서 율법의 족쇄를 개혁하여 복음을 완성하셨다면 또 한 번 중세의 종교 개혁을 통하여 오랜 기간 동안의 종교적 엔트로피가 증대된 어둠의 세상에서 밝음의 세상으로 환골탈퇴를 하였습니다. 인간의 역사는 또 다시 그러한 개혁의 에너지가 쇠잔하여 개혁의 당위성이 요구되는 시대적 기운이 감돌고 있습니다. 대형 교회의 귀족 목사들의 호화 생활은 중세 교황의 호화 생활과 유사합니다. 아마도 더 했을 겁니다. 종교적 부패가 극에 이르렀다는 말이지요.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세계사의 한 페이지에 암흑의 시대로 장식한 중세의 천주교가 지금은 클린 이미지로 우리 사회에 어필되고 있고, 개신교는 정반대로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속물의 이미지로 어필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하였지요. 음과 양이 바뀐 셈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런가 봅니다. 인간의 기준으로 볼 때 진리란 가변적이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잘못 된 것은 복원시키고 원위치하시는 역사의 섭리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서구 사회는 산업혁명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자본주의 체제도 없었을 겁니다. 아직도 암흑의 시대를 살고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개혁 교회도 없었을 겁니다. 개신교의 뿌리는 종교개혁에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종교개혁의 전통과 정체성 과거의 역사로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종교개혁의 정신이 사라지고 거꾸로 개신교회가 성도를 옥죄고 이 시대의 어둠의 세력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맘몬을 섬기는 웰빙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교회가 암흑의 시대로 인도하는 임무 교대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천주교는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지고 이미지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개신교회는 사회적 신뢰도가 추락하여 다시금 중세 교회로 회귀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교회에 납부하는 헌금의 종류가 중세보다 더 많습니다. 목사가 돈을 더 밝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혁의 엔진을 지금 가동하기 위해서는 개혁의 정신을 되살려 사회선지지자인 언론의 지적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우리들의 잘못을 회개하는 개혁의 현재진행형이 되어야 하는데 아무도 개혁에 찬성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지금 빨고 있는 자본주배설물의 꿀물이 너무도 달고 아깝기 때문에 포기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전세계적으로 교황이 한 분이라면 개신교회는 교회 숫자만큼의 교황이 존재합니다. 지금의 각 교회는 당회장 목사가 마치 교황처럼 군림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 권력구조가 목사가 정점으로 되어 있어서 성도들을 옥죄고 착취하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천주교보다 더 권력지향적인 면이 있습니다. 더 세속적이고 반사회적인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래서 천주교로 개종하거나 천주교를 첫 종교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사이비 이단 교주처럼 목사의 권력이 절대시되어가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목회 이념에 세뇌당하여 눈멀고 귀가 멀은 성도들이 증가하고 있기에 교회는 영적 무력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교인 빼앗아가는 것을 막는 자기방어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오로지 목회 방침에 협조하고 순종하는 것이 최고의 성도로 인정하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의 목회 성공에 협조하게 만드는 충실한 팬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인 셈입니다.

개신교 목사 권력은 교황의 권력과 유사

중세 사회를 암흑으로 몰아넣은 천주교는 교황을 중심으로 한 카톨릭 교회이었습니다. 교황은 권력의 핵심으로 왕으로부터 일반 국민까지 존경과 섬김을 받고 모든 행정의 최후 결재 라인이었습니다. 그런 전통이 지금은 개신교회가 그 흉내를 내고 있습니다. 교리는 개혁신학을 이어받고 있지만 교회 권력은 교황 권력 시스템을 흉내내고 있다는 겁니다. 참으로 모순적이지 않습니까? 필자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천주교를 보면 다소 호감이 갑니다. 지금의 천주교가 교리는 다를지언정 개신교만큼 사회로부터 지탄과 방송의 구설수에 오르지 않고 있다는 점입니다.

장기간의 서슬 퍼른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주축이 천주교가 감당한 반면 그때의 교회는 대형 교회로 성장하는 데만 골몰하였을 뿐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민주화와 사회적인 정의 확대에 기여가 없는 종교 집단에 불과했습니다. 교리적으로 무조건 천주교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배울 것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중에 한 가지가 바로 신부들의 인사이동입니다. 시골이든, 산골이든, 도시든, 어디든 임직지로 가는 자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봉급은 똑같다고 알고 있습니다. 최저 임금 수준의 봉급을 받고 검소하게 생활하는 점을 개신교회가 본받아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느 곳으로 이사를 가던지 이사를 가면 그 지역의 성당에 출석한다는 것입니다. 대형 버스로 성도를 고객 모시기처럼 끌어모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반면 개신교는 독립 교회와 독립 재산제를 채택하고 있어서 부자 교회와 가난한 교회의 목사 봉급은 천양지차입니다. 그래서 고객을 한명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대형 버스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다단계시스템을 도입하여 꼼짝 못하게 합니다. 그래야 목사에게 떨어지는 돈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한 하나님 한 형제, 한 지체라고 부르고 있으면서 누구는 인삼뿌리 먹고, 누구는 무를 다려먹고, 누구는 배 터져 죽고, 누구는 굶어 죽는 불공평한 한국 교회의 목회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주는 모순적 교회 경제의 모습이므로 도시 교회든 농어촌 교회든 목사의 봉급 평준화는 시급히 도입되어야 하는 제도입니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듯이 오늘날의 한국 교회는 개혁 교회의 교리적 전통이 사라졌습니다. 만인사제장론이 실종되었습니다. 전적타락 교리가 가르쳐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오로지 목사 중심으로 교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오로지 목사의 설교 중심이 신앙생활의 지침으로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경 출판의 춘추전국시대입니다. 풍요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성경은 아무리 많아졌더라도 성경의 진리와는 멀어져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의 출판과 복음은 반비례하는 상황이라는 거지요.

성경과 찬송가 출판이 어느덧 이권, 수익사업으로 전락하여 갈등을 빚고, 교권 목사들의 판공비 재원으로 충당되는 상황이 바로 부패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성경과 기독교 서적, 설교는 홍수처럼 넘치고 있지만 복음은 개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성경을 제대로 가르치고, 설교하지 않고 있기에 교회가 성경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금 특히 대형 교회의 귀족목사들은 성경의 말씀을 왜곡하고 성공, 축복, 등의 인간이 좋아하는 취향대로 자의대로 해석하며 무당들이 만들어 파는 부적 따위를 팔아 돈을 챙기고 복음을 전하는 행위는 마치 부수입을 챙기는 학원 강사로 전락한 모습입니다. 돈을 밝히는 목사는 진정한 복음의 전달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탁 까놓고 말하면 대형 교회가 장사가 잘 되고 수익금으로 아들 회사의 운영자금을 대주고 그 사업장을 다른 사람에게 주기가 아까워 가업을 잇기라도 하는 듯이 교회를 세습하는 것은 바로 목회를 돈벌이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까?

지금 자본주의 시대에 살면서 사탄의 속성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 시대의 가치관으로 목회성공하기 위해서 성경과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이르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성도를 착취하고 억압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쌍하게도 한국 교회 성도들은 그 점을 깨닫지 못하고 그저 맹종하고 세뇌당하고 귀족 목회의 농장에서 따뜻하고, 분위기 좋은 곳에서 명품 설교나 들으며 유유자적하는 신앙생활의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모습이 지금의 한국 교회 모습이 아닐까요?

또 한 번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때

다시 본 주제로 원위치 하겠습니다. 현재 한국교회는 건물과 성경과 설교와 각종 기독교 서적과 성도들이 풍성하게 넘치고 있습니다. 믿음의 증거들이 도배를 하고 있고 귀족 목사들의 설교집은 양장본으로 고급스럽게 출판되어 있습니다. 대형 교회의 웅장함과 화려함과 성도들의 머리수는 가히 세계적입니다. 허지만 중세 로마 가톨릭과 같이 기득권을 장악하고 성도들을 통제하고, 복음을 증거하고, 다시 우민화하려는 다양한 목회 장악구조를 보고 염려와 기도하는 많은 교회 개혁가들의 목소리가 있는 것입니다.

믿음의 양산, 믿음의 거래, 믿음의 측정, 믿음을 담보로 귀족 교회와 귀족 목사가 목회성공의 모델로, 중세 로마 교회와 같은 시스템으로 회귀하려고 하는 몸부림치는 현재 한국 교회의 상황에서는 또 한 번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입니다. 백 번 허구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인간의 귀여운 학예회보다 복음의 날 선 검으로,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으로 단 한 번의 개혁을 통해서 정말 예수그리스도가 머리 되게 하여야합니다.

현재의 교회는 관료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충실한 조직이 되어버렸습니다. 모든 교회 직분이 동일한 하나님의 종으로 부름 받아 서로 섬기려고 하는 종의 자세를 가질 때 느헤미야의 개혁과 루터와 칼빈 등의 수많은 개혁가들이 주창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 아닌지요? 그런 교회를 개혁하는 것이 바로 개혁의 전통의 엑기스인 백신(百信)이 불여일혁(不如一革)의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줄이겠습니다. 더 이상의 글을 요구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이글을 마지막으로 백문이 불여일견 시리즈를 마치겠습니다. 필자의 논리는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많은 이견(異見)이 있을 줄 압니다. 이 세상에 예수그리스도의 복음 외는 절대적인 진리와 논리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복음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재포장하여 마치 자기 것인 냥 특허를 내어 말씀의 로얄티를 챙기는 것은 분명 배임죄와 뇌물수수죄에 속합니다. 브랜드 목사, 개그 목사, 탈렌트 목사, 귀족 목사들이 바로 그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필자의 글을 읽는 분들이나마 복음의 기초적인 원리를 깨달아서 현재의 지상 교회 특히 대형 교회의 특성인 종속적이고 노예적인 신분에서 제한된 자유를 누리기보다는 평등하고 주체적이고 주인 된 신분으로 복음의 진리가 주는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발효를 담당하는 누룩의 특성을 가지고 맘몬의 신이 득세하는 자본주의란 어둠의 공간으로 진입하고 있는 교회를 향해 다시금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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