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3)
예수님의 마음을 담은 경제 이야기(3)
  • 구교형
  • 승인 2008.09.1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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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M 아카이브>는 나누고 싶은 과거 기사 ‘다시보기’ 코너입니다.

성경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를 지지하지 않는다

Ⅲ. 성경을 통해 보는 경제 사상

1. 성경은 특정 체제나 제도를 절대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

성경은 다른 어떤 경전과 비교해도 추상적 교훈을 넘어 여러 가지 제도나 규칙(법률)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의 구체적인 일상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자체를 옹호하려는 시도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 이 세상에 건설하는 그 어떤 정치 제도나 경제 체제도 인간의 이기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성경을 통해 절대적 지지를 끌어내려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는 결코 어느 특정 국가, 특정 제도, 특정 정책과 동일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자주 이 기본 원칙이 무너지곤 한다.

이 점에서 김진홍 목사는 큰 오류를 범한다.

'성경은 이 점에 대하여 훨씬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르기를 '네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고 가르쳤다. 그런데…우리가 선택하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바로 이 가르침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다.…자유민주주의가 내세우는 경제 질서가 시장 경제이다. 그런데 시장 경제가 바로 '네가 하기를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하라'는 원칙 위에 서 있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이웃과 사회를 위해 많이 한 사람이 잘 살도록 되어 있다. 남들이 필요로 하는 일을 더 잘 수행한 사람에게 더 많은 대가가 지불되는 체제가 바로 시장 경제이다.'(김진홍 아침묵상/06.7.19)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예수님의 황금률(마 7:12) 가르침의 원칙 위에 서 있다는 주장 자체가 매우 엉뚱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으로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 역시 무모하다. 시장경제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삶을 살라는 예수님의 덕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적용은 사실 시장 경제의 아버지인 아담스미스 사상조차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말이다.

'…그런데 자본을 투자하는 것은 오로지 이윤을 얻기 위해서이다. …사실 그(자본가)는 사회 일반의 이익을 증진시키려고 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얼마만큼 그것을 증진시키는지도 알지 못한다.…그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한다.…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그렇게 하려고 했을 때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의 이익을 증진하는 것이다.'(국부론/아담 스미스)

그런 식으로 주장하자면 초대 교회의 유무상통의 원리(행 4:32~35)로부터 사회주의(공산주의)가 비롯되었다고 말하는 게 무슨 문제가 있을까? 우리는 다만 성경의 가르침에 기반해 가능한 한 더 하나님나라의 공의에 가까운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노력할 뿐, 특정 체제나 제도를 절대화해서는 안 되겠다. 기독교는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결코 자본주의도 아니다.

2. 개인의 책임이냐, 구조적 모순이냐?

▲ 개인적 구제와 헌신은 매우 칭송하면서도, 사회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매우 불온시하며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 구조적 관심을 좌파니 빨갱이라는 말로 매도하기도 한다. 사진은 박성수 장로가 회장으로 있는 이랜드 비정규직의 농성 장면.
우리 사회에 이상한 병폐가 있다. 개인적 구제와 헌신은 매우 칭송하면서도, 사회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은 매우 불온시하며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사회 구조적 관심을 좌파니 빨갱이라는 말로 매도하기도 한다. 반면에 또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개인의 책임은 무시하면서 온통 사회 구조 탓만 하며, 그걸 진보라고 착각한다. 일반적으로는 보수적일수록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고, 진보적일수록 사회 구조와 제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면에서 성경은 개인의 문제와 구조적 과제를 함께 바라본다. 경제의 문제에 한정해 살펴보자. 우선 성경은 개인의 게으름으로 인한 가난을 분명 책망하고, 부지런할수록 부유해진다고 말한다(잠 6:6~11, 10:4, 12:24, 24:33, 34). 그러므로 부자를 무조건 사기꾼처럼 가난한 사람을 무조건 청빈한 희생자로 봐서도 안 된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불의한 사회 구조로 인한 희생이 있음도 분명히 지적한다(삼상 8:10~17, 시 73:1~12). 시대마다 불의한 사회 구조의 문제가 있기에 선지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면 개인의 책임과 사회 구조의 문제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 내가 아는 한 그것은 천편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고, 그 시대마다 '무엇이 더 주요한 과제인가'하는 것을 올바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구조의 문제가 개인의 책임에 비해 가볍게 느껴질수록 건강한 사회다. 예를 들어 북유럽국가들은 인권, 자유, 경제적 성장의 정도, 복지 정책 등 사회 제도 거의 모든 면에서 상당히 진전된 나라들이므로 상대적으로 개인의 책임이 더 강조되어야 하고, 그런 면에서 그들은 건강한 사회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르게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임에는 틀림없지만, 경제적 성숙도와 빈부격차, 복지 정책, 편향적 인권 의식 등을 놓고 볼 때 건강한 사회로 보기는 힘들다.

3. 이스라엘 제도를 통해보는 성경의 경제 사상

성경에서 우리는 다양한 경제 행위들을 보여주는 장면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성경이 구체적 경제 원리와 법칙 등을 적어놓은 경제학 교과서는 아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우리는 의외로 많은 경제 사상과 제도화된 경제 정신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을 주인(왕, 아버지)삼고, 모든 인간은 그의 평등한 백성(자녀)되는 공의로운 하나님나라 안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공의로운 경제는 매우 중요한 한 부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는 원대한 원칙, 구상을 우리는 '경륜'이라고 부른다(엡 3:2, 9). 그런데 바로 이 경륜(Okonomie)라는 단어에 유신론적 배경이 탈색되면서 오늘 우리가 사용하는 경제(economy)라는 단어가 파생된다. 이처럼 '경제'에는 하나님의 우주적 경륜이 개입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경제'를 단지 '돈벌이'(방법, 정신)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땅에서 보이시려고 했던 당신의 성품을 닮은 거룩하고 공의로운 나라, 곧 이 세상 나라의 그것과 구별되는 사회, 경제의 그림은 무엇을 통해 알 수 있는가? 바로 선민 이스라엘을 통해 만들려고 하셨던 새로운 나라의 청사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것은 '그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신 4:5~8)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건설을 통해 구상하셨던 공평과 정의의 하나님나라를 청사진 삼아 우리 시대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마땅할 것이다.

(1)제국의 영광은 하나님나라와 다르다.

하나님은 새로 탄생하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에 흔하디흔한 강대국, 제국들과는 다른 목표, 다른 사상, 다른 원리를 가진(신 7:7) 구별된 하나님나라를 보여주기 원하셨다. 그러나 이집트에서의 노예 생활, 길고 지겨운 광야 생활, 위험천만한 정복 시대를 지나 지킬 집도, 재산도 생겨나니 슬그머니 주변 나라들의 발전된 제도들이 부러웠다(신 8:12~14). 그 가운데서도 언제나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강력한 상비 병력을 거느린 카리스마적 군주 제도가 있으면 우리도 더 강력하고 번영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커져갔다(삼상 8:5, 19, 20). 그리고 그러한 기대와 꿈은 벌써 오래전부터 틈틈이 싹텄다(삿 8:22, 23, 9:18).

많은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이 군주 제도를 허락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 왕에게 절대 복종하는 군주 제도가 갖는 위험성을 충분히 설명하신 후(삼상 8:11~17),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담은 독특한 이스라엘 군주 제도를 허락하신다. 왕이 있으되 다른 나라처럼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스스로 법이 되고 신이 되는 그런 절대 왕정이 아니라, 여전히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물어 수행하는 앞선 청지기 같은 모습이다. 그러므로 백성들도 눈앞의 왕 이전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여전히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만 한다(삼상 12:13~15). 따라서 그 나라는 힘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나라여서는 안 되며, 왕은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쥐락펴락 하는 자여서는 안 된다(신 17:14~19).

그 나라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복종하는 나라요, 그 나라는 공평과 정의의 법을 개인적이고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나라요, 그러한 구별된 모습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며 그 분이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나라다(출 19:6).

선민 이스라엘이라는 이스라엘의 정당성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계획과 의도를 잘 지켜간다는 복종 아래서만 보장되는 것이지, 결코 배타적인 것도 혈통적인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그러한 하나님나라 모상다운 질적 탁월성을 잃어버리고, 세상 여타 나라와 똑같은 전제 군주국, 제국이 되었을 때(왕상 10:26~29, 대하 18:1, 2) 하나님은 여지없이 다른 나라들을 통해 심판하셨다. 물론 왕의 운명도 꼭 같았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비극적 운명을 목격한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교훈을 받게 되는가? 우선,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세상 그 어떤 나라도 더 이상 하나님나라의 모상이 될 수 없다(단 4:17, 25, 2:44). 그러나 인류는 유사 이래 늘 특정 국가, 특정 제도를 하나님나라와 착각해 왔다. 그러므로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성경이 가르치는 대안적 경제체제인 것처럼 말하거나, 과거엔 로마 제국을 절대화했듯이 지금은 미국이 하나님나라를 보여주는 모상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렘 14:13, 14). 그렇다고 이 세상 나라와는 절연하고 오직 초월적 하나님나라만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부단히 변화시켜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나라의 공의가 드러나도록 애써야할 것이다(요 17:15).

구교형/ 성서한국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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