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은 전능한 구세주인가
시장은 전능한 구세주인가
  • 장윤재
  • 승인 2007.05.28 1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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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는 "시장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 종교 교리'

   
 
  ▲ 장윤재 교수는, 오늘 우리 시대의 주류 경제 사상인 신자유주의는 '시장을 전능한 구세주로 예배하는 경제 체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신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한다. ⓒ뉴스앤조이 주재일  
 
신자유주의의 신학적인 문제

신자유주의란 간략히 말해 케인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반발로 19세기의 고전적 자유주의를 소생시키고 부흥시키려는 1970년대 이후의 현대 경제 사상 운동을 가리킨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적 경제 이론은 고전적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시장은 정부의 개입이 최소화되었을 때 근대 민족 국가가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효율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단순한 자유 시장 경제 이론을 넘어선다. 신자유주의란 시장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는, 시장에 대한 일종의 ‘종교적 신앙’을 의미한다.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시장 근본주의 종교의 교리는 1974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의 사회철학에서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아담 스미스 이후의 가장 위대한 자본주의 철학자’라 불린 하이에크는 마르크스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였다.

하지만 그는 재미있게도 마르크스와 똑같이 독일어권에서 영국으로 이주하여 대부분의 시간을 대영 박물관에서 보내며 자본을 주제로 연구에 몰두했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마르크스는 오른쪽 귀가 먹었던 반면 (때문에 ‘우파’의 소리를 듣지 못했고), 하이에크는 왼쪽 귀가 먹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좌파’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이에크는 단순한 이론적 경제학자가 아니라 사상의 힘으로 세계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믿은 열정적 선동가였다. 그의 사상의 가장 독창적인 주장은 ‘사회정의’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이웃 사랑’이라는 기독교 윤리에 대한 노골적인 거부였다.

그에 의하면 사회정의는 ‘신기루,’ ‘미신’, 혹은 ‘사교’(邪敎)에 불과하며, 개인의 자유(liberty)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선의(善意)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면 사용하기를 부끄러워해야 할 싸구려 저널리즘’에 불과하다.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과거에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던 부족사회에 주어진 원시적 윤리이며, 따라서 이를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적용하려는 것은 ‘부족 사회의 윤리를 열린 사회에 강요하려는 억지’에 불과하다.

이렇듯 하이에크가 꿈꾼 ‘급진적 자유주의’ 사회는 극단적인 사회적 불평등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부정을 의미했다. 때문에 어떻게든 자유와 평등이라는 두 이상을 조화시키려 애쓰던, 그와 가까운 자유주의 사상가들조차 그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 도대체 어떤 사상이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낳았는가?

하이에크 사상의 핵심 요소

하이에크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첫 번째 핵심 요소는, 역사 안에서 인간의 의식적이고 창조적인 역할을 부인하는 철저한 ‘반이성주의’(anti-rationalism)다. 하이에크는 서구 사회가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와 같은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로 나아가게 된 문제의 뿌리가 인간의 이성에 대한 지나친 신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는 물론 이성의 역할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인간이 이성의 힘으로 자신의 사회를 설계하거나 변혁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치명적 자만’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사상의 두 번째 핵심 요소는, 모든 인간의 질서는 철두철미 사회적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라는 ‘사회적 진화주의’(societal evolutionism)다. 생물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하이에크는 생물학적 진화 이론을 사회 질서에 그대로 적용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모든 질서는 경쟁적 시장에 의해 창조되는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다. 아무도 그것을 설계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사회적 불평등은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그것이 어디로 갈지,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질서를 만들고 명령하는 사람이 없어도 인간 사회는 사회 진화 덕분에 혼란이 아니라 오히려 더 훌륭한 질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하이에크 사상의 세 번째 핵심 요소는 모든 초월의 세계를 부정하는 철저한 ‘자연주의’(naturalism)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힘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지는 이 감각의 질서 외에는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는 모든 추론적인 형이상학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철저한 칸트주의자였다. 하이에크에 의하면 모든 의미의 세계는 내면의 정신세계로 귀속되며, 따라서 인간의 경험과 이해관계와 감각의 질서에 조금도 때 묻지 않은, 어떤 순수한 외부적 혹은 초월적 관점은 인식론적으로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하이에크는 ‘궁극적인 것’ 혹은 ‘초월의 세계’에 대한 철저한 철학적 회의론자였던 것이다.

하이에크 사상에 대한 비판

이러한 하이에크의 사상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에서 비판할 수 있다.

첫째, 시장이 사회적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라는 하이에크의 주장은 사실적으로 틀렸다. 경제학자 폴라니(Karl Polanyi)가 그의 역작 <거대한 변환>(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지적했듯이,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자연적인 생성물이라는 생각은 허구적인 상상에 불과하며, 역사적으로 자유 시장은 오히려 중앙집권적이고 강력한 국가의 개입과 통제로 형성했다.

둘째로, 우리가 하이에크의 사상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윤리적 ‘규범’과 ‘당위성’을 상실한 극도의 사회적 보수주의이기 때문이다. 그의 진화론적 사회윤리는 이미 사회적으로 우세한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강한 경향성을 띠고 있다.

그가 비판한 대로 기독교의 이웃 사랑 윤리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윤리가 되기에는 너무 순수한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부정한다면 그건 인간의 윤리적 가능성을 위한 궁극적 규범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한다. 윤리적 규범과 당위가 없는 하이에크의 저서들이 그래서 ‘도덕적 공허’로 가득 차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이에크의 사상에 신학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인간 이성의 오용과 남용에 대한 정당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이 ‘하늘의 가능성’에 대해 닫혀 있는 철저한 자연주의 사상이기 때문이다. 하이에크는 인간의 문명이 그 안에 추가의 진화를 스스로 이끌어내는 자기 교정 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살아 있는 유기적 생명체와 같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한 사회 질서에 대한 비판과 개선의 노력은 반드시 주어진 가치의 틀 안에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내재적 비판’의 원칙을 내세우며 하이에크는 인간의 질서에 대한 모든 열려진 비판과 갱신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다.

그는 ‘이미 주어진 것’ 이외의 것에 자신을 완전히 닫아버린 완고한 폐쇄주의자였던 것이다. 신학적으로 이것은 역사를 비판하고 갱신하는, 초월적인 희망의 원리를 스스로 포기한 ‘자폐적 세속주의’를 의미한다. 하이에크의 사상에는 우리의 조건과 관습을 넘어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없다. 이 세계로 침범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나라’도 없다. 거기에는 오직 자신을 스스로 성취해 나아간다는 시장의 무한한 진화 사슬밖에 없다.

시장은 자연 세계의 물과 바람과 같아서 인간이 통제할 수도 또 통제하려 해서도 안 되는, 어떤 신비하고 성스러운 존재라고 하이에크는 주장했다. 때문에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의 힘으로 사회를 변혁하려고 헛되이 노력하지 말고, 경쟁적 시장이 창조한 자생적 질서와 사회적 진화에 전적으로 우리의 운명을 맡기라고 그는 힘주어 말했다.

하지만 자생적 질서라는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할 거라는 자연주의적 낙관주의의 오류는, 미국의 저명한 신학자 니버(Reinhold Niebuhr)가 이미 지적했듯이, 초월의 영역을 현상의 진행 과정에 무의식적으로 귀속시킴으로써 역사 안에서 절대적인 선이 출현하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하늘의 소망’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완고한 불신앙을 의미한다.

그것은 또한 ‘모든 희망을 넘어선 희망’(hope against all hope, 롬 4:18)으로 우리의 이 불완전한 역사를 참회하고 갱신하려는 모든 종교적 이상과 노력에 대한 근원적인 부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장을 전능한 구세주로 예배하는, 오늘 우리 시대의 주류 경제 사상인 신자유주의는 신학적으로도 동의할 수 없는 하나의 가설로 남아 있다.

장윤재 / 이화여자대학교 기독교학부 교수
* 이 글은 한국 <뉴스앤조이>에도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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