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처치'라는 괴물이 탄생하기까지
'메가처치'라는 괴물이 탄생하기까지
  • 신광은·박삼종
  • 승인 2008.06.22 13:5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교회가 크기에 목을 매게 된 역사(2)

'Megachurch'(메가처치) 현상을 비판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최근에 <부족한 기독교> 시리즈로 세간에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옥성호 형제나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를 쓴 마이클 호튼, 또 <신학실종>, <윤리실종> 등의 ‘실종’ 시리즈를 쓴 데이빗 웰즈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은 교회의 크기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큰 교회의 일부 잘못된 면들만 비판함으로써 메가처치 현상을 피상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한 가지, 이들의 공통점은 메가처치의 그릇된 현상이 몇몇 사람들의 신학적 오류 때문에 생겼다고 보며 그들에게 모든 잘못을 뒤집어씌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지목당한 ‘희생양(?)’으로는 알미니우스, 찰스 피니, 빌리 선데이 등이며, 또 여기에 몇몇 교회 성장학자나 세속적 심리학, 마케팅 기법 등도 이 목록에 단골로 올라가는 이름들이다. 이들 몇몇 사람들의 실수 때문에 오늘날 이 모든 끔찍한 문제들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은 그들만의 잘못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대표자일 뿐이다.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앞글에서 보았던 것처럼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훌륭한 믿음의 선배들의 노력과도 연결되어 있다. 순수한 동기, 뜨거운 열심, 신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름대로 선한 싸움을 싸웠지만, 이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엉뚱한 부산물(by-product)과 부작용(side-effect)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것들끼리 이리저리 결합해서 ‘괴물’이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교회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 역사를 조금 더 추적해 보자.

▲ 미국 대표적인 대형 교회 중 하나인 수정교회.
1. 세계선교운동과 지상 명령 이데올로기

얼핏 보면 메가 처치 현상과 세계선교운동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18세기 이후 개신교의 세계선교운동은 놀랍게도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물꼬를 터 주었다. 세계선교운동은 심정적으로 선뜻 인정하기 싫지만 1, 2차 대부흥운동에서 메가처치 현상으로 나아가는 교량이며, 긴 우회로다. 그러니까 1, 2차 대부흥운동 때 규모에 눈을 뜬 교회는 세계선교운동이라는 긴 우회로를 따라 메가 처치 현상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가. '지상 명령' 이데올로기

첫째로, 세계선교운동은 '지상 명령'이라는 이름의 이데올로기를 제공했다. 지상 명령이란 ‘땅 위(地上)’의 명령이라는 뜻이 아니라 ‘지극히 높은 최고의(至上)’ 명령이라는 뜻이다. 쉽게 말하면 신자와 교회가 올인(all-in)해야 하는 최고 명령이라는 뜻이다. 1, 2차 대각성운동가들은 “영혼을 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뒤 세계선교운동가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게 된다. 미묘한 강조점의 변화가 생겼다. 이 주장에 따르면 선교 명령보다 더 긴급하고 중요한 명령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다른 과제들은 전부 부차적인 것이며, 그것들이 선교 명령을 도울 경우에만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지상 명령 이데올로기'다.

선교 명령을 지상 명령이라고 할 만한 근거가 성서적으로나 신학적으로, 역사적으로 취약하다. 성서는 최고의 명령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또 사실 교회의 역사에서 선교 명령을 신자와 교회에게 주어진 지상 명령으로 여겨졌던 적도 별로 없었다. 벌써 2~3세기 이후부터 교회는 선교 명령이 벌써 성취되었다고 보기 시작했다. 루터와 칼빈만 하더라도 선교 명령은 1세기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서 이미 성취되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18세기 이후 교회는 선교 명령을 미완의 과제요, 더 나아가 지상 최고의 과업이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은 중요하지 않다. 전도와 선교가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그리하여 점차 선교 및 전도 운동은 ‘대약진 운동’이나 ‘천리마 운동’과 같은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신자와 교회는 앵무새처럼 이렇게 읊조린다.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야 한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한다. 자, 나가서 복음을 전하자. 전도해서 사람들을 교회로 끌어오자. 강권하여 주의 집을 채우자.”

나. 목표의 구체화

둘째로, 세계선교운동은 교회와 신자가 올인(all-in)해야 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제공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나 ‘전도나 선교를 하는 것’ 등은 구체적인 목표라고 할 수 없다. 세계선교운동은 교회가 조금만 노력하면 금세 성취할 수 있는 구체적인 목표를 적절히 제공했다. 그것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땅 끝’이 바로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사실 땅 끝이란 성경에도 나오는 용어다. 그러나 그 의미는 시대마다 다르게 이해되었다. 한 때 땅 끝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혹은 바다 끝 낭떠러지를 뜻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바울에게 땅 끝은 스페인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증기선과 증기기차가 상용화된 19세기의 사람들에게 땅 끝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여행지가 되었다. 따라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일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매우 구체적인 목표가 된 것이다. 그러자 엄청난 효과가 나타났다. 신자와 교회가 여기에 올인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고로 목표는 구체적이어야 하는 법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설교했다. “이 세대에 세계를 복음화하자(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무디의 이 구호에는 바로 자신의 세대에 복음화가 가능하다는 놀라운 자신감과 뚜렷한 목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자신감과 목표의식이 유럽과 미국의 청년들을 선교에 올인하게 했다. 이렇게 해서 ‘학생 자원 선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이 일어났다.

이후 선교 명령은 점차 종말론적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즉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면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의 선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앞당기고, 역사를 종결시키며, 천국을 끌어내리는 종말론적 과업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 교회가 앉아만 있겠는가? 이 위대한 과업의 이름은 ‘세계 복음화’라고 불리게 되었다.

서기 2000년까지 세계 복음화를 달성하자는 ‘AD2000 운동(AD2000 &Beyond Movement),’ 복음의 발상지인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자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미완의 과업을 완수하자는 ‘과업완수운동(FTT: Finishing the Task)’ 등은 무디를 이은 ‘세계 복음화 운동’의 후예들이다. 전 세계 교회는 세계를 복음화하자는 구체적인 목표 아래 하나가 되었다. 1910년 에딘버러 세계 선교 대회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대회는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세계 복음화’라고 하는 단일 목표 아래 연합하게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제 전 세계 교회는 오로지 전도와 선교에 올인하게 되었다.

▲ 바야흐로 테크놀로지가 선교 영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들이 메가처치 현상의 예비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다.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

세계선교운동이 제공한 또 하나의 유산은 바로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활용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 전기, 통신, 방송 등의 테크놀로지만 뜻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세계관이며, 사물과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자세와 태도요, 그리고 새로운 사유방식을 말한다. 테크놀로지란 ‘설정된 목표를 성취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의 활용’과 관계가 있다. 그리고 이 테크놀로지가 20세기 이후의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 냈다. 세계선교운동도 이 기술적 세계관에 물들게 된다.

앞서 말한 대로 세계선교운동이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자 이제 전 세계 교회는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데 전념하게 된다. 그리하여 20세기에 선교 전략의 폭발이 일어났다. 사실 수단과 방법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현대 선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는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의무라고까지 했다.

이 내용이 ‘현대 선교 헌장’의 골자다. 웨슬리, 휫필드, 피니, 무디 등도 같은 관점이었다. 목표 성취를 위한 수단과 방법의 적극적 활용은 19세기를 감리교도(Methodist)의 세기로, 20세기를 방법론자(Methodologist)의 세기로 만들었다. 온갖 종류의 선교 전략이 만들어졌다. 10/40창, 미전도 종족 입양 운동, 관문 도시 선교 전략, 전문인 선교 전략 등 군사 용어를 방불케 하는 온갖 용어와 전략 등이 난무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테크놀로지가 선교 영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들이 메가처치 현상의 예비적 조건을 형성하게 된다.

테크놀로지는 기본적으로 목표 달성의 수단과 연관이 되어 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첫째, 목표는 달성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따라서 목표는 절대로 추상적이어서는 안 되며, 구체적이고 가시적이라야 한다. 따라서 전략의 기본 중의 기본은 ‘성취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은 제거하고 보이는 것만 골라내는 것이 목표 설정의 기술이다. 둘째로 목표는 집중되어야 한다. 단 하나의 목표만 세워야지 이것저것 여러 개의 목표를 세우면 안 된다. 셋째로 설정된 목표 이외의 나머지 목표는 배제하고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목표가 세워지면 이제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잠깐! 그에 앞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목표가 달성되었는지 못했는지를 평가할 수 있는 측정 도구가 필요하다. 물론 이것은 수학과 통계학, 사회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점차 전도와 선교는 과학이자 테크놀로지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메가처치 현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 도널드 맥가브란은 '교회성장학'이라는 기이한 학문을 창시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2. 도널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과 교회성장학의 탄생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난 경위는 대략 이렇다. 먼저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고, 그에 영향을 받아 세계선교운동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계선교운동에서 교회성장학이 발생하고, 이것이 지역교회에 접목되면서 메가처치 현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도날드 맥가브란이라는 사람이 중요한데, 그는 세계선교운동의 귀한(?) 성과를 교회에 연결(link)시켜준 사람이다.

맥가브란은 인도 다모(Damoh)에서 인도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따라 인도에서 선교 사역을 하면서 그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되었다. ‘왜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고, 어떤 지역의 교회는 성장하지 않는가? 혹시 여기에 어떤 원리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교회 성장의 원리를 정리하여 1950년대 ‘교회성장학’이라는 기이한 학문을 창시하게 된다.

가. 새로운 목표, 교회 성장

도널드 맥가브란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세계선교운동과 복음주의권 교회에 전혀 새로운 ‘목표’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교회 성장(church growth)’이다. 대각성 운동가들의 목표는 ‘영혼 구령’이었고, 초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선교 명령의 순종’이었으며, 20세기 선교 운동가들의 목표는 ‘세계 복음화’였다. 그러던 것이 맥가브란에 와서는 ‘교회 성장’이 목표가 되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이것은 맥가브란이 세계 복음화라는 목표 달성 여부를 평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측정 방법을 ‘교회 성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니까 세계 복음화가 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전략, 전술, 인원, 재정을 쏟아 붓더라도 종국에는 교회가 성장하지 않으면 그 모든 수고는 헛것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그는 전도의 목적을 ‘회심’이 아니라 ‘제자화’라고 천명했다. 무슨 말이냐면, 전도와 영혼구원만으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결국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게’ 만들어야 된다는 뜻이다. 선교 전략은 교회 성장에 맞추어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맥가브란과 함께 지상 명령은 ‘교회 성장 명령’으로 바뀌게 된다.

나. 교회 크기에 대한 노골적 강조

지상 명령이 교회 성장이라면 이제 교회 성장은 거역할 수 없는 주님의 명령이 된다. 따라서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지상 명령을 순종하게 못하게 만드는 사탄의 훼방이다. 그가 쓴 <교회 성장의 이해>에는 교회의 성장에 대해서 저항하고 있는 신학자들과 일선 교회 목회자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는 교회 성장을 복합적 요인들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보려는 자를 ‘불가지론’자라고 부르며, 그들은 “확신이 있는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또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그저 전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이라는 주장을 ‘탐색의 신학(theology of search)’라고 부르며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또 종종 교회 성장을 방해하는 전문가들을 비판하며, 그들의 신학적 변명을 반박한다.

맥가브란은 교회 성장을 하나님의 역사나 섭리가 아니라 노골적인 추구 대상으로 보게 만들었다. 그는 자주 세계 복음화를 수량화하는 도표와 통계 수치를 인용한다. 그리고 그는 그 모든 수치와 그래프를 끌어 올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 성장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첫 번째 과업을 ‘교회 성장을 고려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문제는 신자와 교회, 선교사들이 교회 성장을 고려하지 않고 있어서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 성장을 고려하고, 의도하고, 목표로 삼고, 추구하라고 독려한다. 그리고 신자와 교회의 모든 노력은 ‘교인 숫자의 증가’로 맞추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맥가브란과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것은 전 세계 교회가 교회의 크기를 키우는 데 혈안이 되게 된 것이다.

다. 추수 이론(theology of harvest)의 제시

맥가브란은 그저 전도하는 것, 그저 선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씨만 뿌려서는 안 된다. 추수를 해야 한다. 결국 관건은 추수다. 추수를 위해서 씨를 뿌려야 한다. 맥가브란과 함께 강조점이 옮겨졌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들을 수 있도록 전해야 한다. 이제 관심사는 씨에서 밭으로 옮겨졌다. 말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중들이다. 전도와 선교는 말씀 중심에서 구도자 중심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전도와 선교가 구도자 중심으로 바뀌면서 중요한 방법론이 등장했다. 동질 집단의 원리가 그 한 예이다. 똑같은 복음이라도 같은 민족, 같은 문화권 사람들끼리 더 잘 전달된다는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씨 중심’에서 ‘밭 중심’으로의 강조점의 이동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그는 또 말하기를, 똑같은 복음이라도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맥가브란은 관심 없는 사람들의 ‘비추수지역’보다는 기왕이면 관심자들이 있는 ‘추수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했다. 무조건 뿌리지 말고 싹이 날 곳을 잘 살펴보고 뿌리라는 것이다. 맥가브란과 함께 역사상 최초로 교회는 목 좋은 자리를 찾아다니게 되었다.

3. 피터 드러커의 ‘경영의 지배’와 새로운 교회성장학

1970년을 지나면서 경영 혁명이 일어났다. 이것은 경영(management)이라는 활동이 더 이상 영리적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영역으로 확산된 것을 말한다. 피터 드러커는 이를 ‘경영의 지배’라고 부른다. 그에 의하면 2차 대전 이후 점차 병원, 대학, 정부, NGO 단체 등 비영리 단체에서도 광범위하게 경영 기법을 활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야흐로 경영이 인간 활동 전 영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교회도 속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말대로 1970년을 전후로 교회도 세속적 경영 기법을 적극 활용한다. 이와 함께 교회성장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곧 경영 테크놀로지와 마케팅 기법을 적극 도입한 교회성장학이 탄생한 것이다.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선교 전략의 측면이 강했다. 그러나 경영 기법을 받아들인 교회성장학은 개교회의 성장을 목표로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결국 개교회, 곧 개별 단체가 경영 기법을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의 비영리 단체의 경영의 원리에 의하면 교회는 먼저 자신의 가장 중요한 ‘사명’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 다음 사명을 성취 가능한 ‘목표’로 전환시켜야 한다. 성취 가능한 목표가 수립되면 이를 위한 마케팅, 경영 혁신, 자원의 효율적 안배와 활용 등의 전략이 수립되어야 한다. 전략 실행과 그에 따른 성과 측정, 평가가 뒤따른다. 그리고 그에 맞는 인사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수행할 수 있는 리더가 세워져야 한다. 이상의 모든 세속의 지혜가 교회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4. 피터 와그너(Peter Wagner)와 교회성장학의 범람

맥가브란이 ‘교회 성장’을 처음 말했고, 70년대 경영 혁명이 일어난 다음, 피터 와그너와 함께 새로운 교회성장학이 출현하게 된다. 어찌 보면 진정한 교회성장학이 탄생했다고 할 수도 있다. 피터 와그너를 비롯한 여러 교회성장학자들은 70년대 이후 각종 세미나 개최, 대학교에서의 강의, 책 출판, 잡지 발간, 집회 개최 등을 통해서 전 세계에 자신들의 신념과 방법론을 널리 확산시켰다.

▲ 피터 와그너. (출처 : www.wli.or.kr)
가. 지역교회의 성장에 대한 강조

맥가브란의 교회성장학은 선교 전략의 차원이 강했다. 그래서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주로 어느 국가나 지역에서의 개신교회나 가톨릭 교회, 성공회의 인구수, 보다 세부적으로는 루터교회, 감리교회, 침례교회 등의 교파와 교단의 성장 사례들이 많았다. 그러나 피터 와그너가 관심을 가지는 교회 성장은 대부분 개별 교회의 성장 사례들이다. 가령 그는 코랄릿지장로교회, 레드우드교회, 덴버에 있는 제일나사렛교회, 로버트 슐러 목사의 가든그로브크리스탈교회 등의 교회의 성장에 주목한다.

이러한 개교회 중심의 성장 이론이 등장하게 된 것은 50~60년대의 두 가지 전도 전략에 대한 비판 때문이기도 했다. 첫 번째는 빌리 그래함의 십자군 전도 운동이다. 1948년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전통적인 노천 캠프 부흥 집회를 극대화한 형태였다. 이 운동은 어느 한 지역이나 도시를 복음으로 초토화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또 하나는 남미의 케네스 스트라챤의 침투전도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빌리 그래함과 같은 어느 한 사람의 영웅적 전도자가 아니라 전 교인이 모두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전도 운동이었다. 그래서 전교인이 전도지를 들고 축호전도를 하거나 총동원 전도 주일날 불신자를 대거 끌어와서 복음을 전하자는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이 두 운동은 모두 다음의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그래서 효과가 있었는가?” 물론 이 효과라는 것은 개교회의 세례 신자 숫자의 증가였다. 긴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개교회의 수적 증가는 모든 전도 및 선교 운동의 최종 평가 기준이 된 것이다.

나. 자동적 성장의 강조

피터 와그너와 교회성장학파의 한결같은 주장 중 하나는 “성장은 자동적이다”는 것이다. 찰스 피니가 부흥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요, 과학이라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회성장학자들은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종종 생명체의 비유를 든다. 모든 생명체는 저절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제 성장은 더 이상 추구해야 하는 목표도 아니게 되었다. 건강한 교회라면 저절로 성장이 이루어질 테니 말이다. 반대로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혹은 감소한다면 그것은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교회성장학파의 이러한 자동적 성장 이론은 성장에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인 목회자와 교인을 죄인 취급하게 만든다. 교회성장학자들에 따르면 그들은 편견에 사로잡혀 있으며, 부정적이고, 고집 세고, 불충하며, 불성실한 자들이다. 또 그들은 지상 최고의 명령인 전도와 선교 명령에 불순종함으로써 엄청난 죄를 저지르는 자들이요,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 목자들이라고 비판한다. 이들의 고집이 교회의 자동적 성장을 막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교회 성장은 신자와 목회자의 당연한 의무요, 건강한 교회라면 저절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자동적 과정이 되었다.

다. 교회 성장 클리닉 테크놀로지

만일 몸에 병이 났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이와 똑같은 논리가 교회에 적용되었다. 교회가 성장하지 않거나 침체한다. 이것은 교회가 병들었다는 말이다. 병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치료해야 한다. 그렇다면 병든 교회는 어떻게 치료해야 하는가? 성장 클리닉을 받아야 한다. 이제 교회성장학은 병든 교회를 치료하는 클리닉 과정이 된다. 그리고 교회성장학은 엉뚱한 약속을 한다. 클리닉을 받아라. 교회가 커질 것이다. 컨설팅을 받아라. 그러면 교회가 성장할 것이다.

교회성장학은 일관된 주장이나 고정된 형태가 없다. 다만 한 가지 공통된 주장을 한다. “교회는 성장해야 하고, 성장할 수 있다.” 수단이나 방법은 나중 문제다. 뭐든 교회가 성장하면 훌륭한 전략이다. 피터 드러커의 <비영리 단체의 경영>은 교회성장학자들에게는 제5의 복음서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효과를 약속하기 때문이다. 효과를 보장하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 가능하다.

가령 구체적인 목표 인원의 설정, 불신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의 강조, 대집회와 소그룹의 두 날개 이론, 성령 운동, 치유 집회, 스타 시스템, 브랜드 마케팅, 프랜차이즈 등 뭐든 효과만 있으면, 뭐든 교회만 커지면 무조건 오케이다! 이상할 것 하나도 없다. 도리어 이러한 수단과 방법을 모색하는 것은 신자의 의무다. 윌리엄 캐리는 불신자의 회심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하지 않았던가?

5. 로버트 슐러(Robert H. Schuller)와 통속적 교회 성장 상술

이제 드디어 로버트 슐러가 등장한다! 사실 그동안 교회성장학은 너무 이론적이고, 너무 어려웠다. 누군가 교회 성장에 대해서 쉽게 번역해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런데 로버트 슐러가 등장한 것이다. 수많은 교회성장학자들이 있다. 그런데 슐러의 강점은 그가 이론가가 아니라 실천가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은 교수지만 슐러는 직접 목회를 하는 목회자다. 여기에서 슐러의 권위가 있다.

▲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기도하고 있는 슐러 목사. 그는 교회를 기업으로, 전도와 선교를 판매로,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출처 : whitehouse)
가. 야망의 정당화

로버트 슐러는 노먼 빈센트 필을 따라 ‘적극적 사고’ 혹은 ‘긍정적 사고’를 강조했다. 쉽게 이야기하면 ‘야망을 품으라’는 뜻이다. 슐러는 윌리엄 캐리가 말했던 ‘위대한 하나님의 일(Great Thing)’을 ‘교회를 키우는 사람의 일’로 바꾸어 놓았다. 이제 교회를 키우는 것이 위대한 일이 되었다. 그의 교회성장학이란 한 마디로, ‘교회를 키워라, 그것도 엄청 크게 키워라’이다. 이것을 위해서 목사는 무조건 크게 생각해야 한다고 충고한다. “큰일은 크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일어난다.” 그래야 기적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에 반대하는 모든 생각은 부정적인 생각이다. 부정적 생각은 물리쳐야 한다. 목사들이여, 웅장한 교회당, 화려한 시설, 엄청난 재정, 거대한 군중을 꿈꾸라! 그는 목사들을 독려한다. 결국 슐러는 노골적으로 목사의 야망과 탐욕을 정당화했다.

나. 판매 상술의 정당화

슐러는 교회를 기업으로, 전도와 선교를 판매로, 불신자를 고객으로 비유하는 데 조금도 거리낌이 없다. 놀라울 지경이다. 그는 성공을 위한 7가지 원리에 대해서 조언하면서 교단과 신학교는 도매상인으로, 지역교회는 소매상인이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다. “성공적인 종교적 소매의 비결을 더 잘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가 장사를 잘 해야 한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면 교회가 장사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다음의 7가지를 조언을 한다.

먼저 목 좋은 곳을 선택하라. 맥가브란식으로 말하면 비추수지를 피하고 추수지를 선택하라는 말이다. 농어촌이나 산간벽지, 오지는 피해야 한다. 신도시나 아파트 밀집 지역이 목회의 최적지다. 둘째, 주차장을 확보하라. 셋째, 상품 목록을 구비하라. 여기서 상품이란 목회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이다. 즐비한 목회 상품을 잘 갖추라는 말이다. 넷째, 서비스를 제공하라. 다섯째, 외형을 강조하라. 안내원들도 기왕이면 미스코리아를 세워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한국의 어느 교회 목사도 비슷한 말을 한 것을 기억한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지만 인간은 외모를 본다.” 여섯째, 온 교인이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사고하도록 만들라. 누군가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을 보면 입 닥치게 하라. 그리고 일곱째, 경악할 만한 내용이다. 현금 유통을 잘 하라! 무슨 말이냐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은행에서 빚을 끌어다 쓰라는 말이다. 현금이 돌아야 사업을 잘 할 것이 아닌가! 바야흐로 메가처치 현상이 도래했다.

메가처치 현상은 절대로 일부 대형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은 교회라고 예외는 없다. 메가처치 현상은 지금 온 세계를 지배하고 점령하고 있는 거대한 현상이다. 메가처치 현상은 바로 우리가 다니는 교회 안에서 버젓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이다. 참으로 뻔뻔스럽고 가증스러운 배교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마치 그 옛날 모세 시절에 이스라엘이 ‘야훼’라는 이름의 금송아지를 숭배했던 것처럼, 마치 에스겔 시대에 제사장과 백성들이 성전 마당에서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을 숭배했던 것처럼, 그리고 마치 예수 시대에 장사치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바꾸었던 것처럼. 서지 못할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고 말았다. 이 가증한 것은 바로 ‘숫자’요, ‘규모’요, ‘힘’이요, 그리고 ‘바알’이다.

메가처치 현상과 함께 참으로 기이한 크리스천들이 등장했다. 그것은 ‘사랑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이다. 사랑할 줄 모르는 크리스천은 짖지 못하는 개요, 독 없는 독사요, 앙꼬 없는 찐빵이요, 물 없는 오아시스다. 그런데 교회의 변명을 들어보라. 신자와 교회는 불신자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전도와 선교를 하면서 “전도가 당신들을 사랑하는 증거”라고 우긴다. 그래도 안 되면 일부 교회가 시행하는 사회사업을 예로 든다. 그래도 교회는 사랑을 많이 실천하고 있다고.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함께함’의 사랑이요, ‘자신을 전부 내어줌’의 사랑이요, ‘대신 죽음’의 사랑이다. 그런데도 교회는 오늘도 온 천지를 다니며 교인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지만 억지 전도로 교회를 키우려는 교회를 향해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신광은·박삼종 /  열음터 공동체 목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